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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쯤 후배 기자 몇몇과 독서 모임을 만든 적이 있었다. 현장만 쫓아다니다 보니 머리속이 심각하게 텅텅 비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 같이 읽고 토론했던 첫 번째 책이 바로 고려대 사범대 지리학과 최영준 교수가 쓴 <국토와 민족 생활사>(한길사, 1997)였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삶이 국토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충실하게 기록한 책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강화도 간척사에 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강화도 땅의 3분의 1 가량이 간척에 의해 불어났다는 사실을 <국토와 민족 생활사>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강화도는 본래 해안선의 들고 남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리아스식 지형이었지만 고려말부터 800년간에 걸친 간척 사업을 통해 지금과 같은 원만한 굴곡을 갖게 됐다. 몽고의 침입 때부터 왕실의 피난처가 돼온 강화의 병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육지로 깊이 들어온 좁은 만들을 막아 논을 만들어온 결과이다.
강화도 갯벌은 우리나라 천연 습지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세계에서 다섯 번 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갯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해안선의 원형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간척 사업이 있었는데도 어째서 강화도는 이다지도 너른 갯벌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걸까. 어째서 시화호나 새만금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한강과 예성강이 풍부한 퇴적물을 끊임없이 보충해준다는 특별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자연에게 상처를 회복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고려나 조선의 왕실이 직접 나서 대규모 간척 사업을 벌인 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기술의 한계로 말미암아 더디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다. 제방을 다 막았더라도 염분을 웬만큼 씻어내고 작물을 심기까지는 10년이나 또 기다려야 하는 굼벵이 공사였다.
강화도는 인간과 자연이 화합한 좋은 본보기 조정이 나선 작업이 그 정도니 민이 벌인 공사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사람들은 간척하려고 점찍은 저습지 앞바다에 우선 5미터 길이의 말뚝을 1미터 깊이로 죽 박아 나갔다. 그러고는 칡넝쿨과 싸리 등을 산에서 베어와 말뚝 사이를 촘촘히 막기 시작한다. 이런 차단막 공사가 끝나면 말뚝 양쪽으로 흙과 돌을 부어 채워나갔다. 밀물과 썰물에게 작업량의 절반 이상을 항상 뺏기는 매우 비효율적인 작업이었다. 강화도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몇 년이든 공사를 계속했다. 제방이 모습을 얼추 갖추어갈 무렵부터는 제방 바깥쪽에 새로운 갯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강화 간척 사업의 상당 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려 800년간.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강화가 부쩍 좋아졌다. 시간이 나면 강화에 가서 걸으면서 인간과 자연이 화합한 흔적을 더듬는 것이 낙이 되었다. 대명포구에서 버스를 내려 초지대교를 걸어 건너가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갯벌 사이로 난 가느다란 물길에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언제나 평화로워진다. 스피드와 규모야말로 인간이 배출하는 어떤 화학 물질보다도 더한 독극물인지 모른다.
인류의 종교, 예술, 문화를 자극한 오렌지 국제적으로 저명한 화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랑스의 피에르 라즐로가 쓴 <감귤 이야기>(시공사, 2010)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감귤과 인간이 사랑을 나눈 역사를 기록했다. 중국과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감귤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을 통해 그리스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문명의 성쇠를 따라 전 세계 곳곳으로 확산돼나간 감귤은 종교, 예술, 문화 전반을 자극했다. 꽃이 내뿜는 천상의 향기와, 과육의 달콤한 맛과 향 때문에 감귤류는 상당히 오랜 동안 유럽에서 아주 비싼 사치품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처녀 아탈란테는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결혼하라는 주변의 압박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과 달리기를 해서 이기는 사람과 하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이기면 도전자는 죽게 될 터였는데, 한 명의 달리기 선수가 도전을 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도움을 청한 그는 황금 사과 세 개를 받았다. 아탈란테에게 따라잡힐 만하면 황금 사과를 던져 그녀가 줍는 동안에 시간을 벌어 그는 경주에서 이길 수 있었다. 신화에 나오는 황금 사과가 바로 감귤, 오렌지이다.
