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칼럼
진짜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돼지가 될 것인가?
[기고] 과학, 상식 그리고 민주주의
기사입력 2011-07-18 오전 10:41:46
e-편한 세상
20세기가 저물 무렵 다가올 21세기에 대한 인류의 전망은 화려하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었다. 아직 닥쳐오지도 않았고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21세기였지만, 2000년부터 시작되는 새 천년에 대한 기대는 온 천지에 가득 차 있었다. 새 천년에 대한 찬사와 기대는 그 어떤 말보다 화려했고 달콤했으며, 듣고 있기만 해도 포만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국가 부도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서 온 나라에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였다. 그래서 지상에는 여기저기 피울음 섞인 아우성과 섬뜩한 선혈들이 낭자하게 늘려 있었던 시절이었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여야 정권이 교체된 데 따른 흥분과 열기가 넘치던 때였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21세기를 기약하는 말들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화사하고 따뜻했다.
그런데 그 말의 주인공들은 정치인이나 미래학자들도 아니었고 예언가들도 아닌, 황우석 박사를 비롯한 생명공학자들이었다. 21세기에 “게놈 프로젝트가 완결”되면 “암과 희귀 난치성 질병이 정복”되고, “노화가 정복”될 것이며, 또 “생명 복제 기술은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어선 수준”이어서 “이식형 인공 장기가 대량 생산”되고, “맞춤형 치료는 물론 주문형 아기 생산도 가능”해지고, 그래서 “행복하고 질병 없는 꿈의 21 세기”가 곧 현실로 닥쳐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21세기가 생명공학의 시대가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리하여 그 시절 생명공학은 21세기 대한민국을 “멋진 신세계”로 인도할 성장 동력 산업으로, 생명공학자들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온 국민들을 먹여 살릴 구국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들은 과학자였고, 과학자들의 말은 과학적 사실이므로 반박은 물론 의심의 여지조차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던 탓일까?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자들마저 생명공학자들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대해서는 단 한 치의 의구심조차 내보이는 일이 없었다. 생명공학자 앞에 선 기자들은 받아쓰기 시험을 치는 초등학생들에 불과했고, 의구심을 드러내는 몇몇 기자나 언론인들은 여론의 몰매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실물도 없는 신기루를 팔아 대박을 터트리던 바이오 벤처 기업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번창하던 때가 그 무렵이었다.
그렇게 일찌감치 황홀한 신세계를 예약해두었던 21세기도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길고도 길었던 군부 독재가 국민의 힘에 무너져 내린 뒤 선거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지는 벌써 20년의 세월도 넘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가? 서로 부둥켜안고 다리를 질질 끌며 힘겹게 걸어 왔던 길, 이제 저 산모롱이만 돌아서면 신세계가 열리는 바로 그 문턱에 서서 마지막 고비를 넘기 위해 거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인가?
아 니다. 결코 아니다. 길 막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하나같이 도리질을 칠 것이다. 신세계 문턱은커녕 땅에 발붙이고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로 척박한 세상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하루하루 버티어 내는 것만도 벅찬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왜소한 몸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일들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되풀이되면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줄을 있고 있다. 환란과 재앙이 닥쳐올 때마다 힘을 모아 대응하던 전통의 공동체 문화는 박살이 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고,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경제적 공포는 버려지고 상처받은 이에 대한 이웃의 연민을 한가롭다 못해 사치스런 감정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난 변화 중의 하나는 법률가들의 서가에나 꽂힌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헌법이 광장으로 흘러 나왔다는 것일 게다. 그 헌법 첫 머리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민주공화국이란 선언적 의미를 넘어 그 명(名)과 실(實)이 서로 일치하는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나라가 자살공화국이란 사실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이의 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떠도는 풍문이 아니라, 통계로 증명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평균 34분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자살률에 있어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단연 1등이다. 1등만 기억하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은 또 있다. 자살하는 계층과 연령의 다양성 또한 전 세계에 유래가 없다는 것! 대통령을 지낸 사람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모든 직급의 공직자들이 자살 대열에 동참하고 있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등수에 절망한 중·고등학생들의 죽음은 오래 전부터 고쳐 지지 않는 이 나라 교육계의 관행이며 전직 대학 총장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줄을 잇는 노인들의 자살에는 눈길조차 주는 사람도 없고, 세 살 배기마저 가족 동반 자살로 죽음의 대열에 합류하는가 하면, 뉴스거리도 안 되는 실직 노숙자의 자살과 대중 매체의 화려한(?)조명과 함께 기자들의 어설픈 심층 분석까지 곁들여지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행렬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이 자살 공화국에 대해 국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정부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입네, G20 세대입네 동네방네 볼썽사나운 자랑을 해대고 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자살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며, ‘세계화’, ‘신자유주의 시대’에 누구도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시장 원리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줄을 잇는 죽음의 행렬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고, 무심한 하늘은 구름만 걷히면 늘 그렇듯이 싸늘한 푸른빛만 가득 넘쳐흐른다. 21세기 첫 머리를 지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비참하다 못해 참 잔인한 나라로 변해가고 있고, 사람들의 내면에는 체념과 절망, 원망이 키워낸 거친 폭력성이 암세포 자라듯 소리 없이 덩치를 키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e-편한 세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e- 멋진 세상”이라고도 한다.
