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결정적 증거, 판결문에 다 있다
‘PD수첩’ 김보슬 PD가 말하는 재판의 ‘결정적 장면’
출처 : 오마이뉴스 10.01.21 13:43 ㅣ최종 업데이트 10.01.21 15:44
김보슬 (trueornothing)
‘상식적인 판결인데도 축하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그래도 세상이 진실을 알아줘서 다행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동안의 맘 고생 몸 고생 생각하면 피눈물 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기를.’
다섯 명의 피고인에게 종일 쉴 새 없이 날아든 축하 문자들. 수백 통이 넘는 문자들 대부분엔 거의 예외 없이 위와 같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이 문자들을 받으며 우리는 다시 ‘피눈물’을 흘렸다.
그간 우리는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아왔다. 어제(1월 20일) 오전, 재판정에 들어설 때 우리가 두려웠던 건 그래서 유죄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이번 판결은 오랫동안 우리를 옥죄던 ‘정치적 낙인’에 대한 재심이나 다름없었다. 무죄를 선고 받더라도 판결문 어느 구석에 ‘허위’ ‘의도적 왜곡’이라는 말 한 마디만 나와도 그건 유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치를 떨며 경험했듯, 보수언론과 정치권에서 그 단어 하나로 또 우리를 얼마나 매도하고 범죄 집단으로 몰아갈지 안 봐도 그림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겐 무엇보다 두려운 것이었다.
상식과 양심에 입각한 판결… “
2010년 1월 20일 오전 11시. 우리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더 기뻤던 건 판결의 구체적 내용이었다. 판사는 검찰의 주요 공소사실에 대한 5가지 항목 모두 “허위가 아니”라고 했다. 어렵고 복잡한 용어들 투성이라 일반인들은 물론 기자들도 다는 알아듣지 못하였겠으나, 우리 다섯 명의 피고인들은 안다. 판사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과학적 진실과 상식, 양심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눈감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다섯 번의 공판 전 과정을 지켜본 이라면, 누구든 그처럼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판결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로 버텼고, 배반당하지 않았다.
검찰은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안 되는 판결”이라며 반발했다. 재판정에서도 느꼈듯, 검찰이 말하는 ‘상식’이란 보통 사람의 상식과는 다른 것 같다.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는 게 법정에서 나타난 증거자료를 봐도 명백히 인정되고, 일부 사실은 피고인들과 증인들도 시인했는데, 법원이 전부 사실로 인정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즉각 항소 의지를 밝혔다고도 한다. 검찰과 우리가 전혀 다른 재판을 치렀던 것인가?
그들이 어느 법정에 들어왔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검찰은 이미 “아레사 빈슨이 vCJD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재판을 준비하던 중, 아레사 빈슨 유족이 의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 자료를 입수했다. 그 계기는 “빈슨 소송서 vCJD 언급 안 돼”라는, 검찰의 말을 인용한 언론보도(2009.6.15 중앙일보)였다.
취재를 직접 했던 PD로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사전취재, 현지취재, 사후취재 모두 일관되게 아레사 빈슨이 인간 광우병 의심진단을 받았다고 이야기한 빈슨 유족이 소송에서 vCJD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는 소송자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1만2000페이지에 달하는 검찰 수사 자료 어디에도 그 내용은 없었다. 제작진의 의도적 왜곡을 증명할 수 있는 핵심 근거일 수도 있는 것을 검찰은 왜 누락했을까. 그때만 해도 설마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두고 검찰이 거짓말을 했을까 싶었다. 어렵게 소장을 입수해 명백히 “아레사 빈슨은 MRI 검사 결과 vCJD로 진단받았다”는 대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의를 실현하라고 부여된 권한과 국민의 세금으로 검찰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법정에서 번역자 정씨에게 이 소송자료에 대해 신문을 하는 도중, 검사가 짜증스레 맞받아쳤다.
“우리가 그 자료 검토 안 한 줄 아십니까?”
그렇게 검찰은 아레사 빈슨이 사망 전 vCJD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검찰의
미국과의 사법 공조를 통해 검찰이 입수했다는 그 소송자료는 지금 어느 서랍 깊숙이 들어있을까. 그러고도 검찰이 판결에 대해 ‘비상식적’ 운운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검찰·정지민이 몰랐던 자막 문서 공개… “오역은 감수에서 걸러지지 않았다”
검찰의 공소사실은 거의 대부분 번역자 정씨의 주장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정씨의 주장에 따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판 과정은 거꾸로 그런 검찰 기소의 근거 즉, 정씨의 발언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이었는지가 입증되는 과정이었다. 오죽하면 판사가 판결문에 검찰의 주요 공소사실 다섯 가지 외 ‘정지민 진술의 신빙성’을 한 챕터로 하여 구체적으로 반박했겠는가.
아레사 빈슨의 사인과 관련한 핵심 기소 내용은 정씨가 줄기차게 주장해 온 “MRI 결과 CJD(sCJD)”였다는 것이다. 나와 어머니 사이의 정식 인터뷰 전문을 번역하지 않았던 정씨가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근거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한 장의 번역본이었다. 아레사 빈슨 장례식을 촬영한 테이프를 정씨가 번역한 이 번역본 속에 어머니가 “MRI 결과 CJD”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검찰은 이를 중요한 근거로 삼았고 법정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다. 우리는 법정에서 이 테이프 동영상 원본을 공개했다. 어머니는 “MRI 결과 a variant of CJD(vCJD)”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정씨 본인이 인간 광우병(a variant of CJD)을 CJD로 오역해 놓고 제작진이 사인을 왜곡했다고 보수 언론을 통해 주장해온 것이다.
