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기업감시] 삼성그룹 대국민 죄악 “사카린 밀수사건”















삼성그룹 대국민 죄악 “사카린 밀수사건”
http://blog.naver.com/ingebbang/60009085290

중앙정보부 전 감찰실장 방준모 증언 ”충격 실상”

현재 삼성그룹은 한국의 최대 재벌이다. 최근 드라마 “영웅시대” (MBC)가 재벌들의 성장 이면사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인기를 얻고 있다. 삼성그룹의 성장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사건을 들라면 단연 사카린 밀수 사건을 들 수밖에 없다. 암 유발 가능성이 있는 사카린을 밀수, 국민에게 팔아 치부(致富)했다는 것 때문이다.

사카린 밀수 사건 그 자체가 삼성그룹의 어두운 보고서다.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을 역임했던 방준모씨(미국 뉴저지 거주)는 기자와 오랜 시간 인터뷰를 가졌었다. 그 가운데 사카린 사건도 자세히 증언 했다. 드라마 “영웅시대”도 사카린 사건을 다룬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삼성이 저지른 대국민 죄악(罪惡)의 하나였던 사카린 밀수 사건의 전모를 공개한다. <편집자주>

지금은 작고한 이병철 회장이 이끄는 삼성그룹은 한국 최대의 재벌이다. 한때 항간에서는 이병철씨를 호칭할 때 ‘돈병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50년대 이후 줄곧 그렇게 불려오기도 했지만, 그는 한국 경제를 살리는 큰 인물이었다. 삼성 재벌 이병철 회장이 민족사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향후 역사가들이 냉철하게 평가를 내릴 것이지만….친일 식민 자본가, 매판 자본가, 권력과 밀착된 권력시녀의 재벌로 호칭되는 부정적인 면도 있으나 민족자본을 형성한 민족기업이라는 긍정적인 점도 있다.

대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 내면을 추적한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현대사의 상당 부분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병철씨는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찬우씨와 모친 권씨 사이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탄생했다. 1년 추수가 1천 석이나 되는 부농에서 자라났다고 한다.1938년 대구의 수동에 차린 ‘삼성상회’란 구멍가게가 오늘의 삼성재벌의 출발이다.

우선 외형상으로 삼성재벌이 한국경제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밝게 한 삼성그룹의 1980년대를 보자. 1982년의 삼성그룹 총매출액은 5조 3천억 원이었다. 한국의 GNP가 48조 3천억이었으므로 총GNP의 5.3%를 삼성이 차지했던 셈이다. 엄청난 자본집중 현상을 한눈에 보게 한다.

돈 버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손대

일본 동경공대의 이론경제학자인 야지마 긴자 교수가 1980년대 초에 분석한 삼성그룹의 현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룹 스스로도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했겠지만 권력과의 밀착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그렇게 많은 부를 축적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섬유, 식품, 전자, 제지, 석유화학, 조선, 조립기계, 무역을 주로 한 종합상사(1호)활동, 백화점, 체인 스토어의 유통업, 건설, 부동산, 관광, 레저산업, 매스컴에서 의료, 농축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커버한 기업그룹이다. 더구나 모든 기업들이 한국의 대표적 기업이다.제품의 마켓셰어를 보자. 설탕 53.7%, 조미료 34%, 모직복지 44.1%, 합섬복지 53%(학생용), 기성복 33.2%(신사복), 텔레비전 33.0%, 신문용지 39.1%, 생명보험 31.6%, 화재보험 34.8%(단체) 등이다.

말하자면 설탕정제의 제일제당은 제당업계의 톱기업이라는 점, 제일제당은 설탕 외에 조미료, 배합사료, 밀가루, 엿, 유가공 등도 손을 대고 있다. 브랜드는 백설표. 제일모직은 골덴텍스란 브랜드로 한국산 복지를 국제 수준에 올려 놓았다. 수출액 4백 19억원(1982년)이 그것을 증명한다.

제일합섬은 국내 수요의 50% 이상을 공급하고 수출만 5백 81억원(1982년)이 된다.텔레비전을 생산하고 있는 메이커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삼성전기는 삼양전기를 병합해서 설립한 전기회사로, 한국 유일의 양산체제를 갖추고 있다. 텔레비전 외에 VTR, 테이프 레코더 등도 수출하고 있다.

수출시장은 아메리카, 캐나다,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일본, 오스트리아 등지(삼성전기는 1977년초 삼성전자와 합병).삼성전자는 삼성그룹의 일렉트로닉스 사업의 모체로 텔레비젼, 냉장고, 음향기기, 컴퓨터, 전자시계 등을 생산 수출은 2천 1백억 원(1982년).

그밖의 관련제품 메이커로 삼성전관(현재의 삼성SDI), 미국의 코닝과 합자 설립한 삼성코닝, 삼성전자부품 등이 국내수요를 충조시키고 해외에도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전주제지(한솔그룹의 전신)는 신문용지 생산메이커, 연생산 13만톤. 동방생명(현재의 삼성생명)은 생명보험을 취급, 1982년 말 현재 보험사상 최초로 1조원의 자산을 돌파, 신기원을 이룩했다. 물론 한국 최대의 생명보험 회사이다.

손해보험은 안국화재(현재의 삼성화재)가 단연 톱이다.그밖에 서울 중심가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 역시 한국 최대의 백화점이다.그리고 제쳐놓을 수 없는 삼성물산은 종합상사 제1호. 수출액은 1975년 2억2천만 달러, 1976년엔 3억 8천만 달러, 1977년엔 5억 6백만 달러를 달성, 정부로부터 영예의 5억 달러 탑을 받은, 수출 실적에서도 단연 제1위이다.그야말로 경이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의 전 산업의 성장률도 물론 놀라울 정도다.

1972년엔 불과 16억 6천 달러였던 것이 해마다 96.8%(1973년), 40.6%(1974년), 18%(1975년), 43.7%(1976년)로 늘어나 1977년엔 마침내 1백 4억 달러를 돌파했다. 5년 동안 거의 7배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다.이에 비해 삼성그룹은 1972년엔 3천 5백만 달러, 전 산업수출에서 2.1%의 비율을 차지했었다. 그것이 다음 해엔 1백 40.9%로 크게 뛰어 8천 3백만 달러, 다음해엔 28.9%, 다음 1975년엔 2백 23.4%로 경이적인 성장을 보여 일거에 3.2%에서 6.4%로 비율을 확대했다.

1976년에도 전 산업의 수출 81억 달러에 대해 삼성그룹은 4억 1천만 달러를 수출, 전 산업대비 5%를 차지했으며, 1977년엔 전 산업 1백 4억 달러 대비 5억 6백만 달러를 달성, 6%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2년의 수출고는 34억 달러.가히 ‘한국의 기적’의 원천을 여기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삼성그룹의 매상이 한국 GNP의 8%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976년 GNP가 12조 1천억 원인데 삼성의 매상은 4천 4백억으로 3.6%를 차지했다. 1977년엔 GNP 15조 4백 10억 원에 삼성그룹은 6천 3백억 원으로 4.2%를 점하고 있다. 1982년의 GNP는 48조 3천억 원인데, 삼성의 총 매출액은 5조 3천억 원, 무려 5.3%를 차지하고 있다.또한 삼성그룹의 납세액이 국가세입 예산 중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부의 조세수입의 5.1%를 삼성그룹이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별(장성)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삼성(三星) 역시 이름 그대로 세 개의 별이다. 과연 삼성의 생명은 영원할 것인지…. 삼성그룹은 한국에서 ‘공룡’으로 통한다. 공룡은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이 땅에서 멸종된 동물이다. 이런 동물을 삼성에 비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정보부가 이러한 삼성그룹과 어떻게 밀착되었으며, 어떤 공작으로 견제했는가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삼성의 연대별 설립회사는 다음과 같다.

