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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 그러니까 지난해 연말 일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유종일 교수(한국개발연구원)는 한 모임에서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론 커크 대표의 고위보좌관으로 일하던 피터 카우위를 만났다. 무역대표부는 미국의 통상 문제를 관장하는 곳으로, 한·미 FTA 협상과 관련해서는 한국 측의 협상 파트너다. 그즈음 국내에서는 한·미 정상회담(11월19일)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자동차가 문제 된다면 다시 이야기할 자세가 돼 있다”라고 말해 한·미 FTA 재협상 논란이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유 교수는 그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를 적극 원한다. 둘째, 오바마 대통령은 전미자동차노조(UAW) 노동자들에게 정치적·정서적으로 빚이 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라도 자동차 분야에 대한 한국의 추가 양보를 필요로 한다. 이건 추가 협상이 아닌 ‘부속협정서(side agreement)’로 진행할 예정이다. 셋째, 정치적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적기를 기다려 속전속결로 추진할 예정이다. 넷째, (유 교수의 ‘만약 한국 측에서도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분야의 부속협정을 제안한다면 자동차 문제와 병행 협상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한·미 FTA 미국 의회 비준을 원한다면 딴 소리는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
ⓒ뉴시스 현대차의 미국 조지아 공장. 한·미 FTA 협상에 따르면 관세 혜택은 수출 차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미국 현지 생산량이 절반인 현대차와는 무관하다. |
이는 구문(舊聞)이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6월28일 오바마 대통령은 ‘11월까지 쟁점 해결, 내년 초 의회 비준안 제출’이라는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하면서 무역대표부에 한국과 ‘조정’을 위한 ‘새로운 논의’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정치적 적기’이기도 했다 .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냈지만 한·미 FTA를 강하게 비판해온 정태인 교수(성공회대)는 “천안함 사태로 인해 안보 위험이 높아졌고 우리 측의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연기 요청에 미국이 동의해주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뭔가 미국에 ‘선물’을 줘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덕수 주미 대사는 지난 6월 초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미 FTA 포럼에 참석해 ‘천안함 사태로 한·미 양국 간 동맹의 필요성이 커졌고 한·미 FTA는 동맹 강화의 중요한 근간이며 이를 통해 북한에 분명한 동맹국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시작통권과 한·미 FTA ‘거래설’이 떠도는 배경이다. 하지만 정부 측에서는 무관하다고 펄쩍 뛴다.
“일절 딴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카우위의 ‘충고’도 들어맞았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의 협상 재개 선언과 관련해 “우리가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 협상이 굉장히 어렵게 된다.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해 한국 측의 역제안 가능성을 일축했다.
미국에서 제시한 쟁점은 두 가지다. 자동차와 쇠고기. 이미 합의된 FTA 협정문에 따르면, 자동차 분야의 핵심 사항은 미국이 한국의 대미 수출 차량의 약 70%를 차지하는 3000cc 이하 중소형차에 대해 2.5% 관세를 즉시 철폐하는 대신, 한국은 미국산 자동차 관세(8%)와 부품 관세를 즉시 철폐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 협상에서 가장 잘한 분야로 자동차를 꼽아왔지만, 이해영 교수(한신대)는 “효과가 과장되어 있다”라고 반박했다. 특히 현지 생산 자동차는 관세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대미 완성차 수출 물량의 80%를 담당하는 현대·기아차의 경우 미국 현지에서 생산되는 차량이 각각 50%, 30%를 차지한다. 또한 앞으로 현지 생산량은 늘려갈 계획이다. 미국 정부 역시 이 점을 들어 “한국 자동차의 미국 현지 생산비율은 3년 뒤면 67%에 이른다”라며 자국 의회를 설득해왔다. 사실 2.5% 관세는 환율의 등락에 따라 언제고 상쇄되는 미미한 수준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미국 측은 “한국은 연간 70만 대를 미국에 팔면서 미국차는 단지 7000대를 수입한다”라며 ‘무역 역조’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국에서 생산되는 GM대우는 지배기업이 GM인 미국차인 데다, 미국에서 75% 이상 부품을 조달해 생산되는 일본차는 한·미 FTA 기준에 따라 미국산으로 인정돼 관세 혜택을 받기 때문에, 이들을 포함하면 국내 시장에서 미국산 자동차가 차지하는 점유율은 훨씬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구는 강력하다. 정태인 교수는 미국이 요구해올 협상안에 대해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이 모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있던 일본에 대해 미국은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의 점유율을 20%까지 보장할 것과 일본 반도체의 미국 수출에 대해서도 가격 인상 따위 방식으로 ‘자율 규제’할 것을 요구했다.
쇠고기 분야도 안심할 수 없어
쇠고기 분야도 안심할 수 없다. 지난 5월 미국 상원은 만장일치로 한국에 대해 모든 연령대의 쇠고기를 전면 수입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쇠고기 검역 문제는 한·미 FTA 사항이 아니라면서도 대응 방안을 고민 중이다. 한국은 당초 ‘완전 개방’에 합의했다가 ‘광우병 촛불시위’로 추가 협상을 진행해 현재는 30개월령 미만 쇠고기만 수입하지만 ‘한국 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그것도 민간 자율로 통제되고 있어 언제고 무너질 마지노선이었다. 특히 미국 측은 최근 미국산 쇠고기의 국내 수입량이 늘고 있다는 점을 한국민의 신뢰가 회복되는 근거로 활용할 태세다.
ⓒ뉴시스 미국육류수출협회는 한국 국민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위는 지난해 5월 열린 시식행사. |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다른 수입 쇠고기에 비해 미국산이 문제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쇠고기 불합격 실적 자료’에 따르면,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이후 올 5월까지 검역 과정에서 불합격 처리된 수입 쇠고기 물량의 70%가 미국산이었고, 변질로 불합격된 물량은 전체의 97%나 됐다. 수입량이 상대적으로 늘었다고는 하나,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생해 수입이 금지되기 전과 비교하면 절반에 이르는 수준인 데다 그마저도 소비자가 직접 구매하는 방식이 아니라 급식·예식장 뷔페 등 ‘비자발적 선택’이 주를 이룬다.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박상표 정책국장은 “유럽에서는 GMO(유전자 변형식물) 위험성에 대해 수출국이나 생산자에게 입증 책임을 묻는다. 미국산 쇠고기 역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미국이 먼저 입증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새로운 논의’라는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한·미 FTA 재협상을 둘러싼 양국 간 이익 갈등은 첨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