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구제역] 영국 구제역 통제의 역사적 뿌리, 1839-2001

영국 구제역 통제의 역사적 뿌리, 1839-2001


애비게일 우즈 / 김명진 역

* 출전: Abigail Woods, “The Historical Roots of FMD Control in Britain, 1839-2001,” Martin Döring and Brigitte Nerlich (eds.), The Social and Cultural Impact of Foot-and-mouth Disease in the UK in 2001: Experiences and Analyses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9), pp. 19-34.


- 이 글은 내 책 Woods(2004)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도입


2001년 영국 구제역 유행은 많은 점에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질병의 빠르고 광범위한 확산은 이내 농수산식품부(Ministry of Agriculture, Fisheries and Food, MAFF)가 지닌 통제 능력을 벗어났다. MAFF는 가축의 이동을 금지하고, 수출을 중단시키고, 농촌 지역을 폐쇄하고, 감염된 가축들의 추적, 파악, 도살, 처분을 위해 수의사들을 급파했지만 이 모든 노력은 무위에 그쳤다. 대안적 통제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관리들은 백신 접종을 선택하지 않고 ― 백신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불안정하며 국제무역에서 장기간에 걸친 불이익을 받는다는 이유로 ― 살처분을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감염된 농장과 인접해 있는 농장의 모든 가축들은 살처분되었고, 스코틀랜드와 컴브리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질병 발생 농장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양들도 살처분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둘러싼 논쟁, 그것이 농촌공동체에 미친 경제적․사회적․심리적 영향, 살처분한 가축 수(1천만 마리로 추산되는)가 한데 모여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Anderson 2002).


  그러나 지나간 역사에 비추어 보면 2001년 구제역 유행은 덜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영국은 1839년에서 1886년 사이에 이미 구제역이 풍토병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때 이후 1968년까지 영국에서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해는 거의 없었고, 1922-24년, 1951-52년, 1967-68년에는 대규모 유행이 있었다(그림 1). 2001년 유행이 경제적 손실이나 살처분한 가축 수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긴 했지만, 발생 건수에서 보면 1967-68년 유행 때가 더 많았고, 확산된 범위에서는 1922년에 필적할 만한 정도였으며, 2001년 데번과 컴브리아에서 질병의 강도는 1923-24년과 1967-68년의 체셔 유행 때 경험했던 것과 비슷했다. 이 질병에 대한 농촌의 경험은 세월의 흐름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로 구제역 통제를 위한 MAFF의 접근법이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39년에 처음 등장한 이후 30년 동안 구제역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19세기 말에 제정된 다수의 법령들이 이후 한 세기 이상 계속 유지된 대처 방안들을 만들어냈다. 질병이 돌고 있는 지역에서는 가축의 이동이 금지되었고, 처음에는 감염된 가축들을 격리해 두기만 했지만 20세기 초부터는 감염된 가축 및 이와 접촉한 가축들에 대해 강제 살처분이 내려졌다(Anon. 1965: 134-151). 이러한 정책을 비판하면서 가능한 대안을 논의하는 목소리가 20세기에 있었던 대규모 구제역 유행 때마다 나타났고, 이에 대해 MAFF 관리들은 매번 일단의 동일한 논거를 들어 기존의 정책을 옹호했다. 치사율은 낮지만 구제역은 전염성이 매우 크고, 감염된 가축들에서는 고기와 우유 생산이 장기간 감소해 비용 손실이 나타나며, 구제역 청정국들이 부과한 국제무역상의 제한조치 때문에 추가적 비용 손실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을 구제역 청정국으로 유지해야 할 경제적 필요성이 존재하며, 기존의 정책은 이를 성취하는 가장 저렴하고 빠른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위에서 제시한 짧은 역사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답변은 아래에서 제시될 것이다. 구제역이 법률적 개입의 대상이 된 것은 어떤 상황 하에서였는가? 정책 선택을 형성한  요인에는 어떤 것이 있었으며, 그것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한 정책이 구제역 유행 기간 동안 때때로 실패를 경험했고 실행가능한 대안도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책이 20세기 내내 계속 유지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구제역에 대한 사회문화적 프레이밍(framing)에 관해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 구제역에 대한 경험들은 어느 정도로, 또 어떤 방식으로 2001년의 인식과 대응을 형성했는가? 나의 분석은 찰스 로젠버그가 정의한 질병 프레이밍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지닌 생물학적 영향과 무관하게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질병은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에 대응함으로써 그 질병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합의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프레이밍은 ‘생물학적 사건, 그것에 대한 환자와 의사들의 지각,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인지적․정책적 이해를 얻어내려는 집단적 노력’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데 일조한다(Rosenberg, 1992: xiii, xvi).