삼성상회(1938년 창설), 삼성물산(1952년 설립), 제일제당공업(1953년 설립), 제일모직공업(1954년 설립), 안국화재해상보험(1958년 인수), 동방생명보험(1963년 인수), 신세계백화점(1963년 인수), 중앙개발(1963년 설립), 전주제지(1965년 설립), 중앙일보사(1965년 설립), 삼성미술문화재단(1965년 설립), 고려병원(1966년 설립), 삼성전자공업(1969년 설립), 삼성전기(1969년 설립), 삼성전관(1970년 설립), 삼성공제회(1971년 설립), 제일합섬(1972년 설립), 호텔신라(1973년 설립), 삼성전자부품(1973년 설립), 삼성코닝(1973년 설립), 삼성석유화학(1974년 설립), 삼성중공업(1974년 설립), 삼성반도체(1974년 설립), 용인자연농원(1976년 개장), 삼성종합건술(1977년 설립), 삼성조선(1977년 설립), 그리고 한국중장비공장(창원), 삼성전자 포르투갈공장, 삼성시계, 조선호텔, 한·알라스카 등.

공룡처럼 거대해진 삼성이 어떻게 성장을 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병철씨의 성장 배경부터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병철씨는 경제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거기에다가 사업가에게 꼭 필요한 여자와 요정을 다룰 줄 아는 소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작고하기 직전에 펴낸 자서전 {호암자전}에서는 어린 나이 때부터 요정 출입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건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학업을 중도에 방기했다는 것은 자못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또한 단조로운 시골생활 속에서 마음붙일 만한 일도 없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여관에 장기 투숙하기도 하고 친지 집을 하숙집 삼아 묵기도 했다.이렇게 2년 가까이나 무위의 서울생활을 하다 보니 오히려 심신이 더없이 피로해지기만 했다. 당시 유행하던 카페며 명월관 등의 술집 출입에도 지치게 되었다.”≫

그는 결혼은 16세에 했으며, 26세 때는 이미 4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자서전을 더 인용해 본다.

“내가 중동학교에 들어간 16세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인 경북 달성군 묘동의 순천 박씨댁에 장가를 들었다.지체를 따지고 가풍을 보고 부친께서 손수 고른 혼처였다. 상례에서 처음으로 신부를 대면한 구식혼례이다.당시의 풍습으로는 조금도 조혼이 아니었지만 맏딸 인희가 태어난 것은 20세 때로 다음, 맹희, 창희, 숙희의 순으로 자식을 보고, 26세 때에는 이미 4남매의 아버지였다.”

젊을 때부터 수완이 뛰어난 이병철씨

어린 나이부터 요정 출입을 경험한 이병철씨는 20대 때부터 사업가들과 친숙해졌다. 요정 출입 실력은 해방과 해방 이후의 난세를 헤쳐나오는 생명선이 될 때가 많았다. 사업가들이 같이 요정에 들어갔다가 이병철씨에게 호감을 갖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라고 소문이 나 있다. 그는 20대에 70∼80여명의 기생들을 예약한 후 접대해서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마산에서의 정미업의 성공으로 사업에 대한 자신을 어지간히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미소를 더이상 확대한다 한들 투자 효과면에서 신통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이익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처음부터 정미를 위한 양곡의 운송에도 화물자동차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마산에서는 화물량에 비해 화물자동차 수가 달리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운송수단을 직접 갖는다는 것은 정미업의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나는 자동차 5대를 굴리던 일인경영의 마산 일출자동차회사를 매수하는 동시에 신형 트럭 5대를 새로 매입하여 운송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예상하던 바와 같이 운송업은 호조일로를 걸었다. 그러자 우리는 또다른 사업을 벌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우리가 해서 안되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한편 사업이 번창하자 근향 동년배의 돈많고 호탕한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이들과 어울려서 밤마다 호유를 일삼았다.

졸부로 어깨가 자못 으쓱해진 나는 젊음의 호기에 이끌리는대로 초저녁부터 요정을 전부 대절해서 노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하루는 마산에 있는 기생과 일본 예기들 70, 80명을 전부 예약해 놓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경남의 경찰부장이라는 일인이 마산에 왔다. 마산에서는 대단한 상전이라 그를 향응하기 위해 일류 요정에 안내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 마산에는 일본요정 망월 등 일류요정이 7, 8군데 있었다고 기억한다.그러나 어느 요정에서나 반듯한 기생은 모조리 내가 예약을 해 놓은 다음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남이 미리 예약해놓은 다음에는 아무리 권세가 높은 사람의 요구가 있다 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유흥가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당황한 일본 관리들이 나에게 달려와서 자기네의 딱한 사정을 털어놓고는 제발 요리집 한 군데와 기생 서너 명만이라도 양보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병철 회장의 사람 다루는 솜씨는 후일 삼성그룹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이병철씨가 성공한 요인 중 첫째의 배경은 로비 실력이 뛰어나다 는 것을 들었다. 또다른 성공 요인으로는 부동산을 통해 재산을 증식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자기 돈이 아니라 일본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산 부동산들이 돈을 벌어주었다. 당시 화폐로 집 한채의 값은 1백원 정도였다. 그런데 이병철씨는 11만원이라는 거액을 은행으로부터 빌려냈다.

수완가가 아니면 은행의 문턱을 밟을 수도 없는 시대에 11만원의 돈을 빌려냈다는 것은 설명할 여지가 없이 그가 수완가였음을 증명해준다. 은행 돈을 빌려 부동산을 사들이고 힘 하나 안 들이며 돈을 벌었던 그때의 경험은 후일 삼성그룹이 일어서는 기본전략이 된다. 젊었을 때의 이병철씨가 일본인들을 이용해서 돈을 번 경험은 후일 한국 경제에 끼친 긍정적 부분과 부정적 부분으로 역사 위에 선명히 나타나게 된다.

부동산 투자로 돈 쉽게 벌어

이병철씨가 자랑 처럼 말하고 있는 27세 때의 토지 매입과 일본은행에서의 대출에 얽힌 얘기는 식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내용이다.

≪”세번째 사업으로 나는 토지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정미와 미곡 거래 등을 통해 지가의 동향에도 자연히 관심이 갔다. 당시의 토지 가격은 평당 25전, 한 두락은 2백평이다. 논 2백평 한 두락의 쌀 생산량은 대두로 26두인데, 소작료로 생산량의 반인 13두를 제하더라도 13두의 소득이 있었다.

당시 13두의 쌀값은 15원이었으므로 관리비 1원, 지세 1원, 기타 잡비 1원을 제한 실수입은 12원이 된다.지가 50원의 논 한 두락에서 연 7분 3리의 은행이자 3원 65전을 공제해도 투자액의 16%인 8원 35전의 연간 순수익을 얻은 셈이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세계적인 공황에다 일본 제국주의의 농민수탈 정책이 극심하여 이농자가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땅을 사모으기 위해서 면밀한 수지계산서를 첨부하여 이미 오랫동안 거래실적을 쌓은 식산은행 마산지점에 융자신청을 했다. 히라다(平田)지점장은 토지를 담보로 감정가격의 8할까지 융자할 수 있고, 이자는 7분 3리라고 말했다.김해평야의 경작이 가능한 전답은 한 평도 남기지 않고 사들이기로 작정하고 매물로 나와 있는 물건들을 조사했다.

