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박테리아’에 구멍 난 병원 “올 것이 왔다”
출처 : 머니투데이 입력 2010.09.08 08:33
[머니투데이 최은미기자][병원 내 박테리아 감염 사고 '공공연한 비밀'..질병관리본부, "감시체계 세워야"]
일본에서 9명의 사망자를 낸 다제내성 아시네토박터균(MRAB)이 국내에서도 이미 발견돼 왔다는 기사가 나간 후 한 중년 남성에게서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부산에 사는 형님(59)이 지난 7월 고관절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무엇인가에 감염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제보자는 치료가 되지 않아 다른 병원으로 옮긴 후 ‘슈퍼박테리아’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의사가 “도대체 항생제가 듣지 않는걸 보니 슈퍼박테리아에라도 감염된 것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형님’은 항생제 쇼크로 기절까지 할 정도로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했다. 하지만 수술을 실시한 병원은 감염 사실을 부인했고, 유족들은 고인을 화장한 후 체념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얘기였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도 지난 6일 일본에서 발생한 ‘슈퍼박테리아(다제내성균, MRAB)’ 감염 사망 논란과 관련 “국내에서도 MRAB와 관련해 사망자가 지금까지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인도에서 시작된 ‘슈퍼박테리아’ 광풍이 일본의 중환자실 집단 사망 사건으로 이어지며 전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하자, 병원계는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병원 내 박테리아(세균) 감염사고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테리아가 체내에 침입하면 피를 썩게 만들어 ‘패혈증’을 일으키거나 폐에 염증을 유발해(폐렴) 제 때 항생제 등을 처방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항생제가 듣지 않는 ‘슈퍼박테리아’라면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사망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환자와의 의료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어 발생해도 “다른 합병증 때문”이라고 하거나 “지병이 악화된 것”이라고 둘러대고 ‘쉬쉬’하기 일쑤였다. 감염사고는 병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셈이다.
그 와중에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부산에서 있었던 연쇄사망사건. 부산의 모 성형외과에서 지난해 9월 9일과 16일 성형수술을 받은 환자 2명이 잇달아 세균감염성 패혈증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사건은 ‘연쇄사망’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지만, 대부분의 사고는 원인을 밝히기 어려워 묻혔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감염사고는 분명 존재한다. 질병관리본부와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가 전국 57개 종합병원 중환자실을 대상으로 병원감염률을 수집해 분석한 결과, 2008년 7월부터 2009년 6월까지 1년 간 3287건의 세균감염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 재원일수 1000일 당 병원감염 발생률은 같은 기간 7.56%로 2004년 11.95%, 2005년 9.64%, 2006년 7.74%, 2007년 7.18%로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지만 미국의 경우 3~5%에 불과하는 점에 비춰볼 때 아직 높은 수치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보건당국은 감염사고로 인한 사망자 보고체계도 마련하고 있지 않다. 병원 내 감염은 지병이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 되는 만큼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권준욱 질병관리본부 전염병관리과장은 “집단발병사례라면 모를까 개별사례를 일일이 다 조사해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며 “특히 중환자실 감염사고는 지병이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사망한 것인지 밝혀내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엄연히 감염사고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발병한 게 아니라면 환자들 힘으로 원인을 밝혀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억울한’ 환자들의 호소는 소비자단체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병원감염 관련 의료분쟁 실태(2001년~2007년 6월)’를 조사한 결과, 접수된 피해건수는 총 257건으로, 이 중 33건은 사망했고, 41건은 장애를 입었다.
특히, 제대로 감염관리 체계를 갖춰놓지 않은 의료기관들이 최근 척추 및 인공관절 수술과 미용성형수술에 대거 나서면서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성형외과 등에서 분쟁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뉴델리형 메탈로-베타락타마제(New Delhi metalo-beta-lactamase, NDM-1)’ 같은 슈퍼박테리아가 국내에 상륙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NDM-1′은 이미 이웃나라 일본까지 와 있는 상태다.
병원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염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시설을 뜯어 고치고 전문 인력을 확보하며, 의료진들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켜야 하는데, 투자액이 너무 커 엄두를 못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가시적인 수입증대에 기여하지 못하는 일인 만큼 의료기관의 자발적인 노력에만 기대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다.
모 병원 관계자는 “비용절감한다며 일회용품을 여러 환자들에 돌려쓰는 의료기관도 적지 않은 상황”이라며 “의료기관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
의료법도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300개 병상 이상의 종합병원은 병원 내에 ‘감염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감염관리실과 감염관리전담인력을 두도록 하고 있지만 강제조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들이 겸임하는 수준이라 관리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실정이라는 게 병원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보건당국이 2005~2007년 의료기관 평가대상병원 중 300개 병상이상 281개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관당 감염관리전담인력 평균 수’는 0.84명에 불과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오는 12월 말부터 슈퍼박테리아 감염병을 법정전염병으로 지정, 대형병원 50여곳을 중심으로 6종의 내성균 감염현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나타난 내성균에 대처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감시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