  이 글은 구제역에 대한 19세기 중엽의 반응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구제역을 가볍고 통제불가능한 질병으로 여겼던 초기의 프레이밍이 어떻게 영국에서 제거해야 하는 무서운 동물 전염병이라는 확신으로 점차 대체되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대체로 초기의 가축병 통제 법령이 빚어낸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령은 구제역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인식을 재형성했고, 구제역에 새로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의미를 부여했다(Woods, 2004a). 시간이 흐르면서 구제역에 대한 19세기 말의 프레이밍은 이 질병의 임상적․역학적 성질을 자명하게 반영한 결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구제역에 대한 19세기 말의 프레이밍은 일견 과학적인 근거, 점차 커지는 역사적 권위, 심화되어 가는 정치적․국가주의적 함의 등에 의해 확신을 얻은 농무부 관리들에게 수용되고 옹호되었고, 20세기에 제기된 다양한 도전들에 맞서 살아남았다. 이 글의 주장은, 2001년까지 이러한 낡은 프레이밍이 담론과 정책에 계속 영향을 미쳐 왔고, 그 때문에 구제역을 순전히 농업 문제가 아닌 농촌 문제로 다시 프레이밍하려는 노력이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은 구제역이 임상적․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심리적 차원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통제 수단은 살처분이 아닌 백신 접종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림 1> 영국의 구제역 발생 건수, 1870-2001



기원: 구제역에 대한 19세기의 프레이밍


구제역은 영국에서 1839년에 처음 등장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는 구제역의 본질과 통제 방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는 왕립농학회의 노력을 낳았다(Sewell 1841). 그러나 얼마 안가 구제역은 풍토병으로 자리를 잡았고 관심은 수그러들었다. 익숙하고 일상적인 사건으로 대다수의 농부들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구제역은 별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Fleming 1869). 역사적인 설명들은 초기에 구제역이 무시된 것을 무지 때문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Smith 1933; Anon. 1965). 그러나 실상 역사적 맥락에 놓고 보면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구제역에 대한 반응들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이었다. 19세기 농부들 중 회계 장부를 기록하거나 생산성에 신경을 쓰는 이는 거의 없었다. 질병이 수시로 유행했고 대부분의 가축들은 최적의 건강 상태에 있지 못했다(Perrin 1978). 따라서 잠시 나타났다 지나가며 치사율도 낮은 질병인 구제역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된다. 구제역이 장기간에 걸쳐 고기와 우유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눈에 띄지 않은 채 넘어갔다. 농부들은 구제역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Sewell 1841), 구제역이 대다수의 다른 질병들처럼 특정한 대기 조건 하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믿음 ― 세균 이론이 나오기 전에 널리 퍼져 있었던 ― 을 신봉하고 있기도 했다(Worboys 2000). 이 때문에 그들은 구제역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대체로 갖고 있었다(Select Committee 1857, 1864).


  구제역에 우려를 표시한 것은 우수 품종의 가축을 키우는 부유한 귀족 계층의 사육자들뿐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우수 품종의 가축들은 일반 가축에 비해 더 심한 증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런 가축들은 더 좋은 보살핌을 받았고 건강과 복지 상태도 좀더 면밀한 감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가축 소유주들은 구제역이 장기간에 걸쳐 미치는 임상적 영향(과 비용 손실)을 이내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구제역을 법률적 해법을 필요로 하는 심각한 질병으로 다시 프레이밍하려는 운동 ― 1860년대에 수의사 존 갬지에 의해 시작된 ― 을 지지했다. 감염된 가축의 이동을 제한하는 법안이 1864년 의회에 제출되었으나, 이는 의회에서 다른 농부, 가축 상인, 도시 주민들을 대표하는 의원들에 의해 강력하게 저지되었다(Simonds collection 1863-64; Hansard 1864; Select Committee 1864; Fisher 1979-80). 이는 부분적으로 그 법안이 근거하고 있는 구제역에 대한 관점이 대다수의 농촌 주민들에게 이질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몇몇 핵심 교의들을 위협했다. 국민의 자유에 대한 믿음, 사유재산의 신성성, 시장에 대한 불간섭 등이 그것이었다(Fisher 1993; Hardy 1993: 268).