40만평의 논을 처분하려는 일본인이 있다는 말을 듣자 곧 계약을 하고 착수금으로 1만원을 지불하였다. 아마노(天野)농장이라는 큰 농장의 일부였으며, 주인은 아마노라는 사람이다.다음날 히라다 지점장을 만나 경위를 설명하였다. 열흘쯤 지나 연락을 받고 다시 만났더니 그는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토지대전의 잔금 9만원은 이미 아마노씨에게 지불했고 그러고나서도 2만원이 남아 당신 구좌에 넣어두었다”는 것이다.이때 산 논은 평당 25전으로 40만평이니까 총액은 10만원, 1만원을 착수금으로 지불했으므로, 은행에서 9만원을 대부받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은행의 감정결과는 평당 38전이므로 평당 27전, 총액으로는 11만원을 융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입대금을 은행 융자로 전액 지불하고도 돈이 남는다.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적당한 전답을 찾아 계약하고 싶다는 의향을 은행에 통고하면 은행은 바로 감정하고 융자를 해준다. 그뿐이 아니다. 명의변경이나 담보권의 설정 등 복잡한 절차까지도 모두 은행이 대행해 주는 것이다.토지 투자사업은 순조로웠다.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로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나는 연수 1만석거리,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이병철저, {호암자전}, 29∼31쪽)”≫

그 뒤 어려움을 겪어 토지를 매각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부동산에 손댄 이병철씨는 서울 서소문동 주변의 땅, 용인 땅, 골프장 땅을 비롯, 전국 요소요소의 땅을 수없이 구입, 부동산을 통해 대기업으로 일어선다.

세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이 부동산 매입에 동원된다. 이병철씨는 스스로를 ‘운좋은 사람’으로 자칭하고 있다. “나는 시운을 타고 났다는 의미로서 행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내가 이 정도로 사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나 같은 인물을 요구하는 시대의 환경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역시 그는 ‘운좋은 사람’이었다.이병철씨가 성공한 또다른 요인을 꼽는다면, 먹고 입는 소비재 사업에 손을 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돈 버는 일이면 뭐든지 손을 댔다.

그래서 밀수사건 같은 대사건이 터진 것이다.1938년 3월 1일 대구 수동에 설립한 삼성상회는 식품·의류·농산물들을 판매했다. 상호를 삼성(三星)으로 정할 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삼성의 ‘三’은 ‘큰 것·많은 것·강한 것’을 뜻했으며, ‘星’은 ‘밝고·높고·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소원을 담아 ‘삼성’이라고 상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름을 붙인 그 자신도 후일 삼성이 한국을 주름잡는 거대 재벌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삼성이 일어선 배경은 먹고 입는 소비재 산업에 손을 댄 것이었다. 이 중 양조장 경영에 대한 언급은 빼놓을 수 없다(1939년).

≪”삼성상회의 업적은 순조롭게 신장해갔다. 자금의 여유가 생겨 무엇인가 새로운 투자 대상이 없는가 찾던 끝에 양조업에 착수했다.대구에는 그 당시 규모가 큰 양조장이 여덟 군데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것이 각각 4개씩이었다. 청주(淸酒)의 상권은 일본인이, 막걸리나 약주의 상권은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나의 목표는 청주에 있었다. 때마침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양조라는 회사가 매물로 나왔다.

연간 양조량 7천석으로 대구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큰 규모였다. 경영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겨 급히 팔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10만원을 호가하는데도 즉각 매수했다.양조는 당시 허가가 제한되어 하나의 큰 이권이기도 했으므로, 매매에는 시설평가액에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는 것이 예사였다. 그것을 감안하면 헐값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삼성상회 개업 1년 후의 일이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시체제는 강화되었고, 경제활동에도 갖가지 통제가 가해지면서 경제는 더욱더 침체해갔다. 그러나 유독 양조만은 봄을 구가할 수 있었다. 시장개척에 부심할 필요도 없고, 할당량의 술을 빚기만 하면 절로 팔려나갔다. 세수 확보를 위해 밀주단속이 철저해지자, 양조업자는 도리어 재고 부족에 고민하는 형편이었다.양조업에 대한 과세는 이익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어느덧 대구에서도 굴지의 고액 납세자가 되어 있었다.항상 친구나 양조업자들과 어울려서 요정으로 향하는 일이 잦았다. 돈과 시간을 주체 못하듯 밤마다 새벽 한시가 지나서야 귀가하고 아침에는 열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는 나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그때는 하루 저녁 요리가 1인당 10원 정도였고, 기생 화대도 한 시간 1원이면 후한 편이었다. 대구의 요정이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 등지로 나들이를 했으며,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본의 별부(別俯)나 경도(京都)등지로 원정까지 했다.(이병철, {호암자전}, 36∼37쪽)”≫

일제시대 때 양조장을 경영했다는 것은 보통 수완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병철씨는 인재 등용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것도 사업성공의 비결이었다. 그의 소신은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用人勿疑)였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고용하지 않고, 일단 고용했으면 의심을 안하고 전적으로 일을 맡기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사원을 채용할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면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기업이 영원히 생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업은 영원한가. 이에 대한 답은 물론 ‘노’이다. 영원은 커녕 짧으면 10년, 20년, 길어도 40년, 50년의 사이클로 소장하고 있다. 영고성쇠를 거듭하는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보다도 훨씬 짧고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애 중에서 기업 경영에 바칠 수 있는 경영수명도 30∼40년에 불과하다.

이웃나라 일본의 기업실태를 {일본경제신문}의 자매지 {일경 비즈니스}가 실시한 ‘일본 톱기업 1백사의 과거 1백년간의 성쇠조사(1983년 9월 19일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있다.이 조사는 1896년부터 1982년까지 대체로 10년 간격으로 9기간에 걸쳐 매상고 기준으로 상위 1백사의 변천을 조사하고 있다.

그 조사결과에 따르면, 9기간 동안 연속하여 상위 1백사 안에 드는 번영을 누린 기업은 단 2사 뿐이고, 나머지 98사는 도산·흡수·병합·변신 또는 업적부진 등의 이유 때문에 1백사 랭킹에서 탈락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일단 1백사 안에 든 기업은 평균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랭킹에 머무를 수 있었는가, 다시 말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간은 평균 얼마 동안이었는지 조사한 것을 봐도, 겨우 30년간에 불과했다.

다른 항목의 조사에서는 1896년의 제1기 1백사 랭킹에서 상위 10사에 들었던 기업 중 9사가 회사 설립 후 평균 27년 후에는 흡수·병합이나 도산으로 그 사명(社名)이 소멸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히고 있다.(이병철 {호암자전},244∼245쪽).”

소멸을 막기 위해,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덕망을 갖춘 인격자 ▲탁월한 지도력 구비 ▲신망받는 인물 ▲창조성이 풍부 ▲분명한 판단력 ▲추진력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삼성(三星)은 기업의 영속을 위해 하루에 삼성(三省)해야 할 시대에 와 있다. 삼성의 네번째 성장 이유는 빚을 잘 얻어다 쓴 것을 들 수 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미로부터 얻어온 차관과 은행돈이 기업성장의 주축이 되었다.해방이 된 후에 이병철씨는 해외정보를 알기 위해 일본으로 달려갔다.

그의 회고록을 옮긴다.≪”1950년 2월, 패전의 상처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동경을 방문했다. 전택보·설경동씨 등 일행 15명으로 구성된 일본 경제 시찰단의 일원으로서였다. GHQ(점령군 총사령부)의 초청에 의한 것인데, 한국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부흥을 도모하려는 일본경제의 제안으로 시찰단 초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물론 해방 후 최초의 일본 시찰단이기도 했지만, 20년만의 동경 방문이었고, 한때 피지배국의 국민이던 처지에서 독립국의 국민으로 바뀐 후의 첫 방문이었다(중략).

하네다공항에서 우리를 출영해준 사람 가운데는, 조선 총독부의 수석 총무국장이었던 호즈미씨(*積) 조선신탁회 사장이었던 다다이씨(讚井)를 비롯하여, 마산에서 토지 매입을 확대했을 때 융자 일을 도와준 전 식산은행 마산지점장 히라다씨(平田)와 경북지사를 지낸 노다씨(野田)도 있었다.

