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돼지 생매장? 인간 수십억 ‘살처분’ 시점 다가온다!”
[인터뷰] 생매장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돼지의 음울한 예언
프레시안 기사입력 2011-02-25 오후 6:18:14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225141920&Section=03
지난 석 달간 한국의 보통 사람들은 소, 돼지 수백만 마리가 단지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매장되는 현장을 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아직 죽지 않은 소, 돼지가 살겠다고 몸으로 쏟아지는 흙을 피하며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소, 돼지를 불판에 구우면서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눌지 모른다. “앞으로 쇠고기, 돼지고기 가격 좀 오르겠는걸.” 어쩌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밑에는 고기 냄새를 맡고 달려온 개,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비비며 고기 한 점을 기다리고 있을 테고.
소, 돼지의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신문, 방송을 통해서 지켜보던 이들 중 몇몇은 (소, 돼지만 먹지 않는) ‘채식’을 선택한 자신의 결심이 “옳았다”며 주저하는 지인들에게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던 그의 젓가락에는 참치회가 들렸을 수 있고, 술자리가 끝나고 나면 그는 쇠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을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이런 모습에 메스를 들이댄 책이 잇따라 나왔다. 제목부터 노골적이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할 헤르조그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김선영 옮김, 살림 펴냄).
이런 책을 만약에 이번에 생매장된 소, 돼지들이 읽는다면 어떻게 말할까? ‘프레시안 books’는 어렵게 지난 11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최초로 생매장됐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돼지 한 마리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경북 모처에서 은신 중인 그 돼지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자세한 정보는 생략한다. 그 돼지는 자신을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역겹고’ ‘더럽고’ ‘우둔한’ 돼지?
프레시안 : 그 아비규환에서 어떻게 탈출했습니까?
소크라테스 : 운이 좋았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축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주인을 비롯해 축사에서 일하는 이들의 표정이 부쩍 상기돼 있고, 수의사도 자주 오가고. 그러다 그날이 왔어요. 모든 돼지에게 (마취) 주사를 놓더군요.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어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 맞습니다. 생매장된 것이지요. 나를 짓누르는 흙도 답답했지만, 사방에서 압박하는 다른 돼지들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나랑 살이 닿은 아래에 있던 돼지 몇 마리는 차갑게 식은 게 이미 숨 막혀 죽었고요. 아,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다행히 맨 위 가장자리에 묻혔나 봐요.
침출수에 의한 토양 오염을 방지하려고 깔아놓은 비닐을 찢어서 지지대로 삼아서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버둥대다 포기하려던 찰나에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더군요. 살았다!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프레시안 : 많은 독자들이 돼지치곤 용하다, 생각할 것 같네요. 그렇게 발 빠르게 행동하다니….
소크라테스 : 뭘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돼지의 진짜 모습을 모릅니다. 사실 돼지는 사람들이 애지중지 기르는 개 따위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민해요. 미국의 한 대학의 연구를 보면, 돼지는 훈련을 시키면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어요. 코로 조이스틱을 움직이면서 80% 정확도로 타깃에 적중시키니까요.
3주밖에 안 된 새끼 돼지도 이름을 붙여 부르면 알아듣고 반응합니다. 또 같은 집단 내의 돼지를 서른 마리까지 구별하고, 또 친한 돼지, 싫은 돼지도 구분해요. 진창에서 구르는 돼지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은데, 땀샘이 없기 때문에 몸을 식히려는 것뿐이에요.
돼지가 얼마나 애민한지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는 바로 내 돼지 꼬리에요. (소크라테스는 돼지 꼬리가 잘린 상태였다.) ‘돼지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돼지가 서로의 꼬리를 물어서 끊어버리는 행동을 자주 보이니까, 태어나자마자 꼬리를 잘라버리는 거죠. 영문도 모르고 꼬리가 잘려나갈 때의 그 고통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육식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
프레시안 : 얘기를 듣고 보니, 같이 대화를 나눌 자격이 충분하네요. 잠시라도 무시했던 것 사과합니다. 본격적으로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수백만 마리의 소, 돼지가 목숨을 잃는 사태를 보면서, 한국에서는 드물게 ‘동물권(animal right)’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동물 보호 단체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해당 주제의 책 몇 권도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아주 강경한 목소리로 ‘육식주의(carnism)’를 고발합니다. 이 ‘육식주의’라는 말은 조이가 만들어낸 용어인데요. 그는 육식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보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갖는 신념 체계를 육식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조이는 이 책 전체에서 육식주의가 어떻게 유지되고 어떠한 폐해를 낳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물론 결론은 육식주의의 거부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 돼지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주장인가요? 그런데 도대체 그 빌어먹을 육식주의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던가요?