과학이라는 종교
우 리나라에 과학이라는 말은 외침에 의한 근대화와 함께 흘러 들어왔다. 의학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의·과학은 한 세기만에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의 신화와 제의, 토착 종교를 사람들의 발길 뜸한 박물관으로 밀어내고 국교에 버금가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말 한 마디에 이 나라에서 과학이라는 말이 가진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 세기의 역사는 서방 세계가 가진 과학기술의 힘에 동아시아 문화권이 처참한 패배를 당한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야만스럽게 유린할 수 있었던 힘은 이웃 나라들보다 한발 앞서 받아들인 서구 문명의 힘이었다. 패전 이후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마디의 사죄도 반성도 없었다. 아시아의 맹주로서 서방 세계의 침탈에 대항하여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성전을 펼친 것인데 사과는 무슨 사과? 이런 투다.
게다가 인간이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마의 포식”을 주도했던 731 부대의 관계자들과 책임자 이시이 시로 중장까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악마의 포식에서 얻은 성과물을 미국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들은 의과학이란 이름으로 첨삭·가감되어 온 세계의 의과 대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에 녹아들어가 있을 것이다. 요즘 방사능을 포함하여 맹독성 물질에 대한 위험의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되는 “기준치 이하”라는 말은 어떤 의학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을 거쳐 만들어 낸 개념일까? 맹독성 물질에 대한 기준치라는 말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패전 이후 단 한 가지 반성한 것이 있다면 과학기술이 미국보다 한 발 뒤처져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원폭 피폭지 중 하나인 나가사키에는 나가사키 명예시민 1호로 추앙받고 있는 방사선과 의사 다카시 나가이 박사의 기념관이 있다. 나가이 박사는 피폭 당일부터 열정적으로 피폭자 구제 사업을 펼치다가 그 자신도 피폭되어 그 후유증인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그가 피폭자 구제 사업을 펼치면서 남긴 기록 형태의 보고서가 유작으로 남아있다. 세계 최초의 피폭국 의사로서 그가 남긴 기록은 핵폭탄 피해에 대한 생생한 현장 기록으로써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고서 끝부분에 가서 그가 내린 결론을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집단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 는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가 아니라 과학과 과학자들의 승리라고 했다. 그의 기록에는 무차별 살상 무기인 핵폭탄을 투하하여 무고한 시민들까지 대량 학살한 미국 정부를 향한 그 어떤 원망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희생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미국 물리학자, 방사선학자들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 국민이 국력의 바탕이 되는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결코 구제받지 못할 것이며, 세계 최초의 핵 피폭이란 피해를 계기로 핵폭탄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핵을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앞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강대국들은 첨단 핵무기 경쟁에 나서게 되었고,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명분으로 핵발전소 건설에 정부의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대국의 힘은 핵과 핵발전소 보유 현황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의 핵발전소 보유 현황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한국은 핵발전소 보유 현황만으로는 세계 5위의 반열에 올라 있고 핵발전소 밀집도는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핵발전소를 수출까지 하는 핵 선진국이라는 자부심하나만은 가져도 좋을 듯하다.
과학이 예견했던 21세기의 멋진 신세계는 아직 골조조차 보이질 않는데,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넘어오는, 냄새도 색깔도 소리도 없는 죽음의 재는 지구촌 전체를 서서히 뒤덮을 모양새다. 이미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니 그저 아무 일 없으려니 여유로울 뿐이다. 내일의 위험에 대비하기에는 오늘 하루를 견디기 위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무거운 탓에 그냥 무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을 하고 싶다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방사능 공포란 건 가진 자들의 몸 사림 정도로 비칠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온 세계가 핵발전소 반대를 떠들고 나서는데도 경상북도 도지사는 동해안에 원전 클러스터를 조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통 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촉발된 방사능 재앙은 시간이 갈수록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미 우리 시야에서는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다. 보수 언론들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인양 한 두 마디씩 툭툭 던질 뿐이고, 대통령은 과학기술 수준이 한참 뒤떨어진 후진국의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온 나라가 동계 올림픽 유치에 열광하는 틈 사이로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후쿠시마의 재앙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힘으로는 해결과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눈에 비치는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의 대응 방식 또한 과학과는 무관해 보인다. 냉각 수조에 헬기나 소방호수로 바닷물을 퍼부어대는 모습은 요행수를 바라는 도박과도 다를 바 없고, 핵발전소 노동자의 피폭 허용량을 10밀리시버트에서 단숨에 250밀리시버트로 올린 것은 어떤 과학적 근거에서 결정된 것인가? 과학과는 무관하게 권력의 힘과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계 공포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기준치일 뿐이다.