그밖에도 몇몇 지면의 사람이 있었지만, 그렇게 봐서 그런지 그들에게서 옛날의 위풍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네다에서 도심에 이르는 연도에는 판자집이 즐비할 뿐, 황거 앞의 석조빌딩에 휘날리는 성조기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시찰단은 5월까지 3개월동안 각지를 정력적으로 돌아보았다.(이병철, {호암자전}.50∼51쪽)”≫

이병철씨는 비료공장을 짓기 위해 차관 교섭을 시작하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60년의 신정을 동경 제국호텔에서 한가로이 보내고 있었다. TV들은 정초 특집을 방영하고 있었다.(중략). 그 토론에서 어느 전문가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과의 대결에서 자유진영이 승리하려면 서방측의 단결이 불가결한데, 빈곤과 정치불안에서 오는 쿠데타나 내부 분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 염려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서는 선진국의 원조로 후진국 경제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해가야 하는데, 미국 단독의 힘만으로는 벌써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고 했다.

이 대목은 우리나라 실정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이제 미국 단독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자유 진영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종전 이래 미국의 원조로 전화에서 부흥한 선진제국이 각기 GNP의 1%를 원조가 차관 등의 여러가지 형태로 개발의 가능성이 있는 후진국에 제공함으로써 미국의 원조부담을 분담해야 한다.

미국의 발의로 그 첫 회의가 작년(1959년) 워싱턴에서 개최되어 이미 몇몇 나라가 차관을 얻어 공장을 건설했고, 금년(1960년)에는 서독에서 2차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여기에는 미국 외에 영국·서독·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호주·포르투갈 등 10개국이 참여한다’는 대목에 나는 바짝 귀를 기울였다. 일본은 나중에 추가로 그 그룹에 가입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것은 OECD산하의 DAG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DAG(개발원조 그룹)는 1961년 가을 DAC(개발원조위원회)로 개편되어 참여국가도 해마다 확대되어 갔다. 답답하던 가슴이 트이는 듯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막막하던 비료공장 계획은 물론, 한국경제에도 서광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경에서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정부원조가 아니고도 민간 베이스의 상업차관이 있어, 사업계획만 타당하면 장기저리의 자금대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국하자마자 이기붕 국회의장을 만나 외국차관으로 대규모 비료공장을 세울 구상을 이야기했다.”훌륭한 착상입니다.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이라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삼성의 수용능력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이의장은 이렇게 격려해주었다.그 다음날 경무대를 방문했다. 사업 일로 이대통령을 찾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비료공장 건설에 관한 계획과 기본구상을 대통령에게 솔직히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2차 산업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물자를 국산화하지 못하고 수입에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은, 수입 대체산업을 하나라도 더 진흥시켜 달러를 절약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료공장을 세우고자 합니다. 단일 수입품목으로는 지금 가장 외화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이 비료입니다.”

“장차 우리나라가 비료를 자급자족하려면 소규모 공장으로는 불가능하고, 4·5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국제 수준의 현대적인 대규모 공장을 여러 개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뭐, 4·5천만 달러?” 약간 놀란 듯한 대통령의 반문에 ‘유럽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대답하자 훌륭한 생각이라고 하면서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꼭 성취시키라고 격려해주었다. 이 대통령은 달러를 쓰는 일이라면 극히 적은 액수더라도 직접 결재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4·5천만달러의 차관계획을 선뜻 승락해주었던 것이다.(이병철 {호암자전}, 94∼96쪽)”≫

외국 빚을 잘 얻어들였던 것이 삼성이 성장하는 기틀이 되었다. 물론 한국 경제의 성장이 외국에 의존한 바가 컸기 때문에 모든 재벌들의 동일현상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삼성은 외채를 갚는데 앞장서야 할 그룹이기도 하다.한국에 있어서 권력과 재벌은 ‘바다와 배’의 관계처럼 밀착되어 왔다. 권력이 정치자금을 얻기 위해 파도가 되어 배를 뒤흔들기도 하고, 또 성난 파도가 되어 침몰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순항을 시키기도 해왔던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와 삼성그룹 이병철, 이 두 사람은 바다와 배의 관계처럼 18년 간을 밀착해왔다. 5·16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철씨를 부정축재자 1호로 몰아 1백 3억 4백만환(7개기업 전체 부정축재액의 27%)의 벌과금을 물렸다. 세인들은 그때 삼성이 멸망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병철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총격 당할 때까지 삼성그룹을 한국의 상위그룹으로 지켜왔다. 권력이 재벌을 다스렸지만, 역으로 재벌도 권력을 다스린 것이다.

박정희와 이병철의 운명적인 만남

박정희와 이병철씨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이병철씨는 5·16혁명이 일어나는 날 아침 동경 제국호텔에서 골프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 운전수로부터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착잡한 심정으로 골프장으로 향했다.

이씨는 말한다.≪”5월 29일에는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부정 축재의 1호는 동경에 있는데, 우리들 조무라기만 체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옥중에서 불평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6월 4일이던가, 재일 거류민단장인 권일씨가 찾아와서, 귀국을 재촉해달라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당국의 말을 전하면서 귀국을 권했다. 며칠 후에는 다시 혁명정부가 파견했다는 청년 2명이 호텔에 나타나더니, 즉시 귀국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을 남겨놓고 사라졌다.열흘이 지난 6월 13일 이번에는 마루노우치서의 경부(警部) 두 사람이 찾아왔다. 신변보호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들은 한국인을 나에 대한 가해자로 가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또한 만일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일본경찰에 책임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경시청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형사를 배치해 놓고 떠나갔다.(중략)

귀국에 앞서 나의 솔직한 소신을 피력해두고자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이주일 장군 앞으로 서한을 보냈다. 우선 조국의 적화를 방지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진력하고 혁명정부에 사의를 표하고 이어 부정축재자 처벌에 대한 의견을 대략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정부 방침 그 자체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들과 변칙적이고 불합리한 세제하에서도 국가경제 재건에 기여하면서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 운영을 뒷받침해 온 기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염려하는 바는 오늘날의 혼란의 근원은 국민의 빈곤에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거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의 안정없이 빈곤을 추방할 수는 없다. 경제인을 처벌하여 경제활동이 위축된다면 빈곤 추방이라는 소기의 목적에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나를 비롯한 많은 기업인들의 처벌을 모면하기 위한 궤변이 결코 아니다. 나는 전 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바다.’

이 서한이 6월 11일 한국신문에 공표되자 그 진의 여부를 확인하려고 일본의 각 보도기관 기자 몇 명이 번갈아 찾아왔다. 6월 24일 오전 10시 제국호텔에서 AP, UPI 등의 기자들과 회견했다. “타의 아닌 본의에서 나온 일이다. 빈곤 재기를 위해서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이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겠다”고 밝혔다.(이병철저, {호암자전}. 109∼111쪽)”≫

이 서한과 기자회견은 기업이 군사정권으로부터 생존권을 따내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였다.

정보부에 끌려간 이병철

6월 26일. 그는 박준규씨(전 국회의장)와 함께 일본에서 귀국했다. 비행기는 밤에 도착했고, 그날은 비가 내렸다.정보부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비행장에 나갔다. 그는 육사 8기생이며, 나와 동기생이었다. 나는 당시 정보부 서울분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병철씨가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자 이병희는 그를 지프차에 태웠다. 이병철씨는 불안한 듯 이병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나도 잘 모릅니다.”

이병희가 잘 모른다고 하자 더 초조한 분위기였다. 이병철 씨는 명동 메트로호텔로 안내되었다. 호텔은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혁명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은 이병철씨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월 27일, 최고회의 부의장이 된 박정희 씨가 이병철 씨를 불러들였다. 박 부의장은 참의원 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헌병들의 경비는 전시체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검은 안경을 낀 박정희씨 앞에 불려온 이병철씨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이제 돌아왔습니다.”
“부정축재자 처벌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십시오.”
“부정축재자로 지정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박정희의 얼굴 표정은 약간 굳어졌다.박 장군은 입을 열었다. “죄가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잠시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감돌았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축재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현행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전시 비상사태하의 세제 그대로입니다. 이런 세법 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 부정축재자로 구속하고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수만명이 있습니다. 어떤 선을 그어서 죄의 유무를 가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처사입니다.”