이 황금 사과가 가진 신비로운 특성은 유전적 적응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다. 교배가 쉬운 이 감귤 나무는 2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세계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 기후와 풍토에 맞는 수 천의 변종을 만들어냈다. 루비 그레이프 프루트, 네이블 오렌지, 세비야 샤워 오렌지, 스위트라임, 카라임, 샤워라임, 금귤, 레몬, 클레멘타인, 베르가모트, 블러드 오렌지, 한라봉에 이르기까지. 식물학자들이 채 정리를 다 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맛과 빛깔과 향기와 크기의 감귤이 생겨났고, 지금도 생겨나는 중이다. 인간과 자연이 오랜 세월 협력해 피워낸 종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이 황금사과의 다양성은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노예 무역의 발달과 더불어 미국과 브라질에 생겨난 대규모 플란테이션 농장 탓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브라질에서 생산된 향과 맛이 떨어지는 대량 생산된 오렌지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다양한 토착 오렌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전 세계 월마트 매장에 나 앉은 오렌지는 값은 싸졌지만 황금 사과로서의 품위를 잃었다. 현대의 대량 소비 사회는 과거의 소중한 것들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감귤 이야기>에 따르면 코카콜라나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 기업이 건강에 썩 좋지 않은 중독성 식품을 전 세계에 초스피드로 제공하는 이 시대에, 다양한 감귤류 과일은 그저 그런 흔한 것이 될 위기에 처했다. 저자 피에르 라즐로는 이 감귤들을 생산 지역의 일상적인 가정으로 되돌려주고,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자제하는 것이 양심적인 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는 우리 스스로 에덴 동산에나 있을 법한 감귤을 많이 만들어놓고서도 획일화라는 지옥으로 달려가려고 한다며 의아해 한다.
가스 버너를 틀어놓은 방 안에 앉아 있는 꼴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앤드류 니키포록은 피에르 라즐로보다 훨씬 격한 어조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비난한다. 그는 <대혼란- 유전자 스와핑과 바이러스 섹스(Pandemonium)>(알마, 2010)에서 동식물뿐만 아니라 진드기, 박테리아, 바이러스까지 순식간에 공간이동을 시키는 세계화에 의해 인류는 가스 버너를 틀어놓은 방 안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한다.
요즘 한국과 일본에서는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방역 요원들이 구제역을 막는다고 불쌍한 소와 돼지들을 도살하고 있는데 니키 포록에 따르면 이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광기나 다름없다. 조류 독감이나 다른 여러 가축 전염병과 달리 중동이나 인도가 진원지일 것으로 추정되는 구제역 바이러스는 인간의 건강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구제역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고기와 우유 생산량이 15~20% 정도 줄어들 가능성은 있다. 이 점이 바로 세계 육류업계가 구제역이 발생한 나라에 무자비한 도살을 요구하는 빌미가 된다.
2001년 구제역이 발생하자 영국 정부는 백신을 놓으면 된다는 학계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려 1천만 마리의 가축을 산 채로 묻거나 태워 죽였다. 올림픽 수영장 200개 규모의 구덩이를 파고 43만 마리의 양을 한꺼번에 묻었다. 도살당한 가축의 10%만이 구제역에 감염됐었는데도. 그것은 구제역 청정국이라는 영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다. 광풍이 휩쓴 뒤 영국에선 농민 60명이 자살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미국, 타이완, 일본, 한국 등이 무조건 ‘살처분’ 대열에 뛰어들었다. 니키 포록은 “국제 무역의 관행이라는 무시무시한 법칙이 생물학적 테러를 낳았다”며 경제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세상이 됐다고 개탄한다.
구제역과는 달리 조류독감에는 아무리 공포감을 느끼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까지 2억 마리 이상의 새를 땅에 묻은 이 엄청난 닭 유행병은 다름 아닌 세계화의 산물이다. <대혼란>에 따르면 싸구려 고기를 탐닉하는 걸신들린 인간의 식욕이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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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주로 야생 조류에 서식하는 바이러스 H5N1은 우연한 기회에 대형 양계장에 들어왔다가 이곳 환경이 번식을 하고 변종을 만들어내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란 걸 발견한다. | 조류독감 바이러스, 열 세 번의 종을 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인은 가금 몇 마리를 뒷마당에 풀어놓고 벗 삼아 기르던 과거 수백년간의 양계방식을 버리고 첨단 방식으로 갈아탔다. 한때 당당하고 품위 있는 새였던 닭은 A4 용지보다 좁은 공간에 갇혀 물과 사료를 먹으며 도살업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스트레스에 찌든 면역력이 소진된 닭들은 할리우드가 만든 인기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다음으로 약물을 많이 복용하는 몸이 됐다. 주로 야생 조류에 서식하는 바이러스 H5N1은 우연한 기회에 대형 양계장에 들어왔다가 이곳 환경이 번식을 하고 변종을 만들어내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란 걸 발견한다. 그 때부터 전 세계인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단백질원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경제가 급성장한 아시아 대륙에서 사육되는 조류는 지난 10년 사이에 40억 마리에서 160억 마리로 급증했다.
