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War Resisters’ International)이 22일부터 인도 구자랏 아메다바드 지역에 있는 구자랏 비디야피트(Gujarat vidyapith) 대학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4년 주기로 열리는 회의의 이번 주제는 ‘비폭력적 생존투쟁과 세계적 군사주의: 연결 및 전략’로, 개발이란 명분으로 삶을 빼앗길 위협에 처한 사람들이 저항하며 벌이는 비폭력 투쟁과 군사주의와의 연관성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에서 이 행사에 참여한 평화운동단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여옥 씨가 현지에서 리포트를 보내 왔다.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 컨퍼런스가 진행되고 있는 구자랏 비디야피트 대학 강당. 단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쟁없는세상 |
한국? 아, 포스코!
인도, 파라과이, 네덜란드, 콜롬비아, 이스라엘 등 30개가 넘는 나라에서 온 150여명의 다양한 활동가들이 뒤섞인 자리. 이 속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어느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지를 각인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국 참가자들에게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겼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핵심적인 워크샵인 ‘광산업 – 공동체에 대한 위협, 전쟁을 위한 연료’에서는 한국의 한 기업이 빈번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풍부한 광물자원과 수자원을 가지고 있는 인도의 오릿사(Orissa)주에는 세계적 철강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그 중에 한국의 포스코가 최근 역대 인도 외국인 직접투자액 사상 가장 큰 규모인 연간 1200만 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과 제철소 운영에 필요한 관련시설 건설에 합의하는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포스코는 그 규모에 걸맞은 제철소를 짓기 위해서 대규모의 토지매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 토지에 살던 이들은 이주를 원치 않는다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인도에서도 우리는 또 다른 용산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포스코는 자가싱푸르(Jagatsinghpur) 지역의 토지를 구매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려고 하지만, 이주를 원치 않는 주민들은 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실제 인도 지역에서 개발과 이주의 문제는 매우 첨예한데, 또 다른 외국기업인 타타(Tata)사(社)가 공장 터로 선택한 칼링가나가르(Kalinganagar) 지역 역시 부족민들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워크샵 내내 사람들은 한국과 포스코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들을 살폈고, 정작 이 문제에 무지했던 우리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 오릿사 지역의 광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마렌드라 다스 ⓒ전쟁없는세상 |
왜 평화운동이 개발의 문제를?
용산 참사를, 그리고 한국 재개발 현장의 폭력성을 익히 알아온 우리 참가단이었지만 각국의 평화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발과 이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낯설었다.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 한정해 문제를 제기하고 운동을 벌여온 한국의 평화운동에게 이들이 가진 시야와 폭은 큰 자극와 함께 깊은 고민을 던져 주었다.
대부분의 광물 개발 산업은 군수산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알루미늄이나 철강 광산을 개발하고 있는 기업은 대부분 무기 생산 회사와 연결되어 있고, 투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명한 전쟁수혜자(War Profiteer,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기 때문에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분쟁을 조장하는 이들을 일컫는데, 무기를 만들어 파는 다국적기업들과 국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업인 베단타, 록히드마틴과 거래하는 타타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알루미늄은 폭탄의 외부로 사용되며 무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핵무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최근 인도의 지하자원을 위해 들어오는 외국 기업이 가진 무기산업과의 연계성이 바로 평화운동가들이 이 문제에 주목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토착민을 배제한 개발이 야기하는 토착공동체의 붕괴는 그 자체로 21세기의 제국주의 침략이라 할 수 있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인도나 아프리카는 그 자원으로 인해 분쟁에 휘말리고 있다.
자연을 신처럼 여기는 부족민들에게 강제이주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의 편에 선 정부는 원주민을 내쫓기 위해 그들에게 사회주의자(마오이스트)라는 딱지를 붙여 진압하고,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유혈사태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침략’의 주체 중 하나가 한국의 포스코였다. 인도의 활동가들에 의하면 포스코 역시 인도의 광산업에 욕심내는 다른 기업들과 마친가지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제철소가 들어서는 지역의 주민들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고 지역공동체 역시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낙후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개발은 필요한 것이며 이 모든 것은 결국 인도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 하에 정당화되고 있다. 특히 인도 정부가 인도의 원주민들이 아니라 초국적 기업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고 있다.
▲ 광산업 개발 문제에 대한 심화 워크샵 ⓒ전쟁없는세상 |
맥락없는 비폭력을 경계하며
워크샵에서 포스코가 준 낯뜨거움과 함께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강연은 첫날 오프닝 연설이었다. 아룬다티 로이와 아시스 난디의 연설은 앞으로 진행될 컨퍼런스에서 우리의 비폭력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인 활동과 만나야할 지점들을 던져주었다.
촛불집회 이후로 한국사회에서 비폭력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여전히 한국에서 ‘비폭력’은 폭력의 반대말이나 폭력은 나쁜 것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비폭력’이라는 말이 실제로 비폭력이 가진 다양하고 역동적인 저항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비폭력인지 구분하고 정의내리는 것보다 어떻게 비폭력 행동을 더 영향 있게 만들어갈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논의라고 생각하는 활동가의 입장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비폭력은 단순히 폭력을 쓰지 않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폭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폭력은 안 된다며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이 실제 활동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도 영향력도 미칠 수 없고, 오히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비폭력’이라는 말은 누구를 위한 언어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한 아룬다티 로이는 당장 살 곳에서 쫓겨나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단식투쟁을 말할 수 있는지를 되물었다.
비폭력은 투쟁의 맥락 내에서 이해되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아룬다티 로이의 이야기는 그녀가 인도에서 적극적으로 벌여온 활동들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는 간디의 비폭력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인도의 진보적인 사회철학자인 아시스 난디는 폭력과 비폭력 모두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하며 실제로 갈등이 만연한 상황에서 어떻게 비폭력의 영향력을 키워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25일까지 열리는 컨퍼런스 기간 동안 비폭력적인 생존투쟁을 위해 전세계에서 반군사주의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활동가들이 어떠한 합의를 만들어낼지는 두고봐야한다. 비폭력은 결론일 수 없기 때문이다.
▲ 기조연설을 하는 아룬다티 로이 ⓒ전쟁없는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