[건강정책칼럼]
신종 플루 대유행이 건강 정책 결정에 주는 교훈
조홍준(울산대)
출처 : 건강정책포럼(http://hpforum.or.kr/?bseq=1205&z=bbs.bboard01&zz=view)
신종 플루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우려 중 상당 부분은 근거가 부족하고,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것이 사실이지만, 정부의 대응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종 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 등의 항바이러스제의 확보 실패는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체 국민의 5%가 사용할 수 있는 정도를 확보하고 있는 데 반해 대비가 철저한 영국은 국민의 50% 정도가 사용할 수 있는 양을 비축하고 있다. 이런 비축량의 부족은 타미플루 처방에 대한 과도한 제한을 하거나 처방 지침을 자주 변경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의료인의 불만과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환자 스스로 자신의 증상을 인터넷에 입력하여 무료로 타미플루를 받도록 하는 영국에서 타미플루 내성을 걱정하는 것과 큰 대비가 된다. 백신 정책의 경우에도, 충분한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필수 예방접종에 필요한 백신을 어떤 방법으로 확보할 것인가에 관한 국가 정책의 부재가 문제다.
신종 플루 대책 수립에는 공무원, 감염병 전문가, 그리고 소수의 역학자가 관여하고 있으며, 2006년에 작성된 “신종 인플루엔자 대비․대응 계획”은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이 자료는 인플루엔자의 유행 단계에 따른 대응 계획과 분야별 계획을 총망라하고 있다. 대유행시 통제와 관리, 정보 공유와 의사 소통, 감시, 의료 서비스 제공, 백신 및 항바이러스제, 공중보건 조치는 물론 교육 및 연구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만들어진 계획이 왜 실제 상황에서는 잘 작동되지 않고 있을까?
첫째, 우리나라 현실을 반영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서에는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할 환자 수, 입원이 필요한 환자 수 등이 계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규모의 환자 발생했을 때 이를 수용하기 위한 병상과 중환자실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지, 비응급 환자의 입원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민간 의료기관과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둘째, 우리나라 의료 체계에 관한 고려가 부족했다. 400여 개의 거점 병원을 지정해서 신종 플루 의심 환자를 치료하게 하면서 그동안 신종 플루 환자의 관리를 담당하던 보건소나 공공 병원은 집단 감염 관리 등으로 그 역할을 축소하였다. 또한 환자 최초 접촉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의원은 신종 플루 관리에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거점 병원 중심의 대책은 접근성과 형평성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거점 병원의 대부분이 대형 병원이고 이는 국민의 지리적 접근성을 떨어뜨린다. 더구나 타미플루 약값을 제외한 진찰료, 검사료, 응급의료 관리료 등은 모두 환자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저소득층에게 과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게 된다. 환자가 대량 발생했을 때에도 이런 체계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공의 역할을 축소한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최소한 보건소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신종 플루 관리 기능은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건강보험의 역할에 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신종 플루 관리는 보건 사업인가 아니면 일상적인 질병 치료인가? 전자라면 국고로 이를 부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고, 후자라면 건강보험이 담당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타미플루만 국고에서 부담하고 나머지는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셋째, 형평성 등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전 고려가 부족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종 플루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 심각한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그런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제는 백신 접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백신이 신종 플루 예방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 그리고 백신 수급이 원활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백신의 1회 접종으로 충분한 예방 효과를 얻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겠지만) 때문에 벌써 어떤 집단에게 백신을 우선적으로 접종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전염력 차단을 우선시할 것인지 아니면 심각한 질환의 발생을 우선시할 것인가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 것이다. 관건은 이런 결정과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일 것이며, 이는 단순히 전문가나 정부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신종 플루 대유행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닥쳐올지도 모를 새로운 전염병의 대유행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전염병 관리가 단순히 담당 부서나 ‘내용 전문가’에 의해서 결정되기는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타미플루 강제 실시 등 특허 관련 문제, 효과적인 관리를 위한 각급 의료기관의 역할과 조정, 건강보험의 역할, 민간 의료기관의 공공성 등 광범위한 전문가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효과적이고 수용 가능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전염병 관리 대책을 만드는 과정에 광범위한 전문가를 참여시켜야 한다. 둘째, 전염병 관리 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필요한 재정, 인력, 연구 등을 확충해야 할 것이다. 셋째, 전염병 관리의 핵심인 백신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방안(예를 들어 국영 백신 회사 설립 등)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셋째, 전염병 관리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평성 등 윤리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기전을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염병 관리 대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