  구제역과 그 통제 방안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65-67년에 소의 질병인 우역(牛疫)이 유행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전염성이 매우 크고 치사율이 높은 이 질병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계속 확산되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자유방임 성향을 접고 광범위한 법률적 통제 수단을 도입했다. 우역은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하는 질병이 되었고, 정부에서 임명한 검사관에게는 사유재산에 출입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으며, 감염된 가축 및 이와 접촉한 가축들은 살처분되었고, 가축의 이동이 제한되었으며, 감염 국가들로부터의 수입은 금지되었다. 이런 조치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가축 질병의 통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의 타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대중의 여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Anon. 1965: 13-21, 125-34; Worboys 1991; Fisher 1993). 여기에 더해 논평가들은 비슷한 통제 수단의 도입이 구제역의 발생도 크게 감소시킬 수 있었을 거라는 지적을 사후적으로 내놓았다(Editorial, Veterinarian 1867). 이는 구제역이 예전에 가정되었던 것보다 좀더 예방가능한 질병이며 법률적 개입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구제역은 1869년에 제정된 동물전염병법(Contagious Diseases of Animals Act)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구제역은 가볍고 대수롭지 않은 병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구제역은 감염된 가축이 시장이나 장터에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상대적으로 경미한 통제만 받았다(Hansard 1869).


  새로운 법이 구제역의 확산을 제한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내 분명해졌다. 이어 추가적인 조치의 가능성이 정치인, 농부, 가축 상인, 수의사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핵심 쟁점은 좀더 엄격한 통제 조치가 그에 수반되는 비용을 상회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견해는 둘로 나뉘었고 신랄한 논쟁이 장기간에 걸쳐 이어졌다. 그러나 좀더 광범위한 통제 조치들이 필요할 뿐 아니라 정당하기도 하다는 관점이 점차 대세를 점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논쟁 과정이 구제역에 대한 인상을 강화시켜 이 질병의 확산 방식과 임상 경과에 사람들이 주목하게 함으로써, 감염에 따른 생산성 감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구제역이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하는 질병이 되면서 구제역의 전국적 발병 건수와 그에 수반된 비용 손실이 알려진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Select Committee 1873, 1877; Lords Select Committee 1878).


  좀더 엄격한 통제 조치에 대한 지지는 1878년에 또다른 동물전염병법의 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구제역을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문제에 비추어 바라보게 되었다. 가령 질병 통제가 가져올 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최대한 피할 수 있는가가 그런 문제였다. 구제역 감염 국가들로부터의 수입에는 엄격한 통제가 가해졌고, 시장과 장터는 폐쇄되었으며, 감염된 가축은 농장에 격리되었고, 가축의 이동은 그 주변의 ‘감염 지역’ 전체에서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취해진 결과, 이제 구제역은 대체로 별 것 아닌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대신 구제역은 농촌공동체 전체에서 전통적인 사회적, 상업적 생활 패턴을 교란시키는 지리적 현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구제역은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구제역을 근절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법령에 대한 추가적인 지지를 만들어내었다(Veterinary Department 1881, 1882, 1884-85). 1884년에 최종적으로 강화된 수입 규제 조치는 바라던 효과를 만들어냈고, 1886년이 되자 영국은 거의 50년만에 처음으로 구제역 청정국이 되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구제역의 침입은 해외로부터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발생한 구제역이 빠른 속도로 제압되긴 했지만,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정도로 놀라움을 자아내었다. 이러한 새로운 맥락 속에서 감염된 가축의 살처분 ― 이전 시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치 ― 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감염된 가축을 격리할 때보다 질병을 더 빨리 근절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였다. 정부에서 가축 값을 보상해 주는 살처분은 처음에 수의담당 관리들의 재량에 따라 적용되었다가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살처분 방법의 활용은 19세기 말에 형성된 구제역 프레이밍에 대한 보증수표와도 같았다. 구제역은 이제 가볍고 친숙하며 대체로 무시되어 온 병이 아니게 되었고, 대신 무서운 동물 전염병이자 엄청난 비용 손실을 초래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로서 광범한 국가적 통제 수단들을 이용해 영국에서 근절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구제역의 새로운 프레이밍은 이 병의 임상적 심각성과 역학적 성질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수반했지만, 과학은 이런 변화를 가져온 원동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앞서의 설명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구제역의 새로운 생물학적․사회적․경제적․심리적 의미는 대체로 초기에 우역, 나중에는 구제역 그 자체를 통제하기 위해 적용되었던 법률적 조치들이 빚어낸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 점에서 구제역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의 산물이었다.