프레시안 : 조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동물과 그 고기에 대한 인식을 조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육식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인식을 조작하는 과정에 동원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이 등장합니다. 돼지에 ‘역겨운’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는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 한 예이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 돼지, 닭 등을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깔끔하게 포장된 모습으로 접하는 것도 이런 조작의 다른 예입니다. 조이는 만약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소, 돼지, 닭이 뒹굴다 도살·가공되는 모습을 사람들이 생생히 목격한다면 이처럼 육식이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예가 있습니다만….
소크라테스 : 네,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네요. 의미 있는 지적이지만 그렇게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 제임스 서펠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영향력 있는 연구로 유명합니다. 그가 1996년에 펴낸 책(In The Company of Animals)이 2003년에 국내에도 소개되었어요. <동물, 인간의 동반자>(윤영애 옮김, 들녘 펴냄).
이 책을 보면 조이가 언급한 그 왜곡의 수단을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절연(detachment), 은폐(concealment), 책임 전가(shifting the blame), 왜곡(misrepresentation), 이 네 가지가 그것입니다. 내용은 조이가 책에서 언급하는 것과 대동소이할 것 같아요.
앞에서 소개한 두 가지 예는 ‘왜곡’과 ‘은폐’입니다. 인간의 특성 중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돼지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은 왜곡의 대표적 수법이고, 보통 사람이 목축장이나 도축장의 끔찍한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은폐입니다. ‘절연’은 인간을 동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부각하고, 또 동물을 여러 범주로 나누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조이의 책에도 절연의 예가 나옵니다. 소, 돼지, 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재조차도 고통을 느끼는데도, 마치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며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부각하는 것이나,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먹을 수 없는 것’, ‘귀여운 것/역겨운 것’ 등으로 나눠서 한 쪽을 먹는다든가….
소크라테스 : 네, 책임 전가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어요. 하느님이 동물을 지배할(먹을) 권리를 주었다거나, 육식은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혹은 (사실은 육식을 하기 싫지만)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어쩔 수 없다거나 등이요.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돼지 입장에서는 참담할 뿐입니다.
대량 학살, 인권 침해…인간은 다른가?
프레시안 :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소크라테스 :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조작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네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다른가요? 2009년에 일어났던 용산 참사 후에 권력과 대중이 보인 모습을 살펴볼까요?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나서 경찰, 대중은 이런 말을 되뇄어요.
경찰 : “과잉 진압은 없었다.” (은폐) / “철거민이 뿌린 시너에 화염병 불이 붙어난 사고이므로 경찰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책임 전가) / “전국철거민연합과 같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근본 원인이다.” (절연) /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 세력의 체제 전복 시도다.” (왜곡)
대중 :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절연) / “겉보기와는 다르게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알겠어?” (은폐) / “전국철거민연합과 같은 과격 단체의 꾐에 빠진 자기들이 그런 일을 자초한 거나 마찬가지야!” (왜곡) /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질까?” (책임 전가)
왜 대중은 인권 침해와 같은 대량 학살을 외면하는지를 따져 물은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조효제 옮김, 창비 펴냄)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에서 코언은 20세기의 끔찍한 인권 침해 사건을 살피면서 대중이 진실을 ‘부인(denial)’하는 과정을 파헤칩니다. 코언이 해명한 그 과정은 앞에서 언급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공감의 그릇
프레시안 : 인간은 가망 없는 족속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소크라테스 : 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종끼리 끔찍한 인권 침해,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인간에게, 다른 종과의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아닌가요? 사실 나는 평소에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어요. 이번에 생매장을 당하고 보니까, 더욱더 확신이 드는데요.
