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의 판단이다. 최근 러시아발 곡물대란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2007∼2008년 곡물 수출국들이 수출을 금지·제한하면서 밀·콩·옥수수
가격이 두세 배씩 뛰고 동남아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던 ‘글로벌 애그플레이션’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다. 사실 수급을 놓고 보자면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현재 세계 밀 재고율은 26%로 2년 전(20%)보다 높고, 세계 밀 수출의 14%를 담당하는 러시아가 수출금지 조처를 취했지만 최대 수출국인 미국(18%)이 세계 모든 결손을 채우기에 충분한 생산 전망을 내놓으면서 시장에 비교적 안전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 농무부 장관은 “우리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다”라며 입이 벌어졌을 뿐이다. 또한 밀은 다른 곡물과 달리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EU·캐나다·호주 등으로 세계 교역 물량이 골고루 분산되어 있어 위험성은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6월 초부터 8월 초까지 두 달 동안 밀 가격은 60% 이상 폭등했다. ‘비밀’은
거기에 있다.
삼성선물의 임호상 연구원은 “투기 요인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6월 초부터 밀 가격의 상승을 기대한 투기세력들이 대대적인 매수를 시작하면서 가격 상승을 주도했다고 분석했다. 시세 차익을 노린 ‘핫머니’가 곡물시장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러시아가 수출금지령을 발표(8월5일)하기 두 달 전부터 이미 투기세력들은 정보력을 발휘해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 식량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곡물 메이저들이 러시아 정부에 엄청난 로비를 해댔다는 루머는 시장
거래자들 사이에서 이미 통설이다. 러시아로서는 일거양득이었다. 수출금지령이 내려지면 이전
계약을 취소하고 가격을 다시 올려 받을 수 있으니 좋고, 국내적으로는 수급 안정에 기여해 여론을 다독일 수 있었다.
러시아와 달리 ‘서방 눈치’를 봐야 하는 우크라이나는
공식적인 수출제한 조처 발표를 8월 말로 미루기는 했지만 사실상 한 달 전부터 수출 제한 상태였다는 게 수입업자들 얘기다. 수출 라이선스나 입출항 허가서 발급을 미적거린다든지 곡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철도나 차량 운송을 금지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몸값이 뛴 미국은 이미 북새통이다. 국내 사료 물량의 3분의 1을
공급하고 있는 농협사료의 이태웅 외자구매부 차장은 “미국의 사료용 밀 가격이 40~50% 올랐다고 하지만 사실상 가격이 없다는 편이 맞는 말이다. 살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미국 내 수출 엘리베이터(곡물의 저장·선별·유통 설비)가 꽉 차서 수요가 있어도 실어 나를 수 없고, 유통비용인 ‘베이시스’(수송비·반출입비·보관료·금리·보험료 등)도 100%가량 뛰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경우 선행구매분이 6개월치 확보되어 있어 당장 소비자물가에 반영되지는 않겠지만 현재 곡물시장의 가격 상승분은 올해 말, 내년 초에 반영될 공산이 크다.
폭발물에 기름을 붓다식량부족 사태는 ‘온갖 요소가 집약된 재난’이다. 이미 곡물시장은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이는 곧 투기가 발흥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토양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기본적으로 곡물은 필수 재화이기 때문에 자국 내 소비가 먼저다. 따라서 일반 상품과 달리 교역량의 비중이 낮다. 중국이 전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이지만 수입국 처지인 게 바로 그렇다. 자동차의 소비량 대비 무역량은 44%이지만 밀과 옥수수 등의 국제 교역량은 10%대에 불과하다. 특히 쌀이 심한데 5∼7% 수준이다(옥수수와 밀은 거의 100% 수입하는 우리나라가 쌀만은 자급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생산과 소비에 작은 교란 요인이 발생해도 가격이 크게 요동치는 곡물시장을 그래서 ‘얇은 시장(thin market)’이라 부른다. 곡물은 또한 공산품처럼 비싸다고 소비를 미루거나 줄일 수 있는 품목이 아니기 때문에 수요탄력성도 매우 낮다. 여기에 더해 4대 곡물 메이저 회사(카길·ADM·벙기·LDC)가 세계 곡물 교역량의 80%를 장악하고 있어 식량은 이미 ‘무기화’된 상황이다.
그나마 완충 구실을 해왔던 건 재고율이었다. 흉작과 같은 공급의 불안정한 요소가 발생하더라도 재고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가격 파동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재고율이
감소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25%를 상회해왔지만 2003년에는 18%로 뚝 떨어졌다.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과 소비패턴이 달라지면서 곡물 수요가 급증한 이유도 있지만 옥수수 등을 연료로 쓰는 이른바 바이오 연료의 증가가 결정타였다. 식량위기를 초래했던 2008년 곡물가 상승의 75%가 바이오 연료 때문이었다는 세계은행 비밀 보고서가 폭로되면서 추측은 사실로 굳어졌다.