조류 독감 바이러스는 전 세계 곳곳에서 말썽을 피우다가 1997년 홍콩에서 18명의 인간에게 독감을 옮기는 대형 사고를 쳤다. 그동안 학계가 이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절대 전염되지 않는다고 장담해왔기 때문에 그것은 시계 종이 13번 울린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자국의 가금류가 아시아에서 온 바이러스에 노출됐다는 걸 알게 된 네덜란드는 군대까지 소집해 3천만 마리의 닭을 죽여 없앴다. 경찰이 애완동물 애호가의 집에 들이닥쳐 욕실에 숨겨놨던 애완용 새를 잡아가는 일까지 일어났다. 방역이 허술한 중국과 타이완에서 H5N1은 마음껏 변종을 만들었다. 바이러스는 고양이와 호랑이까지 감영시키면서 포유류에 대해 빠르게 적응하는 중이다.
애꿎은 야생 조류를 도륙하는 각국 정부 희생양이 필요했던 각국 정부는 야생조류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태국에선 열린부리황새가 무참하게 도륙당했다. 홍콩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새들이 앉을 만한 나무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서는 까마귀만 보면 쏘아 죽였다. 우리나라에선 한강에 풀어놓았던 거위가 희생당했다. 한강에 방생했던 거위가 늘어나 한때 수백마리에 달했으나 방역당국이 모두 한자리에 모아 살처분을 해버렸다. 지금은 용케 학살을 피한 십여마리만이 한강을 오가며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한강을 떠도는 것은 대단히 운이 좋은 놈들이다.
전문가들은 조류 독감에 대해 아직 너무나 모르는 게 많다고 털어놓는다. 인간이 대량으로 도살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새에 조류와 포유류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자연 멸종시계보다 1000배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중이다. <대혼란>에 따르면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이제 치명적인 전염병의 자리에 등극하기 위한 한 단계만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인간 대 인간 전염의 기교이다. 이 기교까지 터득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시한폭탄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생물학적 침입자라는 무시무시한 시한폭탄 지금 전 세계에선 생물학적 침입자라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터지고 있는 중이다. 자연이 만든 이 폭탄에 비하면 인간이 만든 것은 초라해 보인다. 선박 평형수(대형 화물선은 짐을 싣기 전에는 항해하다 뒤집어지지 않도록 배 밑창에 가득 바닷물을 실었다가 짐을 실을 때 항구에 부려놓는다)가 전 세계의 바다 생물을 마구 뒤섞어 생태적 충격을 가한다. 미국과 캐나다 접경의 오대호는 흑해 출신의 얼룩 홍합이 뒤덮어 버렸다. 세계 최대 담수호인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에선 우리의 우울한 미래를 확인할 수 있다. 세계 100대 최악의 침입종 어류로 분류되는 외래종 나일 퍼치가 거의 모든 물고기 종류를 먹어 치우는 바람에 조용한 호수로 변했다. 다양한 풀과 나무가 자라던 숲에서는 얌전하기만 했던 진드기와 박테리아가 단일종을 심은 기업형 농지만 발견하면 악랄한 약탈자로 변신하고 만다. 대기업농에서 내성과 번식력을 크게 키운 진드기류에 의해 세계의 밀과 감자, 옥수수는 치명적인 위협 아래 놓였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 대중 앞에서 쇠고기 구워먹기 이 모든 원인은 너무나 자명한데도 해법은 동물의 대량 살육과 같이 어처구니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해법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농민이나 원주민, 혹은 납세자가 아니라 세계화로 극단의 부를 움켜쥔 국제 무역업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치인들은?
앤드류 니키포록에 따르면 저명한 바이러스 학자 프레드 브라운은 2004년 타계 직전, 영국에서 자행된 구제역 대학살극을 바라보면서 보기 드물게 솔직하게 말했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과학자들은 점점 더 범위가 좁은 문제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본래 쥐뿔도 모르던 정치가들은 그나마 아는 것마저도 날이 갈수록 까먹는다.”
정치인들의 특기는 허풍을 떨며 대중 앞에서 쇠고기나 닭고기를 구워먹는 것뿐이다. 태국의 탁신 전대통령(3년 전 권좌에서 밀려나 영국으로 도망친 이 사람 지지자들이 시위를 하는 통에 태국은 요즘 바람 잘날 없다)은 조류독감 파동이 났을 때 닭고기를, 캐나다의 장크레티앵 전 총리와 미국의 마이크 조한스 미 농무부 장관은 광우병 파동 때 대중 앞에서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영국의 농산부 장관인 존 검머는 특이하게도 자기 딸을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햄버거를 먹이려고 했다. 그런데 마지못해 끌려나왔던 그의 딸이 실험실의 모르모트가 되고 싶지 않다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망신을 샀다. 이런 소동들은 많이 익숙한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