안타깝게도 인간은 공감의 그릇이 아주 작은 것 같아요. 최근에 개,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가족처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개, 고양이 같은 동물에게는 좋은 일이지요. (물론 평생을 집에 갇혀 지내다, 한순간에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불행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개, 고양이를 아끼는 이들이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요?
나는 이런 애완동물에 대한 애정이 이웃에 대한 공감이 없어진 자리를 대체한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물론 동물만큼이나 이웃, 인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또 현실에서는 그 반대의 예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동물의 팔자가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인지 아나요?
프레시안 : 네, 오늘 같이 얘기를 나눠볼 또 다른 책인 할 헤르조그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 답이 나옵니다. 바로 히틀러가 지배하던 독일이었지요.
소크라테스 : 맞습니다. 1933년 히틀러의 독일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동물보호법을 제정했어요. 일상적인 동물 학대를 금지한 것은 물론이고, 닭에게 강제로 모이를 주는 행위, 가축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위도 금지했습니다. 어류를 죽이기 전 반드시 마취를 해야 하고, 바닷가재를 죽일 때도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니 정말 동물 세상이었지요.
히틀러와 나치의 동물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헤르만 괴링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동물은 유기체적 의미에서 생명체일 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고 지각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며,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고 충성심을 지닌, 애정의 대상이다.” “동물을 여전히 소유물로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버리겠다”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97쪽)
이 히틀러와 나치는 유태인이 기르던 애완동물 수천 마리를 안락사 시킬 때도 인도적 도살을 명했어요. 그러나 정작 유태인은 자기 애완동물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했지요. 강제 수용소에서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다가 죽었는지는 많은 기록이 있으니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를 권합니다!)
물론, 히틀러와 나치가 동물 애호가였다는 사실이 동물 보호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동물 해방>을 쓴 피터 싱어의 낙관적인 전망대로 인간의 공감이 가족, 민족, 인류 더 나아가 동물로까지 넓어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감의 그릇이 작은 것이야말로, 인간을 자기 파멸로 이끌 뇌관이 아닐까요.
인간의 역량
프레시안 : 인간의 전횡을 견제하려는 ‘신의 저주’처럼 들리네요. 그런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동물과의 관계를 성찰하고 행동하는 길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은 인간과 동물 간의 여러 가지 관계를 냉정하게 살피면서도 이런 변화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합니다.
예를 들자면, 육식주의를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프레시안>에서 연초에 채식 기획 기사를 내놓았는데, 큰 호응을 얻었고요. 물론 헤르조그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채식을 하는 이유가 꼭 신념 때문은 아닙니다. 건강 때문에 채식을 선택한 사람도 많지요.
소크라테스 : 사람과 같은 잡식 동물인 돼지 입장에서 기꺼이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나 역시 식물성 단백질뿐만 아니라 (온갖 동물에서 유래한) 동물성 단백질이 포함된 사료를 먹으면서 이렇게 단시간에 살을 찌웠으니까요.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잡식 동물인 사람이 채식만 하는 게 정말 문제가 없나요?
프레시안 : 사실 채식과 건강의 관계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조이는 (대개의 채식주의자가 그렇듯이) 아주 단호한 어조로 ‘채식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만, 진실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헤르조그가 최신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서 균형 있게 서술하고 있어요. 국내의 채식주의자들이 이 책의 7장을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연구 결과를 보면, 채식과 건강의 영향은 개인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그건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주변에도 채식을 해서 건강이 좋아진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채식을 해서 건강을 해친 사람도 있거든요. 심지어 고기를 섭취하고 나서야 오히려 건강이 좋아진 이도 많습니다. 헤르조그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고 있고요.
그러니 채식을 전파하겠다는 성급한 마음에 ‘채식=건강!’ 이런 구호를 외치는 일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역사상 존재한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지역과 상관없이 최소한 15% 이상은 육식을 해왔다는 지적이었어요. 즉, 진화 과정에서 효율적인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고기가 선택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나 진화의 경로가 그랬다고 해서 꼭 그렇게 살라는 법은 없으니…. 헤르조그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변화할 가능성을 낙관하는 편인가요?
