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BP 때리기가 보여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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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경 없는 자본’들이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논의들이 무성했다. 또한, 그 때문에 각국 정부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본의 편의를 봐주려고 한다는 얘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BP의 최고경영자인 토니 해이워드에게는 아마도 이런 말이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3월 말에 BP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중 18위 기업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정계는 BP에게 멕시코 만 기름 유출 사고의 책임을 가차없이 추궁할 기세다.
사실, 해이워드가 지난주 목요일[6월 17일]에 미 하원 에너지통상위원회에 출석해서 당했던 공개적 수모는 미국에서 역사가 오래된 하나의 정치 의례다.
예컨대 1933년 5월에는 JP 모건 금융제국의 후계자 잭 모건이 청문회에 불려 나와 1929년의 증시 대폭락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했다. 상원 금융위원회 고문이었던 페르디난드 페코라가 총지휘한 이 청문회의 결과물이 바로 JP 모건을 분할시키고 은행 규제를 강화한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이다. 미국 은행들이 이 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까지 50년이 넘게 걸렸다.
마찬가지로 2008년의 금융 붕괴도 미 의회에서 한바탕 청문회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청문회에 불려간 금융계 인사들(특히 리먼 브라더스 CEO였던 딕 펄드)은 해이워드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거칠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1930년대에 금융권에 가해진 것과 비견할 만한 수준의 후속 조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반면 BP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후속조치들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 토요일[6월 19일]에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두 달 전이었다면 BP의 파산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여전히 가능성이 매우 낮기는 해도 상상은 가능하다.”
물론 BP는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 지난 토요일 <가디언> 칼럼에서 나오미 클라인이 훌륭하게 묘사했듯이, 멕시코 만 기름 유출 참사는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광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다.
그러나 클라인은 자본주의 논리 일반을 묘사했을 뿐, BP를 둘러싼 상황 전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해이워드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의원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의 철석 같은 옹호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또한 이번 참사의 원인이었던 해저 유전 탐사를 지지한다.
선거
클라인은 또 오바마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타이밍 한 번 끝내주게도, 대통령은 딥워터 호라이즌이 폭발하기 3주 전에 그동안 유전 개발이 금지돼 있었던 해역에서의 유전 탐사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점은 오바마와 민주당 의원들이 어째서 BP 때리기에 그토록 열을 올리고 있는지를 일정 부분 설명해 준다. 11월의 중간선거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이번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선거 논리 때문만은 아니다. 단언컨대, 미국에서 BP가 동네북이 된 것은 무엇보다 BP가 외국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민족주의나 반(反)영국 정서 따위가 주되게 작용했다는 말은 아니다.
BP는 <파이낸셜 타임스> 선정 5백대 기업 중 영국 기업으로는 1위다. 그런데 BP보다 랭킹이 높은 17개 기업 중 10개는 (‘미국의 몰락’ 어쩌고 해도) 미국 기업이다.
비록 BP의 주주들 가운데 40퍼센트가 미국인이라 해도 BP는 미국 경제보다 영국 경제에 훨씬 더 중요한 기업이다. 미국 정치인들은 여전히 외국 기업보다 미국 기업들과 훨씬 연줄이 많다. 금융위기를 불러온 월가의 은행들이 여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도 그들의 엄청난 대정부 로비 능력(즉 연줄)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유독 외국 기업들을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위치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 정부도 GM이 유럽 자회사를 매각하려 했을 때(비록 이후에 GM이 매각 계획을 철회했지만) GM 측에 약속했던 보조금을 지급하길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멕시코 만 기름 유출 사태가 보여준 것은 단지 자본의 파괴적 논리만이 아니다. 이번 사태는 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이 보여 준 것과 똑같은 진실을 반대의 사례로 보여준다. 국민국가들이 자국 기업들과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외국 기업의 경우 그러한 관계의 부재)가 바로 그것이다.
‘국경 없는 자본’은 결국 신화일 뿐이다.
번역: 천경록
출처: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