지금 일본 정부와 일본의 핵과학자,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미량”이라거나 “기준치 이하”라는 말을 내뱉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대신 죽음의 현장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에게 사무라이라는 봉건 사회의 명예를 덮어씌우고는 가미카제 특공대식의 성전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도 안 되면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일본을 지켜 준 전쟁의 신들에게 기도를 하는 정도일 것이다. 과학기술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무너지고 있는 순간, 일본의 과학자들은 과학자들이 한 순간도 참아내지 못하고 경멸하는 주술과 굿판에 의지하고 있는 꼴이다.
그 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과학의 종말, 문명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섣부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곳이 바로 과학 분야이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이 저지른 실수의 전시장”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과학의 실패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더 나은 성과를 약속하는 하나의 계기요 자극일 뿐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지구촌 전체의 미래를 걱정해야 될 수준의 대재앙이 발생한 뒤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원전 안전을 한 단계 뛰어넘는 계기”로 삼고, “더 안전한 발전소 건설을 위한 집중 투자”를 강조했다. 지금 국민들의 정서는 대통령의 말에 그다지 신뢰를 두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과학의) 실패가 두려워 포기해선 안 된다는 대통령의 말에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에 이어 강대국이 개입한 동족끼리의 전쟁까지 겪은 우리나라 역시 일본 이상으로 서방 세계의 과학기술에 대한 목마른 갈증이 있었고, 과학의 발전을 기반삼아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것이 역대 모든 정부와 국민들의 지상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과학은 그냥 과학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첨단 과학, 최첨단 과학으로 발전해왔고, 국민들의 소비 수준도 이에 발맞추어 발전해왔다.
그런데 과학이 종교 이상의 힘을 가진 이 나라에서 정작 과학자들은 선택 받은 몇몇 소수를 제외하면 실직자나 다름없는 처지로 보따리를 들고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고 있다. 자신이 속한 대학에서, 연구소에서 수익성 있는 실적을 못 내면 한 순간에 연구비나 월급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그런 처지에 절망한 젊은 과학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대입 수험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학이 종교 이상으로 숭배되는 나라에서 이 무슨 기막힌 역설인가?
과학과 민주주의
우 리나라에서 ‘과학적’이란 말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생각과 주장, 행위나 문화적 습성까지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평가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주장을 계속하는 사람은 무책임하게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선동가로 매도되기도 한다. 과학적이지 못한(?) 전통의 가치나 문화적 습성에 애착을 가진 사람은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문화 말살 정책과 해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양키 문화 영향 그리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대한 애타는 선망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가 과거 전통과 철저하게 단절된 사회가 된 것은 ‘과학적’이란 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한민족의 굿 문화는 유희적 성격의 문화 유산이 아니라 한민족의 빈 만년 역사와 함께 해 온 토착 신앙에 뿌리를 둔 제의요 의례이다. 21세기 우리 사회의 일상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공격을 견디다 못해 흩어지고, 사라지고, 몇 남지 않은 흔적들은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앎 이전에 계시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영역이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제작하고 조작하는 과학기술의 영역과는 성격이 다르다. 종교적인 믿음의 영역을 과학의 시선으로 옳고 그름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믿음의 영역인 종교 이론을 과학이 설명을 하고 입증까지 한다.
황우석 박사팀의 줄기세포 연구가 각광을 받을 무렵 일부 불교학자와 불교계 인사들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명 복제 기술을 불교의 윤회 사상과 결부시키며, 불교의 윤회 사상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그래서인지 2004년 조계종은 황우석 박사에게 자랑스러운 불자상을 수여한다. 여성들의 난자를 여성들의 핸드백 속에 넣고 다니며 필요하면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구슬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 황우석 박사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사기꾼임이 밝혀진 뒤 불교계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내가 아는 바는 없다. 과학적인 입증에 실패한 윤회설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1987년 이전, 권력이 정권을 유지하던 힘은 총과 칼에서 나왔다. 국민들의 상식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의심은 권력이 휘두르는 무력에 의해 묵살되어 버렸다. 선거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 20년도 더 지난 지금, 권력은 언어의 힘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언어는 조·중·동과 관제 방송, 관료들 그리고 그들에게 포섭된 전문가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다. 상식에 바탕을 둔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에 대해 그들이 ‘과학적이지 않은’ 무책임한 언동으로 규정하면 경찰과 검찰이 나서서 재갈을 물리는 방식이다.
광우병 감염의 우려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운 것은 통상 관료와 보수 언론들이 내뱉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막연한 우려” 탓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미국 축산업계와 미국산 쇠고기의 실태를 취재 보도한 방송국 PD들은 과학적 근거도 없이 국민들의 막연한 우려를 선동하여 사회 혼란을 획책하고 관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끌려가야 했다.
후쿠시 마 핵발전소 사고로 일본의 동쪽 땅 전체가 황무지가 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우리는 태평스럽다. 일본보다 더 과학적으로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고,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상투적 주장일 뿐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 때문일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노동자들의 유족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는 이유는 상식 차원의 심증이 아닌 과학적인 근거를 내놓으라는 근로복지공단과 사법부의 너무나도 수준 높은(?) 과학적 사고 때문이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4대강 사업은 법적 하자가 없다는 사법부의 판단과, 과학적으로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관변 과학자들이 제공한 과학적 근거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다.