프레시안 : 그렇습니다. 헤르조그가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채식주의자들이 보면 불편할 정도로 깐깐하게 온갖 불편한 사실(fact)을 들이대면서도 결국에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바꿔보려는 이들을 옹호하는 것도 그런 변화에 대한 지지겠지요. 독일의 지식인 틸 바스티안도 헤르조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은 여전히 인간의 식습관에 있다고 확신한다. 육식을 포기하는 것에는 많은 철학적-윤리적, 정치적-이유들이 있겠지만, 육식을 하지 않는 생활 방식이 (생명의 진화가 인간을 잡식성 동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가 그런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런 방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선택은, 이를 테면 지속 가능한 경제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나 몇몇 빈곤 국가들의 대외 부채를 즉각 면제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역량이다.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함께 사는 세상을 성찰할 줄 아는 존재, 바로 이러한 성찰력으로 인해 다른 모든 동물들과 달라진 존재의 역량이다.” (<가공된 신화, 인간>(손성현·박성윤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 47쪽)
재앙의 불씨
소크라테스 :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헤르조그나 바스티안은 현실이 어떤지 정확히 못 보고 있어요. 카산드라의 경고를 무시한 트로이가 참담하게 망했듯이, 때로는 비관론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입니다. 아까 인간이 가진 공감의 그릇이 작은 것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뇌관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지요?
그런데 실제로 육식이 그런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바로 식량 문제입니다.
프레시안 : 맞습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은 육식과 식량 문제의 관계를 제대로 짚지 않고 있어요. 최근에 나온 폴 로버츠의 <식량의 종말>(김선영 옮김, 민음사 펴냄)은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요. 로버츠는 에너지와 먹을거리의 문제를 함께 고려해 신뢰를 줍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구를 지킨다면서 채식을 한다는 사람이 있어요. 소가 내뿜는 메탄이 지구 온난화에 큰일이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몸에 좋다며 비행기로 운반해온 ‘물 건너온’ 유기농 채소를 고르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가 내뿜는 온실 기체의 양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지요.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합해서 사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 : 바로 먹을거리 문제가 그렇지요. 이제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2006년 전 세계에서 생산한 곡물 20억 톤(t) 중에서 3분의 1 이상이 소, 돼지, 닭과 같은 동물의 먹이로 쓰였습니다. 이 추세대로라면 2050년이 되면 세계 육류 수요가 4억6500만 톤으로 현재 수준의 두 배를 넘어서요. 그러면 사료용 곡물을 무려 10억 톤이나 더 생산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고, 토양 유실과 같은 이유로 농지가 황폐화되면서 식량 생산 여건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어요. 최근에는 옥수수와 같은 곡물을 자동차 연료로도 쓰고요. 이런 상황에서 소, 돼지, 닭에게 먹이려고 10억 톤을 더 생산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세계 도처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용인할까요?
인정을 해야 해요. 현재처럼 육류가 풍부한 미국식 식단은 지속 불가능합니다. 인류 전체가 미국 수준의 육류 소비(1년에 1인당 약 100㎏)를 한다면, 세계에서 수확한 곡물로는 단 26억 명만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인구의 40%, 2070년 인구 수 100억 명의 4분의 1에 해당합니다.
