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유가 110弗 넘을수도
출처 : 한국경제 입력: 2011-02-07 17:48 / 수정: 2011-02-08 04:21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20736521
이집트 사태가 지속될 경우 국제유가가 올 상반기에 배럴당 11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7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마드 알 아티키 쿠웨이트 최고석유기구 이사는 “유가는 올 상반기에 배럴당 110달러에 이를 것”이라며 “이집트의 정정불안이 계속되면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은 세계 원유 소비량의 3분의 1을 생산한다.
이집트는 자체 석유 수출 규모는 미미하지만 이집트가 관리하고 있는 수에즈운하와 카이로 인근을 지나는 수에즈~지중해 송유관의 폐쇄가 국제원유 시장에서 매우 큰 리스크로 지적되고 있다.
수에즈운하는 하루 150만~200만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고 수에즈~지중해 송유관도 매일 100만배럴의 원유를 실어 나른다. 세계 하루 원유 소비량의 3%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수에즈운하가 폐쇄돼도 우회 운송로를 통하면 되는 만큼 유가 폭등은 일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아티키 이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유가가 생각보다 빨리 110달러를 넘어서면 6월 정례회의 이전에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OPEC 장관들은 오는 22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국제에너지콘퍼런스에서 원유 생산 정책에 대해 토론할 예정이다.
김태완 기자 tw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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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역사]
인류는 기원전부터 메소포타미아·터키 등에서 석유를 사용해왔다.『구약성서』에도 노아의 방주 표면에 방수용으로 아스팔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전 400년 경에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공격할 때도 방화용 기름을 화살촉에 묻혀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13세기 경에는 미얀마나 카스피해 연안 등에서 원시적인 채굴도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세기에 스페인 탐험가들이 쿠바, 멕시코, 볼리비아, 페루 등의 신대륙에서 지상에 노출된 기름을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대륙 탐험의 붐이 한창이던 1556년에 독일의 광물학자 아그리콜라(Georgius Agricola)는 ‘석유의 정제와 회수에 관한 책’을 저술하면서 석유(petroleum)라는 말은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바위나 돌을 뜻하는 페트라(Petra)와 기름을 뜻하는 올레움(Oleum)을 합성하여 석유(petroleum)라는 합성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의 생활에서 석유가 진정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유전을 개발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 기관차, 비행기 등이 발명되자 석유는 인류 문명의 필수불가결한 자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석유가 들어왔을까?
정확하게 언제 누구에 의해 석유가 들어왔는지, 석유라는 말을 누가 제일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구한말 일본을 통하여 석유가 도입되기 전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서에 석유라는 단어가 먼저 등장하고 있다.
이덕무는『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 65권「물산(物産)」의 ‘광물’조에서 “석유(石油)가 월후(越後, 에찌고)의 촌상(村上, 무라가미) 근처 산기슭에서 샘물에 섞여 나는데, 그 고장 사람들이 풀(草)로 떠서 항아리에 담아 두고 등유(燈油)로 쓴다. 근강(近江 오우마)의 율본군(栗本郡, 구리모도 고오리)에서 연토(燃土, 석탄)가 나므로 산과 들을 파서 채취하는데, 흙덩이가 흑색이며 땔나무를 대신한다.”고 기술했다.
최한기는『기측체의(氣測體義)』(1836년) 제 2권에서 ‘여러가지 물과 불’을 설명하면서 석유를 언급했고, 이규경도『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9세기 중엽)「물리소지(物理小識)와 직방외기(膱方外紀)에 대한 변증설」에서 석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석유(petroleum)’를 처음 체험한 사람은 1876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기수로 추정된다. 그는『일동기유(日東記游)』제 3권의「물산(物産) 26칙」에 “기름은 고래고기의 기름을 뽑아서 만들기도 하고, 또는 나무의 액체를 뽑은 것도 많았다. 요사이는 모두 석유(石油)를 쓰고 있는데, 기름을 뽑는 방법은 미처 듣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한편 1881년(고종 18)에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간 이헌영은 요코하마항(橫濱港)에서 일본인 통역관 하야시(林又六)에게 세관 업무에 관한 질문을 하던 중에 ‘석유(石油)’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석유(石油) 한 가지 물품만으로도 족히 일본을 멸할 수 있습니다. 일본 나라 안에서 산출되는 석유는 이것을 60주(州)에 분배하면, 사흘 동안 쓸 것에 불과합니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양이 백만에 이르고 있으니, 그 값이 은으로 거의 1천 7~8백만 냥이 됩니다. 일본은 종래에 채자유(菜子油)를 써 왔으며, 나라 사람들이 쓰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석유는 값이 헐하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 : 이헌영,『일사집략(日槎集略)』(人),「문답록(問答錄)」)
하야시는 석유의 수급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헌영이 하야시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는 태평양전쟁으로 현실화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이 노골화되자 미국이 경제봉쇄조치의 일환으로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중단하였다. 일본은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인도네시아와 그 주변의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남방자원지대’로 분류하여 침략했다. 일본은 성공적인 남방침략을 위하여 ‘진주만 기습’과 ‘필리핀 공습’을 단행하였다. 석유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헌영이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시기를 전후로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석유(石油)’라는 말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884년 5월 5일에 발간된『한성순보』제20호에는「지유정천(地油井泉)」라는 기사를 통하여 석유를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미국 사람이 처음으로 유정(油井)을 채굴하여 크게 이익을 올리게 되자 이때부터 유정을 다투어 개발”했으며, “이 기름이란 게 값이 싸면서도 불빛은 매우 밝기 때문에 각국 사람이 다투어서 이 지유(地油)를 구매하였으며 별명을 석탄기름”이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891년에 스콧(James Scott)이 편찬한 영한사전인『English-Corean Dictionary』에는 ‘Kerosene’의 번역어로 ‘셕유’가 등재되어 있다. 1895년에 출간된 표제어를 한글로 쓰고 한자로 뜻을 풀이한 대역사전인『국한회어(國漢會語)』에도 ‘석유=石油’라는 표제어가 있다.
또한 석유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도 사용되었다.『고종실록』32년(1895년) 11월 14일 경술에는「반역 음모죄인 박선, 이주회, 윤석우 등에 대한 판결 선고서」에는 “手로 軒端에 曳至야 劍으로 後에 黑衣로 卷야 石油로 灌야 至於火라(손으로 달비채를 휘어잡고 난간 끝까지 끌고 가서는 검으로 가슴을 찌른 후에 검은 빛깔의 천으로 말아서 석유를 치고는 불태워 버렸다.)”는 대목에서 ‘석유’가 범행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유’는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의『서유견문』이나 1897년에 발간된 게일(Gale)의『한영자전』, 그리고 황현의『매천야록』에도 등장한다. 또한 1904년 10월 6일자『대한매일신보』의 전쟁관련 기사와 1906년 4월 30일자『독립신문』의 사건 기사에도 ‘석유’가 주요매개체로 등장한다. 구한말에는 주로 미국과 러시아에서 석유를 수입했으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진출한 석유회사는 미국의 석유회사인 스탠다드 석유회사라고 한다.
구한말 이후 석유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세계석유협회(World Oil Trade)가 2002년 9월말을 기준으로 낸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4위의 석유수입국이다. 우리나라는 석유의 전량을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수입의존도가 10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