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스가 될 것인가, 플루토스가 될 것인가?
아무개의 역사 속으로 12. 핵무기와 핵발전소의 역사
출처 : KoreaFocus(http://coreafocus.com/) 2005년 10월
[사진 1] 일제 패망 직전 매일신보에 실린 원자탄 기사
(위) 매일신보 1945년 8월 9일, 이우 사망 기사 (아래 왼쪽) 매일신보 1945년 8월 8일, 신형폭탄 히로시마 투하 (아래 오른쪽) 매일신보 1945년 8월 12일, 신형폭탄 나가사키 투하
잔인흉폭한 신병기 원자폭탄과 일제의 와신상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매일신보》1945년 8월 9일자 1면의 머리기사에는「이우(李鍝)공 전하, 7일 광도(廣島)서 어전사(御戰死)」라는 기사가 군복 차림의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실렸다.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 중좌가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한 소식을 알린 것이다.
이우(李鍝)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위훈(?)을 세운 후, 1945년 6월 10일 히로시마로 근무지를 옮겨 일본군 참모로 복무하다 원폭을 받아 전사했다. 일본 육군상은 이우의 전사에 대해 애도를 표했고, 대좌로 1계급을 특진시켰다. 시신도 빠르게 서울로 운구하여 8월 15일 오후 5시에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제국의 내각 정보국은 국민의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원자폭탄’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이러한 지침을 충실히 이행한《매일신보》는 ‘신형폭탄’ 또는 ‘신병기’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廣島)에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틀 후인 8월 8일《매일신보》 1면에는「적, 신형폭탄 사용, 광도시(廣島市)에 상당한 피해」라는 제목의 자그마한 2단 기사가 실렸다.
“[동경전화] 대본영(大本營) 발표 (소화 20년 8월 7일 15시 30분) 작 8월 6일 광도시(廣島市)는 적 B29 소수기(小數機)의 공격에 의하야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엿다. 적은 우(右) 공격에 신형 폭탄을 사용한 것 같은데 상세(詳細)는 방금 조사중이다.”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이틀이 지나서 다시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12일자《매일신보》1면의 맨 아랫부분에는 이를 알리는「우복(又複), 신형폭탄 투하, 적 대형2기 장기시(長岐市)에 침입」이라는 자그마한 기사가 실려 있다.
“[동경전화] 서부관구 사령부 발표(소화 20년 8월 9일 14시 45분) 1) 8월 9일 오전 11시경 적 대형 2기는 장기시(長岐市)에 침입하야 신형폭탄 가튼 것을 사용하엿다. 2) 상세는 목하 조사중인 바 피해는 비교적 근소한 모양이다.”
그러나 근소한 피해 밖에 입지 않았다는 엉터리 신문 기사 바로 위에는「전인류문화의 죄악, 미(米)의 국제법 무시한 신폭탄 사용 항의」라는 큼지막한 기사가 실려 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친 원폭 투하로 1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방사능 중독으로 수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재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원폭 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사진 2] 일본 천황의 항복 조서 발표 후 사용하기 시작한 ‘원자탄’ 용어
1945년 8월 15일자《매일신보》의 1면「와신상담 국난극복」이라는 기사 속에서 “잔인흉폭한 신병기 원자탄”이라는 용어를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원자탄’이라는 말은 일본 천황의 항복 조서가 발표되면서 비로소《매일신보》에 등장했다. 1945년 8월 15일자《매일신보》의 1면에는「평화재건에 대조환발(大詔渙發)」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 천황의 항복 ‘조서(詔書)’를 실었다. 그리고 일본 천황의 항복 조서 아래에「와신상담 국난극복」이라는 기사 속에서 “잔인흉폭한 신병기 원자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와신상담’이라는 제목은 또다시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진심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해방의 감격을 전해야 할《매일신보》는 뻔뻔스럽게도 일본 천황이 세계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종결했다면서 사실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판도라의 상자, 핵무기
2차대전의 와중에 개발된 핵무기는 동서냉전시기를 거치면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판도라의 상자’로 변했다. 1949년 8월에는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였다. 이제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가 종결된 것이다. 1952년 11월 미국은 원자폭탄 보다 더욱 살상력이 뛰어난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하였다.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대외적으로는 핵실험금지협정(1963), 핵확산금지조약(1968),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1969), 미소 핵무기제한 합의(1974), 중거리 핵전력협정(INF, 1987),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1991), 핵실험 금지 조약(1996) 등을 통하여 핵무기의 확산을 막고 핵실험을 금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협정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과 소련 모두 끊임없이 핵실험을 하였고, 더욱 뛰어난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를 제조하였다. 또한 영국·프랑스·중국·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도 미국과 소련에 뒤질세라 핵보유국이 되었다. 핵확산금지조약과 핵실험금지조약은 핵보유국에는 휴지조각에 불과했고, 핵무기를 소유하지 않은 불량국가(?)인 약소국에게만 적용되었다.