다른 가정도 비관적입니다. 이탈리아처럼 1인당 육류 소비가 미국의 80% 정도인 상황을 적용해도 단 50억 명만 먹여 살릴 수 있어요. 레스터 브라운에 따르면, 2070년에 예상되는 인구 100억 명을 살릴 수 있으려면 세계가 인도 수준(1년에 1인당 약 5.4㎏)으로 육류를 소비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수천 만 명의 인도인은 칼로리를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합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소크라테스 : 생매장 당했다 살아난 내게 인류가 살 방도를 묻는 건가요? (웃음)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곳곳이 조이의 표현을 쓰자면, 이미 육식주의에 포획되었어요. 수십 년간의 육류 소비에 길들여진 세계가 쉽게 ‘밥상 혁명’에 나설 가능성은 없습니다. 육식이 재앙의 불씨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아, 방도가 하나 있기는 해요. 이번에 소, 돼지에게 했던 방식을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입니다.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생매장한다든가, (동물만큼 장애인에게는 공감을 하지 않나 봐요!) 싱어가 제안하는 것처럼 영구 장애아를 안락사 시킨다든가…. 그러다 갈등이 생겨서 또 서로를 죽이고 죽이면 그 역시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프레시안 : 농담이 심하군요. 육식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부터 나서서 육류 소비 수준을 적당히 조정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정말로 혁명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소크라테스 : 혁명을 함부로 말하네요. 당장 당신부터 육류를 끊을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사실 축산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염두에 두면, 무조건 육식을 끊는 게 꼭 바람직한 일도 아니고요. 일이 이토록 꼬인 상황에서 과연 육류 섭취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식량의 종말’을 막는 혁명이 가능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 한 가지만 더 들게요. 미국에 사는 고양이 9400만 마리가 하루에 먹어치우는 고기의 양은 5400톤이에요(고양이 한 마리당 약 57g). 매일 닭 300만 마리가 고양이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동물 보호의 적?) 인도인 한 사람이 고작 1년에 5.4㎏의 고기에 만족할 때, 미국 고양이 한 마리는 연간 약 21㎏의 고기를 먹어요.
생각해 보세요. 미국이 이런 (시한부) 풍요를 포기하겠습니까? 중국, 인도 사람이 ‘우리도 (또 고양이도) 고기 좀 실컷 먹자’고 나설 때 과연 ‘너희는 안 돼!’ 하고 막을 도리가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바꿔보자, 이런 얘기는 한가하게 들리네요.
축사의 진창에서 사료만 먹던 내가 자연 상태에서 돼지의 원래 평균 수명인 20년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눈 똑바로 뜨고 이 인간이라는 종의 몰락을 지켜볼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상황이 안 좋으면 가족처럼 믿었던 걸신들린 주인에게 잡아먹힐 개, 고양이들이 불쌍하네요. 하긴, 인간이라는 믿을 수 없는 종에 의탁한 그들의 운명이죠.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말을 했어요.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과연 돼지 혹은 다른 동물보다 나은지 한 번 봅시다. 행운을 빕니다! 하하하!
이 인터뷰는 최근에 나온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식량의 종말>을 읽고 든 단상을 돼지와의 가상 대화 형식으로 꾸며본 것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같은 탈출 돼지가 전국 도처에 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강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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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는 싫은데 스테이크는 당기고…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할 헤르조그 지음·김선영 옮김/살림·1만8000원
동물에 대한 모순된 태도 분석
한승동 기자
출처 : 한겨레 2011-02-25 오후 06:59:40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65373.html
매일 쇠고기를 먹으면서 개고기 먹는 걸 혐오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60%의 “미국인이 동물들은 살 권리가 있다”와 “우리는 고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데에 모두 동의한단다. 어시장 연례행사에서 상인들의 죽은 생선 던지기를 보고 즐기면서도 죽은 고양이 시체를 그렇게 주고받는다면 기겁을 할 사람들이 많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키스까지 퍼붓는 사람이 모피 생산을 위해 밍크 항문에 전기충격을 가하거나 바다표범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치는 잔혹에는 어떻게 그토록 무감각할 수 있는지.
그뿐인가. 모피코트를 입고 고양이를 사랑스럽게 안고 가는 여성, 돼지고기는 거부하지만 고등어는 먹는 자칭 ‘채식주의자’, 훨씬 많이 자행되는 쥐 실험엔 침묵하면서 원숭이 실험 연구자에게만 테러를 가하는 과격 동물보호운동가, 투계를 잔인하다 비난하면서 닭튀김이나 치킨버거는 맛있게 먹는 사람, 7만마리의 닭을 희생시키느니 차라리 같은 고기양을 지닌 대왕고래 한 마리를 희생시키는 게 낫다며 고래를 먹자는 캠페인을 펴는 동물보호단체….