군인으로서의 박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제에 문외한이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순간은 제3공화국이 재계와 밀착되는 최초의 순간이기도 했다. 이병철씨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부정축재자 처벌로 고민한 박장군

≪”박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람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운영, 국민교육, 도로 항만시설 등 국가운영을 뒷받침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위축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稅收)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박부의장은 내 말을 감동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하였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미소를 띤 박 부의장은 다시 한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호텔에서 연금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청년(이병희 서울분실장)에게 까닭을 물었다. 이튿날 아침 그 청년이 찾아와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이병철, {호암자전}, 114∼115쪽).”

이병철 씨와 박정희 장군의 첫번째의 만남이 있은 얼마 후,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났다.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장군을 제거한 후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의장이 되어 있을 때였다. 이병철씨는 부정축재 기업들이 벌금을 낼 게 아니라 공장을 지어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기업이 국가에 해를 끼쳤는지 이바지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이 그것을 납득하겠습니까?”

박장군으로서도 고민이었다. 빈곤과 부정을 추방하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발표했는데, 경제인 말을 들으면 부정 추방에 차질이 오고, 부정 경제인을 없애면 빈곤추방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그래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박정희씨와 이병철씨는 자주 만났다. 1962년 6월 9일에는 제2차 통화개혁이 단행되었다.

통화개혁이 단행된 이튿날인 6월 10일 박의장은 이병철씨를 불러들였다. 박 의장이 말문을 먼저 열었다.

“어제 밤에 중대발표 방송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큰 혼란에 빠질 것 같습니다.”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조달 때문에 취한 극비조치입니다. 최고회의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새 지폐는 천병규 재무장관이 영국에서 인쇄해왔지요.”
“국민경제면에서 큰 낭비가 아닐까요. 세계적으로 볼 때, 화폐개혁으로 이익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바꾸는 국민들의 원성도 대단할 것입니다.”

박의장은 중대한 경제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병철씨 등 경제인협회 회원들과 의논키로 약속했으나 화폐개혁만은 의논하지 않았다.

1963년 10월에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박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민정이양 후인 1964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철 씨를 또다시 불러들였다.

“이사장! 이제부터는 일을 피하지만 말고 새 사업을 일으켜서 경제건설에 적극 참여해 주십시오. 농약공장을 건설해보시오.”
“이 자리에서 답변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역부족일 뿐입니다.”
“정부가 적극 뒷받침해줄 테니 비료공장을 지으시오.”
“행정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박대통령은 즉석에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불렀다.

“장장관! 이사장이 비료공장을 짓기로 했소. 전 책임을 지고 뒷받침하시오.”
“예. 각하! 최선을 다해서 지원하겠습니다.”

이병철 씨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밀착으로 비료공장건설의 대사업을 따냈다. 그러나 후일 이것이 화가 될 줄은 미처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삼성그룹 이병철씨는 박정희 대통령과 밀착, 정부로부터 비료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따냈다. 박대통령은 1964년 대통령 선거 직후 이병철 씨와 만난 후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을 즉석에서 불러 “삼성 이병철 회장을 도와주라”고 명령했었다.장장관은 이 명령에 따라 삼성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회장! 행정상의 문제는 모두 내가 뒷받침할 테니 비료공장 건설을 빨리 추진하시오.”
“대외교섭권 등의 권한이 삼성에게 있어야 하고, 이 대외교섭권을 삼성에 일임한다는 정부의 공한(公翰)이 필요합니다.”
“알았습니다. 대통령께 건의하겠습니다.”

며칠후, 박대통령은 이병철 씨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공장 건설을 빨리 진행시켜라”고 독려했다. 정부가 대외교섭권을 삼성에게 위임했다는 공한을 받은 이병철씨는 이 공한을 들고 쏜살같이 일본으로 달려갔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정부가 삼성에 대규모 비료공장의 건설을 일임했다는 공한을 장기영 장관으로부터 받아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5천만 달러의 큰 상담인 만큼 긴장됨을 어찌할 수 없었다. 동경에서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미즈가미 미쓰이물산 사장, 이나야마 야하다제철 사장, 소또지마 고베 제강 사장을 초청하여 공한을 보이면서 “정부로부터 비료공장 건설을 의뢰받았는데, 일본의 플랜트를 택해야 할지 미국이나 유럽의 플랜트를 택해야 할지, 이것은 오직 여러분의 협조여하에 달려 있다.” 고 말했다. 이나야마 사장은 매우 놀라면서 “우리가 최대한으로 협력할 터이니 일본에 맡겨달라”고 간청했다.이 말이 전해지자 일본의 비료업계에서는 벌집 쑤신 듯이 소동이 벌어졌다.

한국은 일본 비료업계의 큰 시장인데 그 시장을 잃을 뿐더러, 한국이 장차 해외시장에서 경쟁상대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일본의 비료업계를 대표하여 쇼와 전공의 야스미시 사장이 찾아와 “공장건설을 철회하면, 앞으로 한국에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장기적으로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렇다면 굳이 한국을 도울 필요는 없다고 비료업계의 대표들은 차관 공여의 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비료업계와는 반대로 일본 재계는 호의적이었다. 이나야마(야하다제철) 사장은 “한국의 비료공장은 꼭 일본이 맡아야 한다. 일본의 플랜트는 구미의 그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거리가 가까워서 애프터 서비스에도 편리하다. 이러한 실리적인 조건 외에도 일본 재계로서는 한국의 비료공장 건설에 협력해야 한다.

한국 농민에게 절실한 비료공장을 일본의 협력으로 건설하게 되면 한·일간의 선린우호에도 이바지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삼성은 미쓰이물산과 차관협정을 맺었다. 일본정부의 차관 승인은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기 2주일 전인 1965년 5월에 떨어졌다.

삼성은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얻어 1965년 9월 일본 미쓰이(三井)물산으로부터 상업차관 4천 3백 90만 달러를 얻어오게 되었다. 이 차관은 한국의 민간차관 1호였다. 이병철씨는 이 자금을 얻어오기 위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추진하는 한일회담의 타결을 위한 일본 로비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온 차관으로 한국 비료공장 건설이 시작된 때는 1965년 12월 10일이었다. 한일협정이 굴욕외교였다고 심한 시위가 계속될 때 이병철씨는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차관으로 비료공장 건설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1966년초부터는 일본으로부터 공장을 지을 기계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6년 9월경에는 공정이 80% 정도 진척되었다.

사카린 2천3백 부대를 밀수

9월 16일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시중에 터져나왔다. 일본서 도입되는 자재 속에 43kg짜리 사카린 2천 3백 부대를 밀수, 시중에 팔아 거액의 돈을 긁어모으는 사실이 신문에 폭로되기 시작했다.

김형욱 정보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벌밀수라고 속칭되던 이병철 씨의 사카린 밀수는 그것이 한일회담 타결 후 비료공장 건설이란 이름으로 제1호로 들여온 민간차관 중에 ‘사카린’ 같은 밀수 품목이 들어 있었다는 점, 그것도 천하가 아는 재벌 이병철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심지어 밀수까지도 불사한다는 점, 그리고 1964년 대통령 선거 직전 장기영의 소개로 박정희의 은덕을 입어 제일착으로 한국에 상륙한 일본 미쓰이물산이 개입되었다는 점 등으로 비상한 충격을 야기시켰다.

그것은 한일간 경제유착의 어두운 면을 들어내는 첫번째 사건이었다.이 사건의 발단을 이병철 씨의 한국비료가 부총리 장기영의 중재를 통해 미쓰이물산으로부터 요소 비료공장 건설을 위한 민간 상업차관 4천 3백 90만 달러를 얻게 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차관은 4년거치 연리 5.5%, 1할의 조건이었는데, 당초에 한국 국회의 승인을 얻을 때부터 시비가 있었다.

꼭같은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이 일본 현지에서는 2천 2백만 달러면 해결됐다. 특히 일본은 같은 규모의 비료공장을 소련에 2천 8백만 달러에 판매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중 1천만 달러의 자금을 일본에 도피시켜 이 흑막에 관련된 한일 정치가들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김대중이 국회 본회의에서 추궁하고 나올 정도였으니….”