21세기가 인류 공영의 신세계가 아니라 인류 공멸의 대재앙의 세기가 될 수도 있음을 예측한 사람이 있다. 일본에서 시민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이다. 반핵 운동가로 일생을 마친 그가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맞추어 출간한 책(<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는 핵발전소는 절대 안전하지 않으며, 비용이 싸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지역 발전에도 도움 되지 않고, 결국에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철저하게 과학적 근거에 의해 서술되어 있다. 그는 원래 원자력 공학자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정부나 기업에 예속되지 않은, 시민과학자였던 그의 일관된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가 후쿠시마의 현실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습관처럼 내뱉는 과학, 또는 과학적이란 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과학은 근대 사회 이전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설명하는 자연과학과는 성격이 다르다. 굳이 이름을 달리 붙이자면 응용과학이라 해야 할 터인데 이는 과학이란 앎을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제작하고, 조작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통용되는 ‘과학적’이란 말에 효율성, 편리성, 실용성, 상업성이 내포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객관적이며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응용과학이 과학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과 재정 지원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니면 자본의 지원을 받거나. 그런 과학이 과연 가치중립적인 객관적인 사실 또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주장을 비난하고 폄훼할 때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비과학적’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말은 정부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시민단체의 의견을 묵살할 때, “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되었다”라는 말은 정부 정책을 홍보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다.
지금 이 시대의 과학은 국가 권력과 학위 장사를 하는 주식회사 수준으로 전락한 대학, 그리고 기업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과학자들의 운명은 이 삼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가 어찌 가능하겠는가? 과학이 종교 이상으로 숭배되는 나라에서 정작 과학자들의 삶이 고달프고 미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 시대를 봉건 사회라 부르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학문이 소수 사대부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무식한 상것”들을 함부로 다룰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학문의 힘이기도 했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과정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국회의원을 향해 한 통상 관료는 언성을 높여 “공부 좀 하”라는 막말을 퍼부어 댄 적이 있다. 정부 관료의 시각에서 볼 때 그 국회의원의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실지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그 말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이 무식한 상것들이 어디서 감히…”라고 하는 언어폭력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말이다.
헌법에서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고 있는 나라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종복이라는 공직자가 국민의 대표에게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사과의 말도 없었고, 임명권자 역시 어떤 문책도 없이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지금 부와 권력과 직업이 세습되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서울과 변방으로, 부촌과 빈촌으로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다. 그리고 법은 정의와 형평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소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법(私法)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법률가의 양성 구조는 부촌에서만 나올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서서히 현대 봉건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상식의 힘, 상식의 연대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 3일, 의사협회는 <의협신보>에 “새로운 시대의 의학”이란 제목 아래 의학 각 분야에서 일어날 전망들을 전 지면에 걸쳐 쏟아내 놓았다. 20편이 넘는 글 대부분이 생명공학·유전공학이 세상을 뒤바꿀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제 불과 10년 남짓 지난 시점이어서 평가를 내리기에 이르기는 하지만 아직 그 전망들이 실현된 것은 별로 없다.
그 중에 10 년 만에 정확하게 현실이 된 것이 하나 있다. 의료계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최소화”되고, 정부의 서비스 기관(공공기관)은 민영화” 될 것이며, “보건의료의 공급도 소비자의 선택에 바탕을 둔 자유 경쟁 체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 전망은 의료계의 수동적인 전망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이었기도 하고, 그래서 의료계는 지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향해 의료 사회주의를 획책하는 좌파 정권이라며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료계의 주장에는 항상 “국민 건강을 위하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규제 철폐, 민영화, 자유 경쟁 체제를 주장하는 이유 역시 당연히 “국민 건강을 위하여”서일 테지만 그런 주장이 관철되었을 때 국민건강이 향상될 것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있는가? 없다!
우리나라는 2009년 기준, 후진국의 상징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결핵의 발병과 사망률에 있어 OECD 국가 중에 1등이고, 2010년 기준으로 항생제 소비량이 OECD 국가 중 1 등이다. 항생제 소비량이 1등이란 말은 슈퍼 박테리아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국가란 이야기다. 그런데 1997년부터 2007년 10년 동안 1인당 의료비 실질 증가율은 OECD 국가 중 단연 1등이다. 의료 선진국이라며 정부와 의사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미국보다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여기에 자살률이 1등인 반면, 출산율은 끝에서 1등이다. 이런 성적은 의료의 규제 철폐, 민영화, 자유 경쟁 체제가 몰고 온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더 끔찍한 1등도 있다. 한국은 국토 면적당 원전 시설 용량이 세계 10대 원자력 대국 가운데 또 1등 이다. 대형 사고가 일어나면 국토 전체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지 진과 해일, 핵발전소 사고 세 가지 대재앙이 한꺼번에 덮친 후쿠시마 지역에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재앙이 있다. 핵발전소는 원래 의료 취약 지구라 할 수 있는 지방의 소도시에 건설되기 마련인데, 그나마 일본 정부의 구조 조정 정책으로 의사, 간호사, 병원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 일어난 사고였고, 그 여파로 가까스로 피난처에 도착한 병약자, 노약자들이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해 상당수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핵발전소가 건설되어 있는 지역의 의료 인프라는 어떤 수준인가? 최고급 의료 시설이 몰려 있고, 의료 인력과 병상의 절반 이상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 중심의 수도권에는 핵발전소가 없다.
