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피해자? 정지민씨, 당신은 가해자다 |
확인된 세 가지 사실로 그의 주장을 검증해보니 진중권 출처 : 오마이뉴스 10.01.29 12:12 ㅣ최종 업데이트 10.01.29 12:12 |
“나는 PD수첩의 내부 고발자가 아닌 피해자이다. 그들은 내가 제대로 감수까지 해 준 번역 내용을 자막을 이용해 변질시켰을 뿐 아니라 번역한 내용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왜곡했기 때문…”
얼마 전 낸 책에 정지민씨가 이렇게 쓴 모양이다. 이 말이 옳은지 차근차근 따져 보자.
확인된 세 가지 사실
확인된 ‘사실’은 이것이다. 즉 “정씨가
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두 쪽으로 갈린다. PD수첩 측은 “정씨가 감수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지민씨는 그것을 부인하며 두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
(1) 정지민씨가 감수 과정에서 오역을 걸러내지 않았을 가능성
(2) 보조 작가 이연희씨가 정지민씨의 지적을 무시했을 가능성
(3) PD수첩 제작진이 감수 이후 내용을 왜곡했을 가능성
이 중에서 일단 마지막 가능성, 즉 PD수첩 제작진이 감수 이후에 내용을 왜곡했을 가능성은 배제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대목에서 감수 전 자막의뢰서, 감수 후 자막의뢰서, 방송으로 나간 자막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감수 결과를 PD수첩 제작진이 사후에 왜곡하거나 변경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자막은 정지민의 감수를 거친 상태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그것은 이제 양 측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1) 정지민씨가 감수 과정에서 오역을 걸러내지 않았을 가능성
(2) 보조 작가 이연희씨가 정지민씨의 지적을 무시했을 가능성
누구 말이 옳을까? 정지민씨의 주장은, “몇몇 의도적인 오역 부분은 내가 지적했는데도 이연희 작가가 그것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이연희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수자가 지적을 했다면 고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 정씨가 지적하는 ‘오역’ 부분은 스스로 감수를 하면서 전혀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증언은 워낙 엇갈리는 바람에, 공판을 지켜본 기자에 따르면,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확실한 것은, 문제가 되는 대목에서 감수 전 자막의뢰서와 감수 후 자막의뢰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문제가 되는 오역들이 감수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 모두 인정하는 또 하나의 ‘사실’을 얻게 된다. 즉 정지민씨는 감수과정에서 자신이 지적했다고 주장하는 그 오역들이 고쳐졌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제까지 우리가 확보한 사실은 다음 세 가지다.
(1) 의도적 오역으로 지적받았던 부분들은 대부분 정지민씨가 직접 번역 혹은 감수한 부분들이다.
(2) 정지민씨의 주장과 달리 PD수첩 제작진은 감수 후에 내용을 왜곡한 적이 없다.
(3) 정지민씨는 자신의 감수가 스크립트에 제대로 반영됐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감수의 내용이 스크립트에 최종 반영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갈까?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번역가 최모씨는 이렇게 말한다. “감수를 할 때는 대체로 혼자 진행하지만, 보조 작가와 함께 일을 할 때는 내가 지적하는 대로 고쳤는지 반드시 확인한다.” “만약 지적대로 고쳤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막 감수를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즉, 다른 번역자들은 보조 작가와 함께 일할 때 자기가 지적하는 대로 고쳐졌는지 반드시 확인하는데, 정지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다른 작가들이 장당 만 원 받을 때, 정지민씨는 만 오천 원을 받았다고 한다).
한때 검찰과 언론을 춤추게 했던 ‘개그 콘서트’
감수과정에서 오역을 지적했다는 정지민씨는 왜 그것이 고쳐졌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지 않았을까? 정상적인 번역자라면 누구나 다 하는 과정을 왜 그는 생략했을까? 거기에는 눈물 없이는 들어줄 수 없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정지민씨는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1) “4시간 동안 감수를 했지만 이연희 작가가 노트북 모니터를 몸으로 가리거나 보여주려 하지 않아 실제로 내가 지적한 내용이 고쳐졌는지 알 수 없었다.”
(2) “나는 지독한 근시라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볼 수 없었고 눈이 아프기 때문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3) “당시 이 작가에게 짜증이 난 상태라 멀리 떨어져 앉았다.”
이연희 작가는 이마저도 부인한다. “당시 ‘감수’를 진행했던 편집실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야 할 정도로 공간이 좁았고 노트북은 두 사람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엇갈린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누구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개그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게다.
아무튼 정지민씨가 대는 세 가지 이유는 서로 충돌한다. 특히 (1)과 (2) 혹은 (3)은 서로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1)은 보조 작가가 일부러 안 보여줘서 ‘못 봤다’는 얘기고, (2)와 (3)은 “지독한 근시”라는 신체적 결함, 혹은 “작가에게 짜증”이라는 심리적 상태 때문에 자기 스스로 ‘안 봤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즉 지독한 근시라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것도 짜증이 나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면, 보조 작가가 굳이 노트북 모니터를 몸으로 가릴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아무튼 정지민씨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오역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조 작가가 온몸으로 모니터를 가려가면서 반영을 거부했다고 한다. 근데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 되는 상황인가? 보조 작가는 그 자리에 감수를 받으러 나왔다. 그런 사람이 감수자가 오역을 지적하는데도 애써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뭔가? 감수한 것이 반영이 안 되어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곧바로 보조 작가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가? 게다가 보조 작가가 어떻게 독단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정지민씨는 제작진이 보조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감수를 무시하도록 미리 사주했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어디 상식적으로 가능한 상황인가? 그렇게 할 것이라면, 제작진에서는 뭐 하러 번역자에게 인건비까지 줘가면서 굳이 감수를 받으려 하는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정지민씨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려면, 이렇게 초현실주의적으로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전제해야 한다. 지금 무슨 부조리극 하자는 건가? 허무하지만 이게 한때 검찰과 언론을 춤추게 했던 그 사람의 수준이다.
법원에서는 정지민씨의 진술을 도대체 신뢰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똑같은 이유에서 나 역시 이연희 작가와 정지민씨 중에서 거짓말하는 것은 정지민씨라고 믿는다. 정지민씨가 옳다고 가정하려면, 너무나 많은 부조리한 전제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지민씨, 당신이 피해자라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다시 정지민씨가 자신의 책에서 했다는 그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PD수첩의 내부 고발자가 아닌 피해자이다. 그들은 내가 제대로 감수까지 해 준 번역 내용을 자막을 이용해 변질시켰을 뿐 아니라…”
이제까지 확인된 세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이 주장이 허위라고 단정할 수 있다. 즉 정지민씨는 “제대로 감수”를 해준 적이 없으며, PD수첩은 “번역내용을 자막을 이용해 변질”시킨 적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지민씨는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부실한 번역과 감수로 피디수첩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덕분에 PD수첩은 정지민씨를 대신해 사과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정지민씨는 충분히 회개하고 반성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는 이것으로도 모자랐던지 자신의 부실 번역과 감수 책임까지 몽땅 PD수첩에 떠넘긴 채 가공할 거짓증언으로 애먼 사람들이 체포당하고, 심문당하고, 기소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피해자가 아니다. 남들에게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피해를 입힌 가해자다. 그런데 이 공격성, 이 잔인함, 그리고 그 집요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