삼성의 부정사실이 속속들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재벌(財閥)이 받아야할 당연한 재벌(災罰)이었다.이병철 씨는 사카린 밀수사건이 폭로될 때,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 보고를 받았다. 이씨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한국 비료공장 완공의 날이 바로 목전에 있었다. 부푼 마음으로 동경에서 기계의 선적을 독려하고 있었다.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서울에서 긴급연락이 날아왔다. 보세창고에 있던 OTSA라는 약품을 정부의 허가없이 시중에 매각하여 큰 소동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급히 귀국했다. 실은 OTSA는 이탈리아 몬테카티니사가 개발한 특수약품으로서 요소비료 제조공정의 하나인 탄산가스의 흡수제조 과정에 쓰이는 것이므로 한비의 설계회사인 동양 엔지니어링을 통해 그 특허를 몬테카티니사로부터 산 것이다.

그것이 협소한 보세창고 내에 수많은 자재들과 함께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어떤 현장 담당사원의 부주의로 당국의 허가없이 6톤(당시 5만 달러 상당)을 처분했다. 이 과오로 지난 봄(1965년)에 벌금을 물어 일단 해결된 사건이었는데, 몇몇 정치가의 의도적인 방해공작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재연되었던 것이다.

사태는 심각했다. 한국 제일의 재벌이 밀수를 했다고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국회에서도 연일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어느 신문은 반년 동안에 걸쳐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계속 삼성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이론에 눌렸음인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배하면서까지 강제수사에 나서 차남 창희를 비롯한 몇 사람의 삼성 사원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정치 문제화되고, 일부 매스컴이 이에 가담하여 끈질긴 삼성공격을 되풀이했던 이면에는 당시의 복잡한 정계 사정이 얽혀 있었다. 그뿐이었다. 당시 권력구조의 중추에 있던 인물이 OTSA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한국비료주식의 30% 증여를 요구해왔었던 사실도 있었다. 아무튼 삼성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장되어 마치 국가적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은 정도를 넘는 일이었다. 입을 열면 모두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사카린 사건이 확대된 것은, 김두한 의원이 국회 국무위원석에 똥물을 퍼부으면서부터였다. 1966년 2월 2일 야당의원 김대중·김두한씨 등이 국회 발언을 통해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집요하게 추궁했었다. 김대중 의원은 1966년 9월 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이 문제를 또다시 거론했다. 달변가이며 사리판단이 분명한 김의원의 발언은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정의감과 애국의식을 갖고 외치는 소리는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의원의 연설이 끝난 후, 장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때였다. 김두한 의원이 등단하였다. 그는 전날 밤 파고다공원에서 몰래 퍼온 20리터 가량의 똥물통을 들고 당당히 국무위원석으로 걸어갔다.

“장관들은 이 똥물이나 드시오. 이것은 국민들이 보내는 사카린이오! 자 맛 좀 보시오.”

이렇게 외친 김두한 의원은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의 주무 부처 장관인 재무장관 김정렴을 비롯, 총리 정일권,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 법무부 장관 민복기, 상공부 장관 박충훈씨 등의 온몸에 똥물을 뿌렸다. 공중변소의 똥물은 가장 악취가 심한 인분이다.이 지독한 냄새가 나는 똥물을 뒤집어 쓴 장관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밖으로 뛰어나갔다.장관들에게 똥물을 뿌린 김두한은 똥물 투척사건 후에 의원직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곤혹스러워진 삼성재벌

김형욱 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긴급히 호출되어 불려갔다. 김부장은 미국에 망명할 당시 이 사건의 내막을 밝혔다.

≪내각이 총사퇴하는 판에 나는 박정희로부터 긴급호출을 받았다. “김부장, 울산 가보았소?” “아직 못 가보았습니다.” “비료공장이 약 3분의 2가 완성됐다고 하는데, 이런 말썽이 일어났으니 자칫하면 자유당 시절 비슷한 말썽 때문에 완성이 못된 독립산업 격으로 중단되고 말겠으니 부장이 개입하여 적절히 조치를 취하시오. 어떻게 하더라도 공장은 완공시켜야 할 것 아니오.”

나는 특별비행기를 주선하여 당일로 울산으로 내려갔다. 현지답사를 하고 와서 박정희의 허락을 받아 중앙정보부 차장이던 이병두를 비료공장건설 책임자로 임명하여 완공을 서둘렀다. 공사현장에 중앙정보부 대공분실까지 설치해 두었다.

한편 나는 일본 현지에 있던 요원들에게 지시, 미쓰이물산과 교섭하는 한편 광범한 소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였다. 결과는 예상대로 이병철의 삼성 재벌이 계획적인 밀수를 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병철은 관계자들에게 2백만 달러의 정식 커미션을 상납하고 국내에서 이를 보충하는 한편, 내자조달을 하려는 속셈으로 한국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품목만을 골라 비료공장 건설 자재라고 위장하여 밀수입을 하고 있었다.

이 품목들이 ‘사카린’은 물론 표백제, 전화기 제품, 수세식 변기, 심지어 목욕하는 욕조에 이르기까지 1만여 가지에 달하고 있었다. 울산 현장에서 나의 요원들이 조사를 시작하자 이병철측은 당황하여 물건들을 모래사장에 묻기도 하고, 바닥에다 버리기도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병철측은 그중 일부를 황급히 미쓰이물산측에 되돌려 보내려고까지 했는데 미쓰이측이 이를 거절하자 처분못한 물건들을 홍콩으로 다시 밀수출하려다가 우리 요원들에게 덜미를 잡히기도 하였다.”≫

국회에서 똥물을 뿌린 김두환 의원이 정보부로 불려왔다. 이×택 수사과장은 김의원의 배후를 조사했다.김종필씨계의 김용태·김종락씨가 그 배후에 있지 않는가를 캐내기 위해서였다.사건의 확대와 함께 검찰은 이병철씨의 둘째아들 이창희씨를 밀수혐의로 입건했다.

사태가 험악스러워지자 이씨는 자구책을 내놓았다. “한비 공장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발표를 신문지상에 했던 것이다.정보부 이병두 차장이 공장건설 현장에 파견되어 건설을 지휘하기까지 했다.

공장이 완공될 무렵이었다. 이병철씨는 돌연 공장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발표를 백지화하고, “헌납하지 못하겠다”고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이씨의 배짱은 알아줄 만했다. 그가 그런 배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박대통령과의 밀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김형욱 부장이 날 호출했다. “방실장! 이병철이가 주식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알고 있소?” “예.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병철이가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민단 말이오. 방실장이 이 사건을 마무리하시오.”

나는 당황했다. 5국 수사과에서 담당해왔던 일이 나에게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부사항을 모르고 있었다. 감찰실의 수사관을 수사과에 보내 일체의 조사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사건증거, 수사자료 등을 가지고 왔다. 밀수품을 매장했던 현장사진, 산적된 밀수품의 사진들을 쳐다보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국가나 민족은 어찌되었든, 이렇게 돈을 벌어야 되느냐는 부분에서는 부정적인 견해였다. 중학생 시절에 역사선생이 칠판에 ‘상인매국’이란 말을 썼는데, 그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삼성의 밀수사건을 소상히 재조사한 나는 이병철씨가 ‘한비’를 국가에 헌납하도록 하는 마지막 공작을 진행시켰다.돈과 섹스와 명예, 이것을 인간이 추구하는 3대요소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나 재벌들의 경우는 돈에 구애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한 인간이 일생동안 10억원을 쓴다면, 그 이상의 돈은 그 일생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 이상의 축적된 돈은 ‘명예’와 연결이 되는 돈이다.

