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100년, 다시 돌아본 ‘사카린 밀수사건’
출처 : 민중의소리 기사입력 : 2010-02-13 16:11:27 최종업데이트 : 2010-02-13 16: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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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 장은 29살인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를 열었다. 이후 1948년 대구를 떠나 삼성상회를 삼성물산공사(현 삼성물산)로 바꾸고 본격적인 무역업을 시작해, 불과 1년여 만에 무역업계 1위로 키웠다. 한국전쟁으로 사업기반을 잃었지만, 1951년 대구에 두고온 양조장 사업 수익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50~60년대에는 제일제당(1953년)과 제일모직(1954년)을 잇따라 설립하며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57~59년 사이에는 안국화재(현 삼성화재)와 한일·상업·조흥은행 등을 잇따라 인수해 금융업에 손을 댔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 출범은 이 전 회장에게 또다른 기회였다.
1961년 5월 16일, 당시 국내 최고 부자였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일본 동경 제국호텔에서 한국에 쿠데타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된 이 회장의 귀국을 종용했다. 국내에 들어오면 곧바로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다른 기업주 11명은 이미 구속돼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옥중에서 ‘부정축재자 1호는 동경에 있는데 우리들 조무래기만 체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귀국한 다음날인 6월 27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난 이 회장은 “기업인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 정식적인 세율로 세금을 납부하면 기업들은 모두 도산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처벌되면 어느 누구도 기업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자유경제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말했다.
‘부정축재자 척결’을 공약으로 내걸긴 했지만 당장 경제 문제도 신경써야 했던 군부쿠데타 세력에게는 일리 있는 말로 들렸을까. 다음날 권력은 구속됐던 ‘부정축재’ 기업주들을 모두 석방했다. 또 삼성은 ‘부정축재처리법’에 따라 전체 ‘부정축재’ 기업주들에 대한 추징금 378억 8백만환 중 27%인 103억 4백만환을 내도록 돼 있었지만, 권력은 법을 고쳐 이 회장의 제안대로 공장을 지어 주식을 헌납하도록 했다.
‘부정축재자 1호’는 감옥행을 면했고, 박정희와 이병철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이 사건은 66년 9월에 터진 삼성 소유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원료 밀수사건에 비하면 구멍가게 좀도둑 수준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정부보증 민간차관으로 비료공장 기계를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수입하면서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당시 돈으로 2천억원)를 받았다. 이 자금으로 43kg짜리 포대 2300부대를 밀수한 삼성은 이를 국내에 팔아 정치자금과 공장건설 자금을 마련할 심산이었다. 당시 밀수는 4배가 남는 장사였다.
여당 국회의원의 언론제보로 삼성이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게 사실이 폭로됐다. 이를 두고 ‘밀수 자체가 박정희 정권과 삼성의 밀약이었는데 정권이 뒤통수를 쳤다’는 주장(장남 이맹희)에서부터 “이병철의 삼성 재벌의 계획적인 밀수”(김형욱)라는 비난, “현장담당 사원의 부주의로 발생”(이병철)한 것이라는 해명까지 나왔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대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권위주의 시대 권력과 재벌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까, “파란많던 생애에서도 더할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을 했다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밀수범’은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후 이 전 회장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언론사 소유 지분도 내다판다고 약속했으나, 70년대 후반 경영에 복귀했고 <중앙일보>를 창간 했으며 1983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조태근 기자 taegun@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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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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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폭리 사건