인간과 동물 관계 연구의 권위자인 할 헤르조그 웨스턴캐롤라이나대학 심리학과 교수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은 동물에 대한 인간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드러나는 이런 비일관성과 역설 뒤의 심리학, 동물 애호가나 보호론자들이 자신의 신조에 집착하면 할수록 일상생활에서 더 첨예하게 부닥치게 되는 도덕적 난관들을 흥미로운 사례들을 동원해 현란하게 파헤친다. 공리주의, 의무론, 인지부조화 등의 이론과 논리를 동원하고 풀어가는 솜씨가 마이클 샌델을 연상케 한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모순적 사고를 총체적으로 짚어보는 브레인스토밍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이렇다 할 결론을 딱 내리진 않는다. 아니 내릴 수 없을 만큼 “세상만사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게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내 목적은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에 속하는, 인간이 인간 아닌 생명체와 맺는 관계에서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도덕적 함의를 깊이 생각해보자는 데 있다.” 그리하여 고기를 먹는다며 부끄러워하고 자책하는 채식주의자들처럼 모순에 빠진 사람들이 위선적이라거나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괴로운 중간지대’에서 회색안경을 끼고 있는 게 대다수 인간이며, 그게 불가피하고 오히려 정상이며 인간인 증거라고 생각한다.
지은이가 드는 인류동물학의 뜨거운 쟁점 세 가지. 첫째, 돌고래 등 동물과 함께 놀고 교감하면 우울증이 치료되고 자폐증이 낫는다는 얘기가 옳은가? 둘째, 사람들은 자신이 키우는 개를 닮아간다는 얘기는 정말인가? 셋째, 어려서 동물을 학대한 아이는 결국 폭력적인 성인으로 자랄까? 첫째는 아니고 둘째는 맞고 셋째 또한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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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반성… “인간은 스님처럼 먹어야 한다” vs “인간 뇌가 커진 건 고기의 힘”
“인간은 스님처럼 먹어야 한다” vs “인간 뇌가 커진 건 고기의 힘”
韓, 1인당 연간 소비량 41.1㎏
베코프… 잔혹한 육식은 환경에도 재앙
헤르조그… 우리 안의 육식동물을 인정하라
조선일보 | 김수혜 기자 | 입력 2011.02.26 03:06 | 수정 2011.02.26 10:46 |
동물권리선언
마크 베코프 지음|윤성호 옮김|미래의창|320쪽|1만2000원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할 헤르조그 지음|김선영 옮김|살림|496쪽|1만8000원
작년 한 해 한국 인은 1인당 41.1㎏의 살코기를 먹어치웠다. 돼지고지(19.1㎏)·닭고기(10.7㎏)·소고기(8.8㎏)·오리고기(2.5㎏) 순이다. 개고기는 통계에서 빠졌다. 정부는 도축장에서 정식으로 잡은 동물만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성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감안하면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41.1㎏+α’로 추정된다.
그런데 마크 베코프(Bekoff) 미국 콜로라도대 명예교수가 보기엔 이처럼 살코기를 먹는 행위가 “다른 동물의 엄청난 불행을 소비하는 행위”다.(161쪽) 최근 돼지 생매장 사태를 지켜본 독자들로선 상당히 찔리지 않을 수 없다.
◆ “당신이 먹은 베이컨은 ‘꼬마돼지 베이브’” 베코프의 주장
고깃집 단골의 양심을 후벼 파는 책은 전에도 많이 있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시공사),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시공사) 등이다.
베코프 교수는 이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 ‘전 인류가 스님처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유류와 인간은 감정 처리와 관련된 뇌 구조가 놀랄 만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동물도 사람처럼 기억과 감정이 있고, 가족과 친구가 있고, 육체적 통증과 정신적 고통을 다 함께 느낀다는 얘기다.
가령 코끼리는 사자에게 잡아먹힌 동료의 새끼를 ‘조문’하기 위해 사자의 만찬이 끝난 자리에 떼를 지어 돌아와 긴 코로 죽은 새끼의 몸을 어루만진다. 향유고래는 먹이를 찾는 동안 번갈아 가며 서로의 새끼를 돌봐준다. 사향쥐는 지고지순한 일부일처주의자인데, 암수를 격리한 뒤 수컷의 뇌를 갈라보니 우울증을 일으키는 호르몬에 뇌가 흠뻑 젖어 있었다. 베코프는 “그걸 꼭 뇌를 갈라봐야 알겠느냐”고 격분한다.