나는 이병철씨의 약점이 ‘명예’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1차공작으로 한비와 관련이 있는 삼성의 간부들을 불러들여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조사를 하다가 내보낸 후의 반응은 다양했다. 정보부가 어떻게 조사를 하고 있는가가 한비의 성상영 사장에게 보고되기 시작했다. 성사장은 이병철씨와 사돈지간이었다. 성상영 사장을 조사하게 되었다. 최후의 조사대상은 이병철씨 가족에 두었다. 감찰실의 유능한 두 수사관을 불렀다. 삼성 밀수수사는 필동 안전가옥에서 진행시키고 있었다.

“당신들 두 사람은 현관에 지키고 서 있다가 한국비료 성사장이 들어오면 대기실에서 시비를 거시오. 단 폭행을 가하거나 상처는 내지 마시오. 다만 정신적으로 겁을 먹게 하시오.” “예, 알았습니다.”

얼마 후 성사장이 안전가옥으로 들어온다는 신호가 왔다. 성사장이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두 수사관은 그가 누구인지 모른 체 하면서 격앙된 어조로 삼성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삼성 놈들은 천벌을 받아 죽을 놈들이야! 건설자재를 들여온다면서 사카린을 밀수해오고, 심지어는 똥누는 변기까지 밀수를 해오다니, 죽일 놈들이라니깐? 울산 현장에 갔다온 수사관들은 분노해서 자기 손에 걸리면 뼈다구도 안 남도록 조지겠다고 하던데….”

이렇게 말한 수사관은 “아이고! 내 주먹이 운다”고 소리치면서 벽을 꽝 때렸다.옆에 앉아 있었던 성사장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때였다. 모 수사관이 알고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굴 기다리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네. 저는 한국비료 사장입니다.” 수사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사장한테 달려들었다. “앗, 바로 네가 밀수의 왕초구나, 여기서 만날 줄은 미처 몰랐다. 내 주먹이 울던 참인데 주먹 맛 좀 봐야겠어!”

그는 성사장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멱살을 잡힌 성사장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기실로 들어섰다. “이거 왜들이랫! 점잖은 손님이신데 잘 모셔야지. 이게 무슨 짓들이야. 다 물러가시오.”두 수사관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성사장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오신 걸 빨리 알았으면 안으로 모셨을텐데,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내가 부드럽게 대하자 그는 긴장을 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분위기를 간파하셨을 줄로 압니다. 국회의 여야는 물론 국민·공무원들이 삼성을 그렇게 욕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삼성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주는 기미가 있으면 저도 아래 수사관들에게 사장님처럼 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입니다.” 공작은 잘 진행되어갔다. 겁에 질린 성사장은 나의 말에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대기실에서 혼난 한국비료의 성사장은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했다.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 불려왔다는 압박감이 그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한비 헌납’ 발표를 백지화하려는 이병철씨는 중앙일보·TBC-TV 등 산하 매스컴을 동원하여 정부가 자유기업을 간섭한다는 내용의 기사와 방송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신상초·황성모씨 등 지식인들을 동원, 중앙 매스컴을 통해 어느 나라 재벌이든지 그런 정도의 부정은 있다는 논지의 발언을 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2백억 규모의 재벌에게 2천만원 상당의 밀수란 재벌 재산의 천분의 일에 해당되는 적은 금액으로 큰 문제가 안된다는 주장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한비 사장 사퇴 약속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보부가 한비주식의 환수공작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성사장님! 삼성이 국민의 원성을 씻기 위해서라도 비료공장을 깨끗이 국가에 헌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실장님, 알겠습니다. 알다시피 한비는 제것이 아니고 삼성 소유입니다. 그래서 제가 책임있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사장직을 사퇴하고 제 명의의 주식은 깨끗이 국가에 헌납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권한 모두를 몽땅 내놓도록 주선하겠습니다. 그리 알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곧 저희 부장님한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성사장의 정성어린 결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길로 돌아가서 사장직을 사퇴하고 헌납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성사장은 이렇게 해서 설득되었다. 성사장 이외에도 관련이 있는 인물을 차례로 불러들여 조사를 진행했다. 그 다음은 이병철씨의 큰아들 이맹희씨를 불러들였다. 당시 이맹희씨는 동생인 창희보다 경영술이 없었던지 요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차남 창희는 밀수사건의 책임을 지고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를 불러들인 것은 이병철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사실 이 맹희씨는 한비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도 구실을 만들어 불러들인 것은 이병철씨에게 심리적인 압력을 넣기 위한 공작의 일환이었다. 큰아들, 작은아들이 한비 문제로 곤욕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비료공장의 국가헌납을 빨리 결정할 것 같아서였다.죄없는 사람을 괴롭힌다는 죄의식이 나의 가슴에 가득 들어찼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고, 후회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양심의 가책 속에서도 맹희씨를 불러들인 것은 국가임무를 수행하는 정보공작 기술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감찰실에 불려온 이맹희씨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맹희씨의 안면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윽!”평생 매를 맞아본 일이 없는 맹희씨는 한 대의 따귀 세례를 받자 안면 근육이 굳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었다. “남의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인사도 없이 웃으면서 들어오는 놈이 어딨어. 넌 누구냐!” “이맹희입니다.”

“재벌의 아들이면 그래도 되는 거야. 아무데서나 돈이면 통하는 줄 알아. 오늘은 돈으로 다 된다는 생각이 착오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미리 조사한 수사자료를 들척이면서 맹희씨는 한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속담처럼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들어설 때 안면에 가한 따귀 한 대의 효력은 대단했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를 떠나 보낼 때쯤은 가까운 사이처럼 여겨지게 해 주었다. “당신에게 잘못이 없는 줄 잘 압니다. 이병철 회장의 잘못 때문에 당신을 불러온 것입니다. 당신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하게 된 것은 미안하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맹희씨를 데려와서 조사한 것은 조사의 파급효과를 얻기 위한 공작의 일부였다. 그가 돌아가서는 “아버지 때문에 죄없는 나까지 혼났다”고 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병철 회장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라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며칠 후였다. 이번에 호출할 사람은 이병철 회장이었다. 예비 공작이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확인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 회장을 반도호텔로 불러냈다. 거물 재계인사인 만큼 남산본부로 호출하는 것을 피했다.나는 반도호텔에 먼저 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회의실 문이 열렸다.비서가 문을 열었다. 뒤이어 이회장이 들어왔다. 이회장의 인상은 특이한 상이었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원숭이상 같은 특이한 상이었는데, 이병철 회장 역시 범인과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시정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범한 상은 아니었다. 타임머신을 과거에서 현재로 끌어오면서 현존시킨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솔직한 표현이다.

“어서오십시오. 저는 정보부 감찰실장입니다. 오늘 이같은 자리에 모시게되어 죄송합니다.”"한비가 계속 말썽이 된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회장은 겸손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회장 앞에서는 수사하는 자세나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를 부르기 이전에 여러 사람을 불러 정보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회장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다”는 말을 서두에 꺼내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형욱 부장의 명령으로 이회장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국민 앞에 약속한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모셨습니다.”
“직원들을 통해서, 방실장의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에서 뵙기를 원하기 때문에 한비 주식의 국가헌납을 빨리 실행하시길 권합니다.”
“알았습니다. 곧 결정을 짓겠습니다.”

상황판단에 예민한 이회장은 정보부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서 몇 마디를 더했다.

“회장님께 국민의 여론이 어떤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들어주시겠습니까? 회장님 측근들은 좋은 말만 전해드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의 발전을 위해 제 얘기도 들어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어떤 말이든지 듣겠습니다.”
“저는 정보와 여론 수집차 민중 속에 뛰어드는 시간이 많습니다. 이회장님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대단합니다. 시내 아이스크림점을 도산케 하고, 골동품에 투자하며, 외국에서 소모품만 수입해서 돈을 벌어 우리나라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매판 자본가라는 비난이 시내에 쫙 퍼져 있습니다. 다시 혁명이 일어나면 종로 네거리에 끌어내어 처단해야 한다는 말까지 떠돌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비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생산업에 손대셨는데,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져 삼성의 이미지가 더욱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런 여론은 중앙매스컴을 아무리 동원해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들입니다.”