우리 나라가 1등만 기억하고, 1등만 행복한 나라이지만 우울하고 슬픈 1등들은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한 무리의 연예인들이 1박 2일 동안 서로 밀치고 당기고 낄낄대면서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누리며 장수하고 있는 세상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무관심과 세상은 어차피 끼리끼리 다 해먹는 법이라는 냉소주의가 이 난세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처세의 철학이 되어 있다. 이런 바탕 위에 소수의 지배체제는 점점 견고해지고, 민주주의는 가마득히 멀어지고 있다.
의료의 민영화, 의료 산업화가 과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차세대 성장 동력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가? 정부가 의료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철폐하고 자유 경쟁 체제로 방임하는 것이 헌법 취지에 맞는 것인가? 또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좌파적 사고인가?
의사의 의료 행위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병든 몸의 원상 회복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므로 진료로 말미암은 추가 이익이 없다. 그나마 몸이 원상회복 되는 경우는 가벼운 질병에 걸렸을 때뿐이다. 몸은 회복이 되더라도 대부분 발병 이전의 노동력을 회복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뇌졸중이다. 어렵사리 생명을 건졌다 하더라도 후유증 때문에 정상적인 노동이 불가능한 것이 뇌졸중의 특성이다. 그런데 현대 의학의 특성상 의료 서비스에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환자에게 의료비라는 것은 추가 이익을 내는 것도 아니고, 노동력이 유지되거나 배가되는 투자의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소모적인 비용인 셈이다. 소모적 비용 지출이 많은 가계는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어느 집이든 의료비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의료는 원래 산업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 있다.
그 렇다면 의료 산업은 어떤 상품으로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인가? 의료비 지불 능력이 충분한 계층들의 건강 염려증과 욕망을 자극하여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 의료 산업의 속성이다. 수백 만 원이 넘는 건강 검진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노화가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는 괴변들이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수익 구조는 한계가 있다. 의료 체계를 시장의 자유 경쟁 체재에 방임할 경우, 의료 양극화·소득 양극화는 더 빠르게 진행할 것이므로 의료비 지불 능력이 있는 인구수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을 해외로 돌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발상이 의료 관광 사업이다. 의료 관광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소득 수준이 높은 일본과 중국의 부자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야 한다. 과연 얼마나 올까? 우울하고 슬픈 일들만 골고루 1 등을 하는 나라에….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납세의 의무를 지는 대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진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그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특히 현대 사회의 질병의 원인은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 환경적 요인이 더 크다. 그래서 우리 헌법 34조, 35조에는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해주어야 할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하나같이 헌법에 명시된 책임을 방기해왔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게 입을 다물어 왔다.
선거 민주주주의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기본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떤가? 이런 움직임을 파퓰리즘, 좌파의 준동이란 말도 모자라는지, “주인이 먹다 남긴 돼지고기를 모은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노예들(포크배럴)”이란 막말이 이명박 정부의 장관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과학적이란 말에, 전문가라는 지위에, 박사라는 이력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그들이 쓰는 말이 우리들의 일상 언어와 다른 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사기라고 하는 비난하는 행위를 황우석 박사는 “인위적 실수”라고 했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책을 그들은 “파퓰리즘”이라고 부른다. 건강 검진의 정확성은 비용에 비례한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없다. 노화가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는 노화 전문가의 말에 의학적 근거가 있는가? 없다. 구미 지역의 단수 사태가 4대강 사업과 연관이 없다는 정부 측 전문가들의 말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없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과학이나 전문가의 주장은 사술이나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냉소주의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체념 절망하게 만든다. 그 절망이 깊어지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이르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 합리적인 회의주의다. 의심은 관심에서 출발하고, 관심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최소치는 바로 투표다.
앞으로 우리가 본받고 키워 나가야 할 것은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한 표의 주권 행사로 핵발전소를 멈추게 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국민들의 상식적 사고일 것이다. 이 세상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서로 쉽게 소통가능한 상식의 힘이요, 그런 상식의 연대일 것이라 믿는다.
/김진국 의사·<우리 시대의 몸 삶 죽음> 저자
20세기가 저물 무렵 다가올 21세기에 대한 인류의 전망은 화려하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었다. 아직 닥쳐오지도 않았고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21세기였지만, 2000년부터 시작되는 새 천년에 대한 기대는 온 천지에 가득 차 있었다. 새 천년에 대한 찬사와 기대는 그 어떤 말보다 화려했고 달콤했으며, 듣고 있기만 해도 포만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국가 부도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서 온 나라에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였다. 그래서 지상에는 여기저기 피울음 섞인 아우성과 섬뜩한 선혈들이 낭자하게 늘려 있었던 시절이었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여야 정권이 교체된 데 따른 흥분과 열기가 넘치던 때였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21세기를 기약하는 말들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화사하고 따뜻했다.