검찰 기소의 두 번째 핵심은 제작진이 영어 자막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것. 이 역시 번역자 정씨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정씨는 자신이 감수할 때만 해도 번역이 똑바로 되어 있는 것을 감수 후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바꿨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감수 후에 자막을 바꿔치기 할 거면 뭐하러 시간과 돈을 들여 굳이 감수라는 과정을 밟나, 라는 상식적인 물음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씨와 검찰이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감수 전 자막의뢰서와 감수 후 자막의뢰서가 문서로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서에는 각각 최종 입력시각이 저장돼 있었다. 당황한 정씨는 법정에서 “감수과정에서 내가 지적했는데도 반영되지 않았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반영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 안 했나, 라는 질문에는 “근시라서 볼 수 없었다”, “보조 작가가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 일부러 보지 않았다”며 오락가락 진술을 거듭했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초벌번역본, 편집구성안, 1차 자막의뢰서(감수 전), 2차 자막의뢰서(감수 후), 방송 자막 등 문서들을 통해 번역 흐름을 살펴본 결과 번역 오류들은 모두 영어 감수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채 감수 전 자막 내용 그대로 방송에 보도되었고, 피고인들이 감수 후 번역을 변경하거나 수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적시했다.
제작진이 vCJD 외 다른 사인 가능성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누락했다는 것 역시 정씨 주장에서 비롯됐다. 정씨는 그간 “어머니가 위절제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아레사가 비타민 처방을 받았다는 내용이 수차례 언급됐다”고 주장했고, 이는 제작진의 의도적 왜곡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수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그러나 이 역시 100% 정씨의 거짓말이었음이 재판정에서 드러났고 정씨 본인도 이를 인정했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정지민이 번역한 로빈 빈슨의 인터뷰 테이프는 물론 번역하지 않은 인터뷰 테이프 어디에도 아레사 빈슨이 위 절제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거나 비타민 처방을 받았다는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고 적시했다. 수사하는 과정에서 번역 원본까지 입수한 검찰이 이 같은 사실을 몰랐을까?
정씨의 모든 주장을 대서특필하며
‘강화사료조치’ 모르는 협상대표·’사전예방의 원칙’ 모르는 주무부처 장관
우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민동석 전 협상대표와 정운천 전 장관이 증인으로 출석한 4차 공판은 속기록 자체가 역사에 길이 남겨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국민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쇠고기 협상을 맡겼고, 그들이 어떤 생각과 근거를 가지고 쇠고기 협상을 했으며, 왜 쇠고기 협상 결과가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 속기록이 낱낱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예기치 않게 새로운 사실 몇 가지도 알게 되었다. 민동석 전 협상대표와 정운천 전 장관 모두 “강화 사료조치”의 구체적 내용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강화사료조치는 30개월 월령제한 해제의 전제가 되는 조건이었으며, 민동석 대표는 강화된 사료조치가 미국의 선물이라고 칭송했던 장본인이 아니던가.
정운천 장관의 증인신문 땐 오히려 우리가 당황했을 정도였다. 첫 대목. “사전예방의 법칙에 대해서 아시죠?” “네? 사전… 뭐요?” 국민의 안전과 건강이 걸린 식료품 수입에 있어 최우선 조건으로 삼아야 할 “사전예방의 법칙”에 대해, 그는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쇠고기 협상 주무부처인 농림수산식품부의 장관으로서 2008년 4월의 협상 결과가 사전예방의 원칙에 충실하였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완전히 됐다고 생각한다”고 즉각적으로 답했다.
이 판결을 좌우 이념 대립, 법-검 간의 갈등으로 모는 자 누구인가
이번 법원 판결로 그동안
그러나 그들도 이미 무죄판결이 내려질 것을 예상했음이 분명하다. 판결 전날부터 미리 이번 판결이 ‘법-검’ 갈등의 절정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보도들을 깔아두지 않았던가. 그들이 판사 얼굴과 이력을 공개하며 마녀 사냥하듯 하고, 여당이 공공연히 판사 개개인의 성향 검증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사회 ‘최후의 보루’를 믿었듯, 우리는 여전히 언론 ‘최후의 양심’을 믿고 있다. 정치 검사라 불리우는 이들 뒤에 성실하고 묵묵히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1700여 명 검사들이 있듯, 판사의 정치 성향을 캐며 이념 판결로 몰아가는 기자들 뒤엔 판결의 구체적 내용에 관심을 갖고 속기록을 파고 드는 기자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반박하라, 그럴 수 없다면 부끄러워하라
방송 이후 1년여 간의 수사, 그리고 6개월간의 지난한 재판이 일단락됐다. 왜 이 재판을 해야 하나에 대한 물음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당연한 무죄를 입증 받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야 했다.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했고, 내가 만든 방송에 대한 확신은 더 강해졌다.
공판은 매번 짧게는 대여섯 시간, 최고 여덟 시간을 넘기기도 했다. 판결문 한 마디 한 마디를 듣는 동안, 산더미 같은 증거자료와 속기록을 파고드는 판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남들은 몰라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판사가 그 방대한 증거 자료들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넘기지 않았음을. 이 판결에 대한 정치적 파장을 모르지 않았을 재판장의 고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했다.
검사들에게 묻고 싶다. 이 판결문에 대해 하나하나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할 자신이 없다면 더 이상 국민의 세금으로 소모적인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국민들 앞에 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냐고. 우리가 같은 재판정에서 같은 재판을 치렀다면 말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