중대한 도전: 1922-24년 유행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구제역의 프레이밍에 대해 확립된 합의는 정부의 통제 정책이 효과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20세기의 첫 20년 동안 구제역의 침입은 간혹 발생했지만 빠른 속도로 제압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영국은 40년만에 가장 심각한 두 차례의 구제역 유행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일년 중 가장 바쁜 가축 거래 기간 중 하나인 1922년 1월에 터졌다. 초기에 발생한 구제역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감염된 가축들이 연이어 시장과 장터를 옮겨 다니면서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농수산부(Ministry of Agriculture and Fisheries, MAF)는 뒤늦게 시장을 폐쇄하고 가축의 이동을 제한했다. 수석수의관(Chief Veterinary Officer)인 스튜어트 스톡먼의 지휘 하에 수의 검사관들은 구제역 발생 보고를 추적하면서 감염된 가축의 살처분을 조직하고 정부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전에 쓰던 격리 정책은 값이 비싼 우수 품종의 가축들에게만 적용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보상액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구제역을 근절하는 데는 여덟 달이 걸렸고, 이 기간 동안 1,140건의 구제역 발생에 대응해 56,000마리의 가축이 살처분되었다(Chief Veterinary Officer 1923).


  1년 후 두 번째 유행이 덮쳤다. 다시한번 감염은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고, 공식적인 질병 통제 기제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미처 대처하지 못한 증례들이 쌓이면서 질병은 더욱 더 확산되었고 살처분한 가축 수도 빠르게 늘어났다. 1923년 8월부터 1924년 5월까지 2,691건의 구제역이 발생해 거의 30만 마리에 달하는 가축들이 살처분되었는데, 발생 건수로는 영국 구제역 유행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수치였다. 이 유행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체셔 지방에서는 1,700건의 구제역이 발생해 체셔에 있던 전체 가축의 1/3에 달하는 51,031마리의 낙농 가축들이 살처분되었다. 타격을 가장 심하게 입은 지역에서는 60퍼센트 가까운 농장들에서 가축이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Chief Veterinary Officer 1924).


  두 차례의 유행, 그 중에서도 특히 후자는 구제역에 대한 MAF의 접근법에 대해 광범한 의문 제기를 불러왔다. 비판자들에는 농부(특히 체셔 지방에 사는), 가축 상인, 의학 및 수의학 전문직 구성원들이 포함되었다(Woods 2005). 그들은 수석수의관이 기존의 구제역 정책을 계속 지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정책은 질병의 확산을 막는 데 실패했음이 분명하며 이제 자신들이 속한 지역공동체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질병이 덮칠지 모른다는 공포심 속에서 살아가는 문제를 얘기하면서, 가족과도 같던 가축들이 모조리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때의 슬픔과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영영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MAF 소속의 수의사들이 방문하기를 기다리면서 구제역의 전체 임상 경과를 지켜본 몇몇 농부들은 구제역이 가볍고 잠시 나타났다 지나가는 질병이며, 따라서 격리가 좀더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라는 주장을 폈다(Evidence to Departmental Committee 1922, 1924; Crewe Chronicle 1923-24; Cheshire Observer 1923-24).


  그러자 수의학계와 농업 지도자들, 농무부 관리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스톡먼이 반격에 나섰다. 그는 구제역에 대한 19세기 말의 프레이밍에 근거해, 이 질병이 영국에서 근절되어야 하는 무서운 동물 전염병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이러한 프레임을 인공적 산물이 아니라 구제역의 역학적, 임상적 특성에 대한 자명한 반영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제역이 그 확산 능력과 가축 생산성에 대한 미치는 해로운 영향 때문에 잠재적으로 농업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감염된 가축을 살처분해 더 많은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구제역의 확산 방지와 근절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이 국가 경제에 주는 이득은 특정 개인들에게 미치는 손실을 훨씬 상회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판자들은 구제역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기적인 이유에서 국가 전체를 희생시키며 자기 소유의 가축들의 목숨을 보존하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살처분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구제역이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는 사실을 설명해 보라는 압력을 받자, 스톡먼은 (2001년에 정부 관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를 농부들의 탓으로 돌렸다. 농부들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었다(Evidence to Departmental Committee 1922, 1924; Crewe Chronicle 1923-24; Cheshire Observer 1923-24).