그런데 그 말의 주인공들은 정치인이나 미래학자들도 아니었고 예언가들도 아닌, 황우석 박사를 비롯한 생명공학자들이었다. 21세기에 “게놈 프로젝트가 완결”되면 “암과 희귀 난치성 질병이 정복”되고, “노화가 정복”될 것이며, 또 “생명 복제 기술은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어선 수준”이어서 “이식형 인공 장기가 대량 생산”되고, “맞춤형 치료는 물론 주문형 아기 생산도 가능”해지고, 그래서 “행복하고 질병 없는 꿈의 21 세기”가 곧 현실로 닥쳐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21세기가 생명공학의 시대가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리하여 그 시절 생명공학은 21세기 대한민국을 “멋진 신세계”로 인도할 성장 동력 산업으로, 생명공학자들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온 국민들을 먹여 살릴 구국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들은 과학자였고, 과학자들의 말은 과학적 사실이므로 반박은 물론 의심의 여지조차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던 탓일까?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자들마저 생명공학자들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대해서는 단 한 치의 의구심조차 내보이는 일이 없었다. 생명공학자 앞에 선 기자들은 받아쓰기 시험을 치는 초등학생들에 불과했고, 의구심을 드러내는 몇몇 기자나 언론인들은 여론의 몰매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실물도 없는 신기루를 팔아 대박을 터트리던 바이오 벤처 기업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번창하던 때가 그 무렵이었다.
그렇게 일찌감치 황홀한 신세계를 예약해두었던 21세기도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길고도 길었던 군부 독재가 국민의 힘에 무너져 내린 뒤 선거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지는 벌써 20년의 세월도 넘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가? 서로 부둥켜안고 다리를 질질 끌며 힘겹게 걸어 왔던 길, 이제 저 산모롱이만 돌아서면 신세계가 열리는 바로 그 문턱에 서서 마지막 고비를 넘기 위해 거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인가?
아 니다. 결코 아니다. 길 막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하나같이 도리질을 칠 것이다. 신세계 문턱은커녕 땅에 발붙이고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로 척박한 세상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하루하루 버티어 내는 것만도 벅찬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왜소한 몸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일들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되풀이되면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줄을 있고 있다. 환란과 재앙이 닥쳐올 때마다 힘을 모아 대응하던 전통의 공동체 문화는 박살이 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고,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경제적 공포는 버려지고 상처받은 이에 대한 이웃의 연민을 한가롭다 못해 사치스런 감정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난 변화 중의 하나는 법률가들의 서가에나 꽂힌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헌법이 광장으로 흘러 나왔다는 것일 게다. 그 헌법 첫 머리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민주공화국이란 선언적 의미를 넘어 그 명(名)과 실(實)이 서로 일치하는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나라가 자살공화국이란 사실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이의 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떠도는 풍문이 아니라, 통계로 증명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평균 34분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자살률에 있어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단연 1등이다. 1등만 기억하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은 또 있다. 자살하는 계층과 연령의 다양성 또한 전 세계에 유래가 없다는 것! 대통령을 지낸 사람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모든 직급의 공직자들이 자살 대열에 동참하고 있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등수에 절망한 중·고등학생들의 죽음은 오래 전부터 고쳐 지지 않는 이 나라 교육계의 관행이며 전직 대학 총장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줄을 잇는 노인들의 자살에는 눈길조차 주는 사람도 없고, 세 살 배기마저 가족 동반 자살로 죽음의 대열에 합류하는가 하면, 뉴스거리도 안 되는 실직 노숙자의 자살과 대중 매체의 화려한(?)조명과 함께 기자들의 어설픈 심층 분석까지 곁들여지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행렬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이 자살 공화국에 대해 국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정부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입네, G20 세대입네 동네방네 볼썽사나운 자랑을 해대고 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자살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며, ‘세계화’, ‘신자유주의 시대’에 누구도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시장 원리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줄을 잇는 죽음의 행렬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고, 무심한 하늘은 구름만 걷히면 늘 그렇듯이 싸늘한 푸른빛만 가득 넘쳐흐른다. 21세기 첫 머리를 지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비참하다 못해 참 잔인한 나라로 변해가고 있고, 사람들의 내면에는 체념과 절망, 원망이 키워낸 거친 폭력성이 암세포 자라듯 소리 없이 덩치를 키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e-편한 세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e- 멋진 세상”이라고도 한다.
과학이라는 종교
우 리나라에 과학이라는 말은 외침에 의한 근대화와 함께 흘러 들어왔다. 의학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의·과학은 한 세기만에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의 신화와 제의, 토착 종교를 사람들의 발길 뜸한 박물관으로 밀어내고 국교에 버금가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말 한 마디에 이 나라에서 과학이라는 말이 가진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 세기의 역사는 서방 세계가 가진 과학기술의 힘에 동아시아 문화권이 처참한 패배를 당한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야만스럽게 유린할 수 있었던 힘은 이웃 나라들보다 한발 앞서 받아들인 서구 문명의 힘이었다. 패전 이후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마디의 사죄도 반성도 없었다. 아시아의 맹주로서 서방 세계의 침탈에 대항하여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성전을 펼친 것인데 사과는 무슨 사과? 이런 투다.