[사진 3]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지난 10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한반도에서 전면전 발발시 작전 계획이 담긴 비밀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 (출처 : 이기원 기자 kiwiyi@chosun.com)
한반도 핵무기의 역사와 주한미군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역사는 주한미군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국군의 참전 이후 원자탄의 사용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자칫하면 제3차대전이나 미・소간 핵전쟁이 일어나 세계적인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가능한 모든 무기’가 핵을 포함한다고 언급했다. 당황한 영국은 12월초 미국과 긴급 정상회담을 갖고 핵무기 사용 자제를 확인했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동안 줄곧 한반도에서 소규모 핵무기 사용계획을 검토하였다.미군은 평강지역을 가상표적으로 하는 핵타격 계획이나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이나 만주지역에 핵을 투하하는 계획 등을 수립하기도 했으며, 핵투하에 대한 강경파인 맥아더가 한국전쟁 중에 해임되기도 했다.
이러한 미국의 핵전쟁 시나리오는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열린우리당 최성 의원은 2005년 10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의 정보공개법에 의해 공개된 미 국방부와 국무부 자료를 토대로 지난 1991년까지 주한 미군기지 16곳에 핵무기가 수송·배치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한 최성 의원은 지난 1958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에 11종류의 미군 핵무기 시스템이 배치된 사실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의원도 최근 한미연합사의 대북 선제공격계획인 ‘전략기획지침’을 공개하였다. 정부와 언론, 정치권 등은 2급 군사비밀을 공개했다면서 비본질적인 논란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북선제공격은 곧 핵무기 공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전략기획지침’이 한반도 평화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과 더불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또 다른 주체는 북한이다. 북한은 2002년 10월에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고 있다고 했고, 2005년 2월에는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비록 북한이 지난 9월 17일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 모든 핵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에 복귀한다고 입장을 완화했지만, 공동성명의 이행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간의 갈등이 더욱 증폭될 가능성도 높다.
북한의 핵포기와 북미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53년간의 불안정한 정전협정체제가 무너져 핵무기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사진 4] 미국의 드리마일과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왼쪽) 동아일보 1979년 4월 2일, 드리마일 원전사고 (오른쪽) 경향신문 1986년 4월 30일, 체르노빌 원전사고
방사능 누출 사고와 핵폐기물이라는 괴물
한편 군사무기인 핵 기술을 민간에서 이용하는 기술도 등장했다. 소련은 1954년 6월에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OBNINSK)를 가동했다. 그 후 1956년 10월에는 영국에서, 1957년 12월에는 미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62년 3월에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한 이후, 1978년 4월 고리(古里) 1호기가 최초로 상업 운전을 개시하였다.
핵무기에서 원자력발전소로의 전환은 초음파나 인터넷의 경우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잠수함이나 어뢰를 탐지하던 초음파라는 전쟁무기를 인류의 건강과 질병퇴치를 위한 의료에 사용하고 있고, 군대 조직 내에서 정보전달이나 암호해독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던 컴퓨터 연결망을 시민들의 의사소통 도구인 인터넷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분명히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는 방사능 누출과 핵폐기물이라는 치명적인 환경재앙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원자력발전은 평화적 이용과는 거리가 먼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판도라의 상자일 뿐이다.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드리마일 섬(Three-Mile island)에서 일어난 방사능 누출 사고와 1986년 4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사고는 ‘안전한 원자력’이라는 신화를 무참하게 깨뜨렸다. 미국은 드리마일 섬의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단 1기의 원자력발전소도 추가로 건설하지 못하고 있으며, 방사능 유출로 8,000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의 체로노빌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다.