  질병의 상황이 더 나빠지자, 살처분한 가축 수와 폭증하는 보상비에 놀란 정부는 살처분 정책에 대한 지지를 거의 접을 뻔했다(Cabinet Committee 1923). 그러는 동안 체셔의 농부들은 점점 더 말을 듣지 않게 되었고 의무사항에 협조하는 경향이 점점 감소했다. 농부들이 자발적으로 질병의 증례를 신고하고 질병과 관련된 제한 조치를 따르지 않는다면 통제 노력이 분명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깨달은 스톡먼은 대안적인 방법을 논의하는 데 동의했다. 이 문제를 놓고 농부들의 투표가 있은 후, 그는 감염된 가축에 대해 제한적인 수준에서 격리를 허용하는 쪽으로 양보를 했다(Crewe Chronicle 1923-24; Cheshire Observer 1923-24).


  만약 살처분 반대 캠페인이 그 동력을 계속 유지했다면 영국과 전세계에서 구제역 통제의 역사는 오늘날 매우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질병 발생 건수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반대 운동은 수그러들었다. 구제역은 임상적으로 가벼운 질병이기 때문에 경제적․사회적․심리적으로 많은 비용을 수반하는 통제 정책을 사용할 만한 것이 못된다며 구제역을 다시 프레이밍하고자 했던 농부들의 노력은 정당성을 잃었고 살처분 정책은 복권되었다(Crewe Chronicle 1923-24; Cheshire Observer 1923-24; Departmental Committee 1924-25). 이 정책이 살아남아 결국 성공을 거둔 것은 그것이 구제역에 대한 영국의 대응에서 중심적인 무기로서 갖는 권위를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새로운 확신을 부여받은 스톡먼의 후임자들은 이후 나타난 모든 유행에 대해 이 정책을 예외없이 적용했다. 그들은 이 정책이 농촌공동체에 끼친 고통은 무시하면서, 스톡먼이 확립한 담론적 개념틀을 빌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즉, 구제역 그 자체의 본질이 살처분에 의한 통제 정책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백신 접종의 요구: 1951-52년


구제역을 둘러싼 다음 번의 대규모 논쟁은 1951-52년에 걸쳐 오랫동안 지속된 유행과 연관해 나타났다. 좀더 규모가 큰 유럽 차원의 유행에서 파생된 이 유행에서는 12개월에 걸쳐 600건의 구제역이 발생해 85,000마리의 가축이 살처분되었다(Chief Veterinary Officer 1952). 이는 1922-24년의 유행들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지만, MAF가 질병을 다룬 방식에 대해 의회와 언론에서 불만이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비판은 몇몇 유럽 국가들이 이제 구제역에 대한 백신 접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주로 기술적 실패에 기인한 이유로 백신 접종은 유럽에서 구제역의 확산을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 접종은 유행의 규모와 그에 수반된 비용 손실을 줄여 주었다(News clippings 1952).


  1951년 이전에 영국 대중 가운데 구제역 백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 과학자들은 2차대전기에 있었던 유행 이후 백신 접종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를 수행해 왔는데(FMD Research Committee 1938-42), 이는 MAF가 품고 있었던 우려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일(이후 냉전기에는 공산 국가들)이 구제역을 생물학 무기로 사용해 살처분 방법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대규모 유행이 나타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관리들은 ‘평화시’의 구제역 발생에 대해서는 이전에 그랬듯 살처분이 최선의 통제 정책이라고 계속해서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과학자들의 활동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백신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대중의 소요가 빚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Cabot 1939; Ministry of Agriculture 1951-52; Ministry of Defence 1951-52; Balmer 1997; Skinner 2000). 1951-52년 유행 때 유럽에서 흘러들어온 소식은 이러한 전략을 허사로 만들었다. 비판자들은 단지 백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적용이 정당화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고, 살처분에 대한 MAF의 계속된 믿음에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News clippings 1952).