베코프는 ‘도덕으로서의 채식주의’를 부르짖는다. 그가 보기에 육식은 잔혹할 뿐 아니라 환경에도 재앙이다. 양 3420만마리, 소 970만마리, 사슴 140만마리, 염소 15만5000마리가 뀌는 방귀와 트림이 뉴질랜드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베코프는 “고기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가장 온정적인 선택”이라고 다그친다.
“고기에 사족을 못 쓰면 하다못해 섭취량이라도 줄여라. 아이들에게 우리가 먹는 햄버거가 한때 살아 있는 소였고, 베이컨과 소시지는 돼지였으며, 이들은 가족과 친구를 가진 동물들이고 공장형 농장은 동물의 삶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177~179쪽)
◆ “육식은 오로지 악덕인가?” 헤르조그의 반박
그러나 당신이 토끼라면 모를까 스님처럼 먹고 사는 일은 스님들에게마저 힘든 일이다.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을 쓴 할 헤르조그(Herzog)는 “우리 안의 육식동물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인간은 왜 고기에 미칠까. 우리가 고기 먹는 원숭이로부터 진화했기 때문이다. 고기는 오로지 악덕인가? 꼭 그렇지 않다. 고기를 함께 먹으면서 사회적 지능이 발달해 두뇌의 진화에 발동이 걸렸다. “수백만년에 걸쳐 인간의 뇌가 지금처럼 커진 것은 고기의 힘” 덕분이다.(281쪽)
심리학자인 헤르조그는 20년 이상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사고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비일관성”이라고 지적한다. 모피코트를 입은 채 강아지를 안고 가는 여성을 생각해보라. 헤르조그는 “이런 비일관성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한때 헤르조그는 보아뱀을 키웠다. 고양이 애호가인 이웃이 “헤르조그는 보아뱀에게 고양이 사체를 먹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보아뱀에게 고양이 사체를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보아뱀은 1년에 고기 2㎏을 먹고 고양이는 21㎏을 먹는다. 생쥐 입장에서 보면 보아뱀보다 고양이가 10배 이상 나쁜 동물이다. 하물며 미국에서는 매년 200만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주인 없이 버려져 안락사된다. 헤르조그는 “그렇다고 내가 정말 보아뱀에게 고양이 사체를 먹인 적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헤르조그는 육식의 악덕을 인정하지만 동물을 인간만큼 존중해야 한다는 ‘동물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인간은 우월하고 동물은 열등하니까 인간이 동물을 멋대로 먹어치워도 좋다는 ‘인간 중심주의’는 곤란하다. 그러나 반대의 주장도 편협하긴 마찬가지다.
가령 헤르조그가 만난 다국적 기업 간부는 저택에 바퀴벌레가 출몰하자 해충 박멸회사를 부르기로 결심한다. 그는 일주일간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퀴벌레에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너희가 내 영역을 침범했으니 떠나지 않으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 텔레파시는 통하지 않았다.(379쪽)
2009년 미국 LA 주택가에 주차된 볼보 승용차가 방화로 전소했다. 데이비드 옌치 UCLA 의대 교수의 차였다. 곧이어 ‘동물해방단’이라는 단체가 “원숭이 실험을 중단하지 않으면 이보다 더한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성명을 낸다. 헤르조그는 “동물의 권익을 주장하는 단체들은 이상주의, 분노, 종교적 열정을 동력 삼아 부당한 현실을 악역에게 뒤집어씌우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한다.(385쪽)
그래도 고기를 덜 먹긴 덜 먹어야 한다는 점만은 헤르조그도 백번 동의한다. 그래야 지구도 구하고 동물도 구하고 스스로의 건강도 구할 수 있다.
참고로 국내 동물원은 사자·호랑이에게 마리당 하루 5~6㎏씩 살코기를 준다. 에버랜드 사파리 측은 “배가 부르거나 몸이 아파 덜 먹는 맹수는 봤어도 도덕적으로 괴로워서 덜 먹는 경우는 못 봤다”고 했다. 인간은 죄 많은 동물이지만 자기가 죄 많은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