게다가 인간이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마의 포식”을 주도했던 731 부대의 관계자들과 책임자 이시이 시로 중장까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악마의 포식에서 얻은 성과물을 미국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들은 의과학이란 이름으로 첨삭·가감되어 온 세계의 의과 대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에 녹아들어가 있을 것이다. 요즘 방사능을 포함하여 맹독성 물질에 대한 위험의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되는 “기준치 이하”라는 말은 어떤 의학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을 거쳐 만들어 낸 개념일까? 맹독성 물질에 대한 기준치라는 말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패전 이후 단 한 가지 반성한 것이 있다면 과학기술이 미국보다 한 발 뒤처져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원폭 피폭지 중 하나인 나가사키에는 나가사키 명예시민 1호로 추앙받고 있는 방사선과 의사 다카시 나가이 박사의 기념관이 있다. 나가이 박사는 피폭 당일부터 열정적으로 피폭자 구제 사업을 펼치다가 그 자신도 피폭되어 그 후유증인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그가 피폭자 구제 사업을 펼치면서 남긴 기록 형태의 보고서가 유작으로 남아있다. 세계 최초의 피폭국 의사로서 그가 남긴 기록은 핵폭탄 피해에 대한 생생한 현장 기록으로써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고서 끝부분에 가서 그가 내린 결론을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집단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 는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가 아니라 과학과 과학자들의 승리라고 했다. 그의 기록에는 무차별 살상 무기인 핵폭탄을 투하하여 무고한 시민들까지 대량 학살한 미국 정부를 향한 그 어떤 원망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희생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미국 물리학자, 방사선학자들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 국민이 국력의 바탕이 되는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결코 구제받지 못할 것이며, 세계 최초의 핵 피폭이란 피해를 계기로 핵폭탄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핵을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앞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강대국들은 첨단 핵무기 경쟁에 나서게 되었고,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명분으로 핵발전소 건설에 정부의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대국의 힘은 핵과 핵발전소 보유 현황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의 핵발전소 보유 현황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한국은 핵발전소 보유 현황만으로는 세계 5위의 반열에 올라 있고 핵발전소 밀집도는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핵발전소를 수출까지 하는 핵 선진국이라는 자부심하나만은 가져도 좋을 듯하다.
과학이 예견했던 21세기의 멋진 신세계는 아직 골조조차 보이질 않는데,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넘어오는, 냄새도 색깔도 소리도 없는 죽음의 재는 지구촌 전체를 서서히 뒤덮을 모양새다. 이미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니 그저 아무 일 없으려니 여유로울 뿐이다. 내일의 위험에 대비하기에는 오늘 하루를 견디기 위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무거운 탓에 그냥 무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을 하고 싶다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방사능 공포란 건 가진 자들의 몸 사림 정도로 비칠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온 세계가 핵발전소 반대를 떠들고 나서는데도 경상북도 도지사는 동해안에 원전 클러스터를 조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통 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촉발된 방사능 재앙은 시간이 갈수록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미 우리 시야에서는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다. 보수 언론들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인양 한 두 마디씩 툭툭 던질 뿐이고, 대통령은 과학기술 수준이 한참 뒤떨어진 후진국의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온 나라가 동계 올림픽 유치에 열광하는 틈 사이로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후쿠시마의 재앙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힘으로는 해결과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눈에 비치는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의 대응 방식 또한 과학과는 무관해 보인다. 냉각 수조에 헬기나 소방호수로 바닷물을 퍼부어대는 모습은 요행수를 바라는 도박과도 다를 바 없고, 핵발전소 노동자의 피폭 허용량을 10밀리시버트에서 단숨에 250밀리시버트로 올린 것은 어떤 과학적 근거에서 결정된 것인가? 과학과는 무관하게 권력의 힘과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계 공포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기준치일 뿐이다.
지금 일본 정부와 일본의 핵과학자,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미량”이라거나 “기준치 이하”라는 말을 내뱉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대신 죽음의 현장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에게 사무라이라는 봉건 사회의 명예를 덮어씌우고는 가미카제 특공대식의 성전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도 안 되면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일본을 지켜 준 전쟁의 신들에게 기도를 하는 정도일 것이다. 과학기술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무너지고 있는 순간, 일본의 과학자들은 과학자들이 한 순간도 참아내지 못하고 경멸하는 주술과 굿판에 의지하고 있는 꼴이다.