  수세에 몰리게 된 MAF 관리들은 구제역 과학자들, 수의학계 및 농업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아 살처분 정책에 대해 으레 하던 정당화를 보완하는 새로운 일련의 논거들을 제시했다. 백신 접종은 과학적으로 결함이 있고 경제적으로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구제역 발병 건수에 대한 국가별 통계치를 들어 살처분이 백신 접종보다 더 효과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살처분은 비용이 적게 들뿐더러 더 안전하기도 했다. 백신을 접종한 가축들은 완전히 면역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에 걸려서 이를 다른 가축에 전염시킬 수 있었다. 구제역 감염 여부를 알아챌 수 있는 특징적인 증상들을 보이지 않은 채로 말이다. 뿐만 아니라 백신 접종은 어린 가축, 양, 돼지에게는 효과가 없었다(Ministry of Agriculture 1952; News clippings 1952). MAF가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과학적 근거를 다소 과장한 측면은 있었지만(Galloway 1952; Departmental Committee 1953-54: 50), 이런 주장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설득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관리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 그들이 백신 접종의 과학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MAF의 주장은 오직 더 폭넓은 사회-문화적 개념틀 속에서만 이치에 닿는 것인데, 비판자들은 그런 틀 자체를 신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MAF가 선호했던 통제 정책은 구제역 통제에 대한 온정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구제역은 국익을 위해 근절되어야만 했고, 이 목표는 오직 중앙 정부가 고안하고 비용을 지불하며 수의담당 관청에서 집행하는 전국적인 의무 정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정책의 성공은 농부들의 일사불란한 순응 여부에 달려 있었고, 농부들은 국익을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해야만 했다. 따라서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 획득은 계몽된 행정가, 효율적인 수의사, 지적이고 헌신적인 농부들이 살고 있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국가임을 드러내는 증표였다. 이는 구제역이 창궐하는 유럽 국가들보다 영국이 더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국가들에서는 살처분 정책에 대한 지역적 저항 때문에 더 열등한 정책인 백신 접종이 어쩔 수 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백신 접종은 그 과학적 결함 때문에 감염을 근절하지는 못한 채 단지 확산을 막을 수만 있을 뿐이었다(Evidence to Departmental Committee 1952-54).


  MAF의 비판자들은 구제역을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프레이밍했다. 그들은 구제역을 국가 경제의 문제가 아닌 지역공동체와 가축 소유주 개인의 사회적, 심리적, 경제적 문제로 보았다. 그들은 ‘획일적인’ 통제 정책을 중앙에서 부과하는 것에 반대했고, 가축 소유주들이 자신들의 개인적 내지 지역적 이해관계와 부합하도록 자기 돈을 들여 자신이 소유한 가축들에 백신을 접종할 권리를 갖기를 원했다. 백신 접종이 구제역을 완전히 근절하는 데는 효과가 없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질병이 언제 덮칠지 모른다는 농부들의 불안감을 줄여 주는 데는 유익했다. 과학에 대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낙관주의와 신념이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던 그들은 백신 접종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현대적 기술로 바라보았다. MAF가 최신의 과학적 진보를 거부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통제 조치들을 계속해서 선호하는 것은 그것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영국이 유럽에 비해 열등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News clippings 1952; Villiers 1952).


  구제역에 대해 이처럼 매우 다른 사회-문화적 프레이밍 때문에 논쟁은 결코 해소되지 못했다. 대신 1922-24년 때와 마찬가지로 구제역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논쟁은 자연히 수그러들었다. MAF의 살처분 정책은 살아남았고, 이후 열린 구제역 유행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백신은 현장에서 사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개발되지 못했다는 MAF의 주장을 확인해 주면서 추가적인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가 구제역에 대한 MAF의 관점을 완전히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조사위원회는 백신 접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과학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앞으로 기술 진보가 이뤄지면 결국에는 백신이 살처분 정책을 대체할 거라고 가정했다(Departmental Committee 1953-54). 이를 본 MAF 관리들은 크게 놀랐고, 위원회의 보고서가 미래의 백신 접종 요구를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장관들에게 조심스러운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위원회의 입장은 . . . 우리가 질병 통제에 사용하는 방법의 일부로 백신 접종을 포함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Dunnett 1955).


MAFF의 사고 전환: 1967-68년


다음 번 대규모 유행은 1967년 10월에 미들랜즈 북서부에서 시작되었다. 다시한번 인력과 물자의 부족이 질병을 통제하려는 농수산식품부(MAFF)의 노력을 가로막았고, MAFF는 군대에 조력을 요청해야 했다. 8개월 후 유행이 끝날 때까지 2,228건의 구제역이 발생해 45만 마리의 가축들이 살처분되었다. 이전의 그 어떤 유행보다도 훨씬 더 많아진 살처분 가축 수는 농장의 대형화 경향과 더욱 집약화된 사육 방법을 반영한 결과였다. 체셔 지방이 다시한번 유행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곳에서만 1,021건의 구제역이 발생해 사육하던 소의 1/3을 잃었다(Committee of Inquiry 1968-69; Hughes and Jones 1969; Whitlock 1969).


