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기 서양으로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을 통해서 서양의 ‘위생’ 개념이 동아시아에 수입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岩倉 具視)를 단장으로 한 48명의 사절단은 1871년 12월 23일 요코하마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다. 이들은 워싱턴 DC,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고,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의학자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1838~1902)는 생명이나 생활을 지키는 개념으로서 독일어의 ‘Hygiene’이 사회기반의 정비를 포함하고, 국가와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서양에서 사용되고 있는 sanitation, health, Hygiene 같은 용어가 단순히 건강보호의 측면에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건강과 위생을 담당하는 행정기구의 사무범위가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가요 센사이는 이 행정기구가 “세상의 危害를 제거하고 국가의 복지를 완전히 하는 기구로서 유행병, 전염병예방은 물론, 빈민구제, 토지청결, 상하수도 설치․배수, 시가 가옥 건축방식부터, 약품․염료․음식물의 단속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 생활에 관계된 것은 모두 망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 행정기구를 번역함에 있어서 양생(養生), 의무(醫務), 건강(健康), 보건(保健) 같은 직설적인 단어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냈다. 그가 독일어 ‘Hygiene’의 번역어로 찾아낸 단어는 장자(莊子) 「경상초편(庚桑楚篇)」에 있는 ‘위생(衛生)’이었다. 이 단어는 그 자체로 고아( 高雅)하고 발음도 나쁘지 않기 때문에 ‘Hygiene’의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松本順自傳․長與專齋自傳, 東京 : 平凡社, 1980, 133-134쪽, 139쪽)
나가요 센사이가 ‘Hygiene’의 번역어로 수용한 ‘위생’이라는 개념에는 서양에서 근대국가가 성립되면서 형성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적극적인 개입을 시행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笠原英彦, 日本の醫療行政, 慶應義塾大學出版會, 1999, 32-33쪽)
나가요 센사이는 1874년(메이지(明治)7년) 일본 문교부 의무국장에 취임했으며, 도쿄의학교(현재의 도쿄대(東京大) 의학부)의 교장을 겸했다. 같은 해 도쿄사약장(東京司薬場, 국립의약품 식품위생연구소의 전신)을 창설했다. 1875년에 의무국이 내무성으로 이관되면서 위생국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초대국장으로 나가요 센사이가 취임하였다. 그는 콜레라 등 전염병의 유행에 대비하여 위생공사를 추진하고, 위생사상의 보급에 진력하였다. (http://ja.wikipedia.org/wiki/%E9%95%B7%E8%88%87%E5%B0%88%E9%BD%8B)
일본의 메이지 시기 나가요 센사이에 의해 ‘Hygiene’의 번역어로 도입된 ‘위생’ 개념은 조선 말 우리나라로 수입되었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한 조선은 1877년 1차 수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김기수의 ‘일동기유’에는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 동래에 머물러 있을 때 일본측으로부터 전해 받은‘성내(城內)’에서 금지조항 28조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성내’에서는 오물투기, 가옥 앞의 청소, 오수의 준설, 분뇨처리, 방뇨장소 등에 규칙을 마련하고 이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김기수 일행은 얼마 후 실제 일본에 도착하여 도로, 하수도, 변소 등 위생관련 시설들의 상황과 관리실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돌아왔다.
고종은 1881년의 총 64명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메이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법, 교육, 군사 등의 제도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일본 내무성 산하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박영효는 수신사로 일본에 다견되었는데, 당시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옥균과 치도(治道)의 시행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치도략론(治道略論)”과 “치도략칙(治道略則)”을 작성했다. 그 내용에는 분뇨수거, 도로정비, 방화대책 등의 위생에 관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1883년 1월 한성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고, 순경부(巡警部)를 창설하였다.
1884년 한성순보에는 「만국위생회(萬國衛生會)」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위생을 “이미 발생한 병을 치료”하는 醫療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모든 병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한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위생사업은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며 국가를 튼튼하게 하는 참된 법”으로 칭송받았다.( 「萬國衛生會」, 漢城旬報, 1884. 5. 5.)
1894년 갑오개혁으로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이 설치되었고 ‘경무청관제’가 새행되어 위생관련 업무를 경무청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메이지 일본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 서양의 위생개념은 국가 공권력의 개입을 통해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참고]
‘위생(hygiene)’의 어원은 그리스어 휘게이아(Hygeia)이다. 히게이아는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의아들인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의 딸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에피오네와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다. 두 명의 아들은 마카온(Machaon, 외과의사)과 포달레이리오스(Podalirius, 내과의사)이고, 5명의 딸은 휘게이아(Hygieia, 위생), 이아소(Iaso, 의학), 아케소(Aceso, 치유), 아글레이아(Aglæa, 건강한 혈색), 파나케이아(Panacea, 만병통치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