워낙 취약한 곡물시장을 투기꾼들의 ‘난장’으로 만든 건 부시 미국 대통령이다. 2007년 부시 대통령은 바이오 에탄올 등 재생가능연료를 앞으로 10년 안에 지속적으로 늘려 자동차용 가솔린 소비량을 20%가량 줄이는 ‘20 in 10’ 계획을 발표했다. 옥수수 가격은 급등했고 다른 곡물들도 연쇄적으로 반응했다. 미국뿐 아니었다. 이미 중국도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과잉재고 처리 목적으로 바이오 연료 생산을 늘렸고 유럽연합이나 브라질 등 남미 곡물 수출국도 가세했다. 에너지와 곡물의 결합을 통해 곡물의 공급이 과잉에서 부족으로 전환되는 곡물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지속된 글로벌 유동성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먹잇감을 찾던 금융자금이 유입되기에 좋은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실수요자까지 가담한 거대한 투기 사슬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이후 금융시장이 불안해지자 금융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안정적 수익원으로 찾아낸 것이 원유·금·곡물과 같은 원자재였다. 첨단금융 기법으로 무장한 이들이 시장의 규모를 키우고 가격 변동폭을 키웠다. 원자재 시장은 이미 금융화되었다.” 국제금융센터 오정석 부장의 분석이다. 투기세력이 곡물 가격을 올렸다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데이터 분석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투기세력의 영향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의 선물옵션 부문에서 20∼30% 수준에 머물렀던 투기매수 비중이 200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증가해 50%에 육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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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Newsis 1898년 버터·달걀 거래소로 출발한 시카고상업거래소(위)는 2007년 시카고상품거래소와 합병하면서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 그룹으로 성장했다. |
곡물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투기세력을 자극했다. 단기·고수익을 목표로 치고 빠지는 헤지펀드뿐만 아니라 기관투자
가나 장기·안정 수익을 목표로 하는 인덱스펀드 투자자들까지 끌어들였다. 과거 곡물 가격은 거의 일정한 범위 내에서 변해왔기 때문에 기대수익이 제로(0)에 가까웠고, 장기 포트폴리오에 편입시킬 만큼 매력이 없었다. 대개 10년 단위로 풍작과 흉작이 반복되어왔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벌써 세 차례(2002~ 2003년, 2007~2008년, 2010년)나 기후 요인으로 인한 가격 불안이 초래됐고, 여기에 투기자본이 가세하면서 그 변동폭은 더욱 커졌다. 투기는 불안정성을 정말 사랑한다.
선물의 가격 상승이 현물 가격의 상승을 초래하자 현물 구매자들 역시 투기에 가담했고, 가격이 더욱 상승할 때를 기다리느라 구매한 현물을 풀지 않았다. 수요는 증가하고 공급은 부족한 상태가 더욱
강화되면서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결국 헤지펀드들이 주도한 투기는 실수요자들까지 끌어들여 거대한 투기 사슬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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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Newsis 2007〜2008년 글로벌 애그플레이션이 닥치자 필리핀 정부는 서민에게 쌀을 배급했다. |
세계 최대 곡물 거래소인 시카고상품
거래소가 만들어진 19세기 중반, 당초 목적은 농산물 가격의 안정이었다. 농산물을 수확할 때는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떨어지고, 또 그 반대의 상황이 반복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물’ 거래가 생겨났다. 가령 8월 수확을 전제로 1월에 미리 투자자와 협상을 해서 8월 확정 가격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다. 농민들은 현물이 아닌 선물이라는 ‘
가상의 상품’을 놓고 벌이는 계약을 통해 가격을 보장받으니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 부담을 투자자와 나눠 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선물거래가 일종의 ‘보험(hedge)’ 구실을 한 것이다. 하지만 실수요자가 아닌 투기자들이 가세하면서 정반대 상황이 되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선물’이 ‘위험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선물 상품의 계약이 이뤄졌을 때와 만기된 시점의 현물 가격 차이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놓고 ‘베팅’하는 투기 거품이 점차 커지고 있다. 자체 인공위성을 띄우고 직원들에게는 들판에 나가 낟알 개수를 일일이 세어오라고 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한 예측과 자체 정보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곡물 메이저 회사들. 이들에게 장악된 곡물시장에 금융자본이 가세하면서 무서운 시너지를 만들어낸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