원래 특혜엔 부정부패가 들끊기 마련이다. 64년 1월 15일 야당 원내교섭단체인 삼민회(민주당, 국민의 당, 자민당 등이 어울려 구성한 국회교섭단체)소속의 국회의원 유창열이 이른바 ’3분 폭리 사건’을 폭로하였다. 이는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 이른바 3분 산업과 관련된 기업들이 매점매석으로 가격을 조작하고 세금 포탈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을 묵인해주는 댓가로 공화당이 거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받았다는 내용이었다.”1)
이 사건엔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삼성에 집중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다른 신문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 >경향신문> 64년 2웛 1일자가 특정 보도하였는데, 1면 머리기사 제목은 <폭리의혹 점차 확대/특위구성 반대 위해 일부 위원 매수설 떠돌아>였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 50년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야당 의원들의 폭로내용이 하도 어마어마해 활자화를 망설이는 사내 간부가 있었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이 사명이라며 데스크(정치부장)인 김경래가 단안을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신문이 나가자 정가와 재계가 발칵 뒤집혔다. 한 부 5원의 신문이 불티나게 팔렸으며, 문제의 삼성재벌은 이 날자 본지를 수십만 부 사들이는 바람에 <경향신문>가판은 창간 이래 최대 부수가 팔렸다는 후문이다.”2)
<경향신문>은 이어 <삼분 폭리 규명될 것인가/대표적인 매판성 소비품 장사 민족자본 조성에 역행/K의원 모 재벌 돈 보따리 풀어 앞잡이>라는 제목이 붙은 특집을 내보냈다. 삼성은 며칠 후 <경향신문>을 명예훼손과 신용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였다. 1주일 뒤 <경향신문>은 이병철을 포함한 삼성간부 12명을 맞고소하였다. 이 고소 사건은 70년 초에 가서야 삼성이 소를 취하하면서 마무리되었다.3)
밀가루 대통령의 탄생
’3분 폭리’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훗날 박정권이 이 사건의 반대급부로 3천 800만 달러를 받았다는 폭로도 나왔다.4) 그런 이유와 더불어 군사정권도 ‘밀가루 비리’의 주범이었기 때문에 진상을 밝히긴 어려웠을 것이다.
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는 장기영으로 하여금 일본 미쯔이물산을 통해 소맥 10만톤, 640만 달러 분을 연불 조건으로 극비리에 수입케 하였다. 호주산까지 합쳐 21만 5천 톤이 들어왔다. 소맥 수입으로 곡가는 안정되었지고 판매 대금은 선거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장기영이 이 교섭을 성사시킨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경제부총리를 맡게 된다.5)(본인추가 장기영은 한국일보 사장출신이다. 그 결과 한국일보는 판매고에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였다.)
장기영은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나와 그해 한국은행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사해 1952년 한은 부총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청 장년의 세월을 은행가로 보낸 인물이었다. 장기영을 경제부총리로 천거한 사람은 김종필이었는데, 김종필은 장기영의 추진력과 더불어 정치자금 조성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때 들어온 밀가루는 전량 판매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업자들에게 흘러 들어가 나중에 ’3분 폭리’ 중 밀가루 부문 사건을 일으키는 데에 기여하였고, 또 일부는 수재민 구호라는 이름으로 유권자에게 공짜로 제공되었다. 그래서 대선 기간 중 때 아닌 ‘밀가루 잔치판’이 벌어졌고, 박정희는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6)
김일영은 63년 10/15일 대선 결과 분석에 있어서, “캐나다와 호주에서 들여온 21만 5천여 톤의 밀가루가 선거 직전 주로 태풍 ‘셜리’의 피해를 입은 남부지방에 집중적으로 살포되었다는 점도 이 지역 표의 동향과 관련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7)(본인추가 태풍 셜리는 10963년 6월 18-22일에 있었습니다. 밀가루가 풀린 시기는 선거 직전 또는 선거 기간입니다. 63년 대선은 10월 15일에 치루어졌습니다.)
출처
1)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건국에서 제3공화국까지>(들녁 1998, 386쪽)
2)허용범 <한국언론 100대 특종>(나남 2000, 94~95쪽에서 재인용)
3)허용범 <한국언론 100대 특종>(나남 2000, 94~95쪽)
4)김일영 <1960년대의 정치지형 변화: 수출지향형 지배연합과 발전국가의 형성> ; 한국 정신문화연구소 편 >1960년대의 정치사회변동>(백당서당 1999, 308쪽)
5)김일영 <1960년대의 정치지형 변화: 수출지향형 지배연합과 발전국가의 형성> ; 한국 정신문화연구소 편 >1960년대의 정치사회변동>(백당서당 1999, 309쪽) ; 김흥기 편 <영욕의 한국경제:비사와 경제기획원 33년>(매일경제신문사 1999, 127쪽) ; 김영호 <한국언론의 사회사 상>(지식산업사 2004, 384쪽)
6)김일영 위의 책 309쪽 ; 김경재 <혁명과 우상:김형욱 회고록 2>(전예원 1991, 59쪽)
7)김일영 위의 책 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