  구제역에 포위된 지역공동체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은 언론에 종종 보도되었지만, 이전에 있었던 유행들과는 달리 그런 고통이 살처분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캠페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부 농부들이 백신 접종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보내긴 했지만, 거의 모든 기자와 정치인들은 전통적인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Daily Telegraph 1967; Chester Chronicle 1967). 이처럼 논쟁이 없었던 것은 최근들어 구제역 상황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대체로 살처분 정책에 힘입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백신 접종은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위험한 방법이라는 MAFF의 계속된 주장이 먹혀들면서, 사람들은 이제 ― 1952년에 그랬던 것처럼 ― 백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곧 백신 접종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백신 접종은 계속해서 정치적 의제에 남아 있었는데, 그 동력은 일반 대중이 아닌 MAFF 자체로부터 나왔다. 점점 악화되는 질병 상황에 직면한 MAFF의 수의사들은 체셔 지방에서 살처분 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사태를 우려했고, 이를 보완하는 링 백신 접종[구제역이 발생한 농장을 중심으로 고리 모양의 지역에 예방적 차원에서 백신을 접종하는 것을 말한다 ― 옮긴이]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대한 양보를 의미했다. 그 이전에는 생물학전 공격의 위협을 받았을 때를 빼면 관리들이 영국의 구제역 통제에서 백신 접종에 정당한 역할이 있음을 인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준비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MAFF는 해외에서 수백만 마리분의 백신을 사들였고, 이를 배포하고 접종할 준비를 했다(Ministry of Agriculture 1967; Christie et al. 2003). 그러나 공개석상에서 MAFF는 살처분 정책에 대한 확신이 더욱 침식될 것을 우려해 상황의 심각성을 깎아내렸다. 백신은 여전히 ‘제2선 방어’ 내지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될 ‘비상 대책’이었다(Hansard 1967; Ministry of Agriculture 1967).


  살처분 정책은 때마침 구제역의 발생 건수가 줄어들면서 다시한번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리들이 품고 있던 확신이 흔들렸다. 대중의 여론이 1967-68년 유행의 재연을 용납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MAFF는 백신 접종을 예비 조치로 남겨 두는 데 동의했다. 구제역 유행에 대한 조사위원회의 권고사항에 따라 MAFF는 비상 계획을 수립하고 백신 은행을 설립했다(Committee of Enquiry 1968-69; Ministry of Agriculture 1968-69). 그러나 관리들은 정책 변화의 전망에 대해 깊이 불만족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무게를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고, 앞서 설명한 이유들 때문에 그들이 백신 접종에 대해 품은 반감은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백신 접종이 위험하고 불확실한 방법이라는 MAFF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인 농부들이 접종에 반대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Carnochan 1969; Reid 1969). 이에 따라 그들은 백신을 접종하기로 한 사상 유례없는 결정을 하나의 기술적 실행이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그 역사적 사건 밑에는 ‘감정적인 저류(低流)가 흐르고 있어 적어도 10년 동안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터였다(Ministry of Agriculture 1969).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2001년


MAFF의 비상 계획은 한번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1967-68년 유행이 끝난 후 구제역은 영국에서 사라졌고, 20세기 동안 단 한 차례 다시 나타났으나 이 때의 작은 유행은 손쉽게 제압되었다. MAFF가 구제역을 마침내 격퇴했다는 확신을 점차 갖게 되면서 이 질병에 정통한 수의사와 농부들은 줄어들었고 구제역의 통제에 경험이 많은 세대의 MAFF 관리들은 은퇴했다. 그러나 구제역에 대한 19세기의 프레이밍은 변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이로 인해 2001년 예기치 못하게 이 질병이 다시 나타나자, 이는 전통적인 담론적 개념틀 속으로 즉각 흡수되었고 동일한 통제 정책으로 대응이 이뤄졌다.


  2001년 유행이 막 시작되었을 때, MAFF 관리, 수의사, 농부들에게 있어 살처분 방법을 써서 구제역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이 질병의 전염성과 그에 수반되는 비용 손실이 그런 행동을 요구했고, 이 방법은 과거에 여러 차례 잘 작동한 바 있었다. 그들은 살처분 정책이 과학적으로 정의된 구제역 바이러스 대응책이 아니라 19세기 사회, 정치, 경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구제역의 대규모 유행을 근절하기 위한 역사적 노력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농업과 농촌 및 전지구 경제에서 나타난 변화가 21세기의 질병 유행에 대처하는 능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이 없었다(Anderson 2002).


