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11일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기획단(아래 기획단)’의 11차 회의 결과를 보도자료로 발표했다. 기획단은 지난 2년간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을 논의해온 기구로 부정기적으로 회의를 해오면서 이제 거의 최종안을 정부에게 넘긴 듯하다. 아직 구체적인 최종안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지난 2년간의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논의가 완전히 산으로 가고 있어 내용의 심각성을 국민들이 알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눈 뜨고 코 베어 갈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가입자의 재산과 자동차에 대한 보험료를 축소·삭제하면서도 양도·상속·증여 소득에 대해서는 부과를 제외하자고 하는 것은 ’보험료 부과체계의 형평성’이라는 개편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말이다. 결국 고액 재산가들만을 위한, 반서민적인 개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은 가계 자산 중에서 금융 자산 비중이 매우 낮고, 부동산 자산 비중이 매우 높다. 한국에서 양도·상속·증여세는 재산 과세 중 핵심이기도 한데, 보험료 부과에서는 제외하자는 정부의 입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정부는 최저보험료인 ‘기본보험료’를 신설하려고 한다. 빈민층의 최저 건강보험료 하한선을 8000원~1만5000원으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인데, 역진적(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이 더 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2012 건강보험통계연보에 따르면, 현재 건강보험 적용인구 4999만 명 중 의료급여 수급권자는 146만여 명에 불과하다. 이는 OECD 국가 중 유례가 없는 것으로, 인구 중 단 2.8%만이 건강보험료를 면제받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지역가입자 중 보험료를 1만 원 이하로 내는 세대가 5.7%이며, 1만5000원 이하를 내는 세대는 12.1%에 달한다(건강보험통계연보 2012).
그런데 정부 안대로 기본보험료가 부과되면 이분들이 모조리 최대 1만5000원을 내야 하는 것이다. 월 270만 원 이상 내지 않는 건강보험료 상한제를 두고 있으면서 하한선까지 도입하려는 것은 너무나도 ‘반서민적’이다. 게다가 현재도 약 140만 명 가량이 6개월 이상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이기 때문에 기본보험료 안이 관철되면 빈곤층의 허리는 더욱 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외국에도 ‘기본보험료’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은 OECD국가 중 노인빈곤율이 가장 높고, 최저생계비가 낮은 나라다. 국가연금이나 기본생활보장 명목으로 월 1만5000원 정도는 가볍게 낼 수 있는 서구 복지국가가 아니란 말이다.
반서민적인 기본보험료, 건강보험재정에도 별 도움 안돼
지난 2012년 건강보험공단 쇄신위원회(아래 쇄신위)에서 개편 일원화 모형으로 돌린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면, 이런 방향이 명확히 드러난다. 당시 쇄신위는 보험료 부과대상에서 지역가입자의 재산과 자동차 모두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이럴 경우, 지역가입자 보험료 총액 7조3166억(2011년 기준) 중 종합소득보험료는 2조224억여 원만 남아, 약 5조2000억여 원의 재정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왔다.
여기에 금융소득 등에 대한 직장가입자 종합소득보험료 1조577억 원과 피부양자 종합소득 보험료 7300억 원을 반영해도 약 3조4000억여 원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건강보험재정의 약 10%에 해당되는 액수다. 물론 당시에는 양도·상속·증여에도 부과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로인해 확보되는 연 2조432억의 건강보험료를 포함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제 1조3000억여원 부족하다고 밝혔다.
양도·상속·증여 소득에 건보료를 부과했음에도 발생하는 이런 부족분을 부가가치세 등의 간접세에서 메우려고 한 게 박근혜정부 집권 초인 지난해 3월 언론에 잠시 나왔던 ‘건강세’ 논란이다. 그런데 이번 개편 안에서 양도·상속·증여 소득에 대한 보험료 부과를 제외하겠다니 그로인한 부족한 재정(시뮬레이션상 약 3조4000억여 원)은 어떻게 메우겠단 말인가.
이를 기본보험료로 채우려는 게 정부의 의도이지만, 기본보험료로 채울 수 있는 금액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보험재정 부족분을 메우는 방법은 근로소득의 건강보험요율을 적게는 15%에서 많게는 20% 가량 올리는 것밖에 없다. 아니면 건강보험재정이 파산하거나 건강보험 보장성이 떨어지게 된다. 결국 정부는 지금 자산소득자의 재산 보존을 위해 근로소득자의 보험료 부담을 늘리거나 건강보험의 기능 약화를 받아들이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꼼수를 펴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제도는 87년 민주화대투쟁의 성과인 동시에, 한국 복지제도의 마지막 보루다. 아플 때 주저하지 않고 병원에 갈 수 있게 해주는 건강보험은 지금까지 서민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왔다. 이런 건강보험재정이 지금 OECD국가 중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의료비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가 향후 노령화와 노동인구의 축소 등을 고려하여 서민부담을 가중하는 역진적 방안을 개편 안에 넣으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서민증세-부자감세 : 새삼스럽진 않지만 위험하다
▲ 국민건강보험공단 누리집 화면 캡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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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방향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박근혜 정부의 최경환 노믹스와 일치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 등 각종 부동산 부양책 등을 쓰면서 고액 자산가와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물리는 세금은 줄여 주려고 한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도 부동산경기 부양을 위해 손봐 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 서민들의 부담을 늘리는 담뱃세 인상, 주민세, 영업용 자동차세 인상 등이 발표되면서 실제로 부자감세, 서민증세가 시작되었다.
자산소득이 부동산에 편중된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자산과 매각·양도로 발생하는 소득에까지 보험료 부과를 면제해 준다는 것은 명백한 고액자산가 감세다. 그로 인한 부족분은 결국 어디서 메우는가. 앞서 보았듯 직장가입자 부담이나 소비세 등 간접세 인상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혹여나 메우지 못한다면 그때는 건강보험 보장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고, 이는 민간보험 시장의 확대를 가져오게 된다. 공적연금의 위축이 사적연금 시장의 확대를 낳듯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취약은 민간보험의 확대를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안’는 향후 한국의료체계의 재앙이 될 뿐 아니라, 명백한 부자감세로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에도 장애 요인을 남길 것이다. 아직 정부의 최종안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방향이 가져올 재앙은 향후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건강보험의 부자감세, 서민증세 안인 이번 개편 안을 역진적인 방향에서 누진적인 방향(부자일수록 많이 내는)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정형준(무상의료운동본부 정책위원장)
* 이 글은 정형준 회원이 <오마이뉴스>에 2014년 9월 29일로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6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