이회장은 들어올 때 얼굴에 감돌았던 온화한 미소를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방실장의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이회장을 반도호텔로 호출한 나의 임무는 그렇게 끝났다. 이회장이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삼성간부를 호출했다. 이회장의 결심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한비헌납을 약속하다

며칠 후 정보부 부장실에서 이회장을 만났다. 이회장이 김형욱 부장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김부장은 이병철씨와 만나서 아래와 같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다시 공식적으로 수사를 재개하고 이를 이병철측에 알렸다. 이삼일 후 이병철로부터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이병철 씨, 당신 양심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명색 재벌이라는 사람이 아이스케키 장수까지 서슴지 않아 중소 빙과업자들을 도산시키는 행위도 기업윤리로 보아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내 사무실에 들어와 앉자마자 나는 이병철에게 쏘아부쳤다.

“죄송합니다.”

“한번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했으면 사나이의 약속을 지켜야 할 것 아니요.”

“그럼 저는 무얼 먹고 삽니까?”

“이것 보아요. 재벌 이병철 회장이 그까짓 비료공장 하나 쯤으로 망해버릴 만큼 기반이 어수룩하단 말이오? 그러기에 정부에서는 완전헌납을 마다하고 주식의 반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아량을 보이지 않았소. 사카린 밀수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 아니오?”

“저도 사실은 박대통령 각하에게 정치자금을 ×억 원이나 바쳤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억울합니다.”

“×억 원을?…… 그게 억울하면 대통령 각하에게 가서 따지시오. 나는 다만 법에 의해 수사를 재개하여, 한국비료공장 건설에 얽힌 전모를 밝힐 수밖에 없소이다.”

“그것만은 참아주십시오. 주식의 반을 국가에 바치겠습니다.”

“정말이오?”

“진심입니다. 결심했습니다.”

“그럼 좋소. 내일 곧 장기영 부총리에게 가서 절차를 밟으시오. 국가에 바치는 것은 어떤 특정개인에게 정치자금을 헌금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오. 귀하가 밀수와 매점을 통해 국민의 호주머니로부터 긁어모은 돈을 다시 국민의 손에 돌려준다고 생각하시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 부탁이오. 이사장이 버는 것을 내가 배 아파서 하는 말이 아니오. 돈을 벌더라도 정당하게 버시오. 말하자면 기업윤리를 좀 지키라는 충고요. 재벌이면 재벌답게 굵직한 기간산업을 하도록 하시오.”

“…….”

다음날 그는 한국비료공장 주식의 반을 국가에 헌납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병철 회장으로서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비를 끝으로 장기영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직에서 해임된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다. 이 시비로 엉뚱한 사람도 피해를 보았다. 서울 문리대생과 법대생이 밀수규탄 데모를 벌이다가 처벌을 받았는데,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총장 유기천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어 결국 유기천은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한비의 국가 헌납은 이렇게 이뤄졌다. 삼성이 정보부의 내사를 받고 있을때 그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회장으로서는 정보부의 내사보다 자체 내의 반란이 더 가슴아팠을 것이다.삼성의 시카린 밀수사건은 계속해서 유명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국무위원석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 의원도 비록 의원직을 사임했지만, 역사 속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박정희씨를 끝까지 규탄한 장준하씨는 사카린 사건을 추궁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왕초’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재벌과 함께 밀수를 했다고 폭로했다. 박대통령은 밀수왕초로 규정한 장준하씨는 결국 명예훼손으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나에게 따귀를 맞은 이맹희씨는 그후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한비를 빼앗긴 이병철씨는 나를 향해 일본말로 “고쓰이 오도꼬(교활한 사나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세계 최대 비료공장 한비를 빼앗긴 이회장은 다음과 같이 소감과 견해를 말하고 있다.

≪”한비의 나의 소유주(전체의 51%)를 모두 정부에 기부하는 절차를 밟았다.소유주의 51%를 채우기 위해서, 동방생명과 마찬가지로 보험사업의 장래를 계획하여 매입하였던 동양화재보험의 내 소유주와 현재는 한진빌딩이 서 있는 서울 중심부의 일등대지 등을 방매까지 하여 소요자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틀림없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다. 국가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내 손을 완성시켰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또한 역경 속에서도 용하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을 가누어 시종 정심정념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기위안을 했던 것이다.”≫

비료공장을 지어놓고 국가에 빼앗긴 이회장은 빼앗겼다는 분한 마음으로 실의에 잠기지 않고 오히려 노련한 경영인답게 공장 건축의 실적을 선전하고 활용했다. 첫번째 선전이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가진 대대적인 축하 리셉션이었다.

≪”준공식을 마치고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성대한 축연을 열었다. 한비 건설에 협력해준 일본 재계 인사들에게 진정으로 사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한비건설에는 일본측 계약당사자인 미쓰이(三井)물산을 필두로 하여 IHI·신호제강 등 일본의 유력 기계 메이커 1백 60개사가 참여하였으며, 여기에다 하청업체까지 합치면 능히 4백개사는 넘었다.

이처럼 많은 기업을 동원하여 총 18만 톤이나 되는 기계·장치류를 질서정연하게 제작 조립해가는 작업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으로서도 종전 후 처음 다루는 큰 프로젝트라고 한다.그것을 미쓰이물산과 우리가 서로 협동하여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하물며 당초 계약공기 40개월을 18개월로 단축시켰던 것이다.

파티에는 일본 관동지방의 재계 정상급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5∼6백명이나 되는 내객들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참으로 놀랍다’고 한결같이 치하해주었다.이나야마, 미즈가미, 안도, 야스니시씨 등 이번 프로젝트에 지도적 역할을 해준 재계의 정상급 20명은 이튿날 따로 신바사의 신성요정에서 대접하고 사의를 표명하였다.”≫

한비사건은 삼성그룹에 쓰디쓴 시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의 결론처럼 한국의 농촌발전에 꼭 필요한 커다란 비료공장 하나를 완공해 낸 업적을 남겼다.밀수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공장의 가동으로 외화를 절약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으로 보면 국가에 공훈을 남겼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사건이 한장 진행될 때 삼성 내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회장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비사건은 파란많던 나의 생애에서도 더할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이러한 비탄의 와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적으로 신임했던 한 간부사원이 이 사건 때문에 삼성이 파산하는 줄만 알았던지 나를 배반했다. 인장을 맡긴 것을 기회로 삼성 재산의 3분의 1을 횡령했던 것이다. 추궁했더니 반환했지만 어이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한 간부사원은 삼성을 만드는데 반은 자기 노력이 있었다고 하면서 삼성 재산의 절반을 요구하는 웃지못할 일까지 있었다.”

삼성의 최대 강점은 인적재원

삼성이 정치바람의 열풍에 시달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생존해온 비결은 인재가 많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회장은 사람을 불러쓰는 용인술에 능란한 기업인이다.

“한국 내에서 삼성이 가진 인적 재원을 다른 기업이 추종할 수 없을 것이다”는 말은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당업·반도체업·언론문화사업·전자산업·세일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한국 최대의 인적 재일의 그룹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의심나면 채용을 안하고, 일단 채용하면 믿어주는 이회장의 용인술이 삼성을 지켜왔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이회장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사업은 자금과 계획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첫째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나 누구든 아무일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보다는 건강하고 정직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를 택했다.또 역량이 있어야 하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갑자기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꾸준한 인재 양성을 통해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은 지금까지 인재양성에 중점을 두어 왔고, 앞으로 삼성이 존재하는 한 이 노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흘러가고 언젠가는 역사만 남는다. 내 자신이 삼성에 끼친 죄과도 많았음을 이 기회에 시인하면서, 용서를 빈다. 끝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한국 현대사에 남을 거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솔직한 고백이다.

* 브레이크뉴스 서울경기 http://kiss.breaknews.com 문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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