  시간이 흐르면서 질병 발생 건수가 계속해서 증가하자 살처분 방법의 활용에 점차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구제역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1922-24년 이래로 거의 달라진 바가 없었고, 그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농부들은 MAFF가 구제역을 농업과 국가에 대한 경제적 위협 ― 살처분이라는 수단을 써서 제압해야 하는 ― 으로 프레이밍하는 데 도전하고 나섰다. 그들은 무시무시하게 치솟은 살처분 가축 수를 부각시켰고, 구제역이 단지 농업에 대해서뿐 아니라 모든 농촌 이용자들에 대해 끼친 사회적․상업적․심리적 비용 손실을 지적했다. 그들은 이러한 비용 손실이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용된 정책에 의해 초래된 것임을 깨닫고, 대안적인 통제 방법인 백신 접종을 지지하는 로비에 나섰다.


  MAFF는 지난 50년 동안 써먹었던 것과 동일한 살처분 지지, 백신 접종 반대 논거로 대응했다. 그들은 백신 접종에서 있었던 상당한 과학적, 기술적 진보와 1967-68년 유행 때 관리들이 백신 접종에 부여했던 역할을 무시한 채, 백신 접종에는 살처분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고, 과학적 결함 때문에 백신 접종은 효과가 없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며, 백신 접종은 영국에서 구제역을 결코 근절할 수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여기에 더해 백신 접종에 대해서는 살처분 정책과 달리 많은 점이 알려져 있지 않고, 국제무역 규정 하에서 더 장기간에 걸친 수출 금지를 감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House of Commons Library 2001; Warmwell 2001; Anderson 2002).


  구제역 통제에 얽힌 국가주의적 정서의 표출은 줄어들었지만, MAFF 관리들은 여전히 백신 접종이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7-68년 이래로 백신 접종은 서유럽에서 구제역 유행을 종식시켰다. 그러자 서유럽 국가들은 1991년부터 백신 접종을 중단하기로 ― 그 중 일부 국가들은 마지못해 ― 합의했는데, 이는 새로운 유럽연합 내에서 무역 규정을 서로 일치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살처분과 구제역 청정국 지위의 추구는 EU 전체의 정책이 되었다(Rees undated). MAFF의 관점에서는 영국이 이전까지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 ―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그만둘 것을 종용해 온 ― 방법에 의지하는 것은 중대한 후퇴를 의미했다. MAFF는 유행이 끝날 때까지 백신 접종에 대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고, 대신 질병의 확산을 막는 수단으로 살처분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사태가 종식된 후 MAFF의 뒤를 이은 환경식품농업부(Department for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 약칭 Defra)가 앞으로 있을 유행에 대한 통제 방안에서 백신 접종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긴 했지만, 대대적인 살처분은 여전히 의제에 올라 있다(Campbell and Lee 2003).


  결국 2001년 구제역 유행기에 나타난 행동과 담론에는 역사가 분명 강력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질병과 되풀이해 조우한 경험은 구제역에 대한 19세기 말의 프레이밍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구제역은 전염성이 높고 임상적으로 심각한 질병이며, 농업과 국가에 많은 손실을 안겨주는 재난이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입증된 중앙 감독형 살처분 정책을 써서 근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설명한 구제역을 둘러싼 논쟁들이 잘 보여주듯이, 이러한 프레임은 과학이 아니라 빅토리아 후기 영국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은 대안적 방법에 비해 자명한 우수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농무부가 발휘한 수사적 기술과 정치적 힘 때문이었다. 농무부는 이러한 프레임을 공격으로부터 지켜냈고, 그 속에 국가주의적 정서를 불어넣었으며, 수의사와 가축 소유주들에게 그것이 갖는 가치를 설득했다. 그래서 2001년에 이르자 그것이 가진 권위는 너무나 커져서, 심지어 ‘세계 최악의 구제역 유행’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구제역을 다시 프레이밍하려는 반대자들의 노력 ― 구제역을 경제적 함의뿐 아니라 사회적․심리적 함의도 갖는 좀더 폭넓은 농촌 문제이자, 인간의 복지와 가축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백신 접종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로 보고자 했던 ― 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처럼, 미래로 가는 길을 지시할 수도 있다. 구제역이 불변의 과학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의 산물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역사는 이 질병과 그 통제 방법에 대해 오랫동안 유지된 가정들을 다시 형성하는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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