[사진 5] 미국의 드리마일과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대한민국의 원자력발전 1호기 고리
(왼쪽) 동아일보 1978년 7월 20일, 고리 원자력발전 1호기 준공 (오른쪽) 경향신문 1979년 4월 3일, 고리 원자로 방사능 누출 사고
1956년 원자력발전을 시작한 영국에서도 1957년 윈즈스케일 핵발전소에서 방사능 오염사고가 일어났지만 영국 정부에서 30년이 넘도록 국가기밀이라면서 공개를 하지 않았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마구잡이로 핵발전소를 건설하여 세계 7위로 핵 발전량이 많은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소련, 영국 못지않은 심각한 사고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원자력발전소는 방사능 유출 사고 외에도 핵폐기물이라는 괴물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는 월 274드럼(200L) 이상 발생하는 중저준위 핵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1990년대 초반부터 핵폐기장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정부의 밀실행정과 핵폐기장 철폐 투쟁
과기처와 한전 따위의 정부기관은 밀실행정을 통하여 일방적으로 동해안지역, 서해의 굴업도, 안면도, 부안군 위도 등을 방폐장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핵의 위험성과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통제되지 않은 정보에 접근한 국민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밀실행정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1990년의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은 우리나라 반핵투쟁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이장단 사퇴, 초중고등학생 등교거부, 중·고등학생 자체집회, 경찰서 방화, 2만여 주민 동시 집회 등의 격렬한 저항을 통하여 밀실행정의 상징인 과기처장관을 몰아냈고 지역주민과 협의하는 민주적·공개적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원칙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폐기장 선정에 있어서 정부의 밀실행정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지역주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정부의 밀실행정은 2003년 ‘부안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산자부 산하 한수원과 부안군수는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돈으로 주민들을 회유하려고 획책하였다. 정부의 획책에 놀아난 신문과 방송 등의 언론도 ‘님비현상’으로 주민들을 매도하였다. 정부의 권력남용과 행정착오,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한 언론에 분노한 부안군민들은 180일이 넘도록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결국 정부는 안면도의 사례처럼 부안에서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2005년 11월 2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선정을 위한 경북 경주·포항·영덕, 전북 군산 등 4곳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진 ] 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 중단 요구
오는 11월 2일 4개 시·군(경주·포항·영덕 군산)에서 실시되는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을 앞두고 반핵국민행동이 10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핵국민행동은 부재자 신고에 공무원들이 불법으로 동원되는 등 관권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11.2일 방폐장 유치 찬반 투표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허태주)
핵무기 개발 유혹과 원자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와 방폐장에 대한 정부의 병적인 집착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극비리에 핵개발을 시도하다가 미국의 방해를 받고 무산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또한,『신동아』2002년 9월호는 지난 6공화국 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핵화선언은 향후 한국의 자체 핵 개발을 위한 일종의 위장공작이었으며 실제로는 이종훈 당시 한전사장을 시켜 핵연료 재처리가 가능한 시설을 도입하려 했으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NPT조약을 준수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그 노력이 좌절되었다고 주장했다.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의 원료인 우라늄(uranium)과 플루토늄(plutonium)은 태양계의 행성인 천왕성(Uranus)과 명왕성(Pluto)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하데스에게는 ‘하데스’와 ‘플루토스’라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하데스는 저승의 세계를 주관하는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신이다. 플루토스는 지하에 묻힌 모든 지하자원의 주인이며 곡식의 생산을 도와주는 유용한 재물의 신이다. 21세기 인류의 역사에서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은 하데스가 될 것인가, 아니면 플루토스가 될 것인가. 그 해답은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