그 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과학의 종말, 문명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섣부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곳이 바로 과학 분야이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이 저지른 실수의 전시장”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과학의 실패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더 나은 성과를 약속하는 하나의 계기요 자극일 뿐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지구촌 전체의 미래를 걱정해야 될 수준의 대재앙이 발생한 뒤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원전 안전을 한 단계 뛰어넘는 계기”로 삼고, “더 안전한 발전소 건설을 위한 집중 투자”를 강조했다. 지금 국민들의 정서는 대통령의 말에 그다지 신뢰를 두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과학의) 실패가 두려워 포기해선 안 된다는 대통령의 말에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에 이어 강대국이 개입한 동족끼리의 전쟁까지 겪은 우리나라 역시 일본 이상으로 서방 세계의 과학기술에 대한 목마른 갈증이 있었고, 과학의 발전을 기반삼아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것이 역대 모든 정부와 국민들의 지상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과학은 그냥 과학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첨단 과학, 최첨단 과학으로 발전해왔고, 국민들의 소비 수준도 이에 발맞추어 발전해왔다.
그런데 과학이 종교 이상의 힘을 가진 이 나라에서 정작 과학자들은 선택 받은 몇몇 소수를 제외하면 실직자나 다름없는 처지로 보따리를 들고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고 있다. 자신이 속한 대학에서, 연구소에서 수익성 있는 실적을 못 내면 한 순간에 연구비나 월급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그런 처지에 절망한 젊은 과학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대입 수험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학이 종교 이상으로 숭배되는 나라에서 이 무슨 기막힌 역설인가?
과학과 민주주의
우 리나라에서 ‘과학적’이란 말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생각과 주장, 행위나 문화적 습성까지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평가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주장을 계속하는 사람은 무책임하게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선동가로 매도되기도 한다. 과학적이지 못한(?) 전통의 가치나 문화적 습성에 애착을 가진 사람은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문화 말살 정책과 해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양키 문화 영향 그리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대한 애타는 선망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가 과거 전통과 철저하게 단절된 사회가 된 것은 ‘과학적’이란 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한민족의 굿 문화는 유희적 성격의 문화 유산이 아니라 한민족의 빈 만년 역사와 함께 해 온 토착 신앙에 뿌리를 둔 제의요 의례이다. 21세기 우리 사회의 일상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공격을 견디다 못해 흩어지고, 사라지고, 몇 남지 않은 흔적들은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앎 이전에 계시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영역이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제작하고 조작하는 과학기술의 영역과는 성격이 다르다. 종교적인 믿음의 영역을 과학의 시선으로 옳고 그름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믿음의 영역인 종교 이론을 과학이 설명을 하고 입증까지 한다.
황우석 박사팀의 줄기세포 연구가 각광을 받을 무렵 일부 불교학자와 불교계 인사들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명 복제 기술을 불교의 윤회 사상과 결부시키며, 불교의 윤회 사상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그래서인지 2004년 조계종은 황우석 박사에게 자랑스러운 불자상을 수여한다. 여성들의 난자를 여성들의 핸드백 속에 넣고 다니며 필요하면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구슬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 황우석 박사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사기꾼임이 밝혀진 뒤 불교계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내가 아는 바는 없다. 과학적인 입증에 실패한 윤회설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1987년 이전, 권력이 정권을 유지하던 힘은 총과 칼에서 나왔다. 국민들의 상식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의심은 권력이 휘두르는 무력에 의해 묵살되어 버렸다. 선거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 20년도 더 지난 지금, 권력은 언어의 힘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언어는 조·중·동과 관제 방송, 관료들 그리고 그들에게 포섭된 전문가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다. 상식에 바탕을 둔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에 대해 그들이 ‘과학적이지 않은’ 무책임한 언동으로 규정하면 경찰과 검찰이 나서서 재갈을 물리는 방식이다.
광우병 감염의 우려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운 것은 통상 관료와 보수 언론들이 내뱉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막연한 우려” 탓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미국 축산업계와 미국산 쇠고기의 실태를 취재 보도한 방송국 PD들은 과학적 근거도 없이 국민들의 막연한 우려를 선동하여 사회 혼란을 획책하고 관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끌려가야 했다.
후쿠시 마 핵발전소 사고로 일본의 동쪽 땅 전체가 황무지가 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우리는 태평스럽다. 일본보다 더 과학적으로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고,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상투적 주장일 뿐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 때문일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노동자들의 유족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는 이유는 상식 차원의 심증이 아닌 과학적인 근거를 내놓으라는 근로복지공단과 사법부의 너무나도 수준 높은(?) 과학적 사고 때문이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4대강 사업은 법적 하자가 없다는 사법부의 판단과, 과학적으로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관변 과학자들이 제공한 과학적 근거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다.
21세기가 인류 공영의 신세계가 아니라 인류 공멸의 대재앙의 세기가 될 수도 있음을 예측한 사람이 있다. 일본에서 시민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이다. 반핵 운동가로 일생을 마친 그가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맞추어 출간한 책(<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는 핵발전소는 절대 안전하지 않으며, 비용이 싸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지역 발전에도 도움 되지 않고, 결국에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철저하게 과학적 근거에 의해 서술되어 있다. 그는 원래 원자력 공학자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정부나 기업에 예속되지 않은, 시민과학자였던 그의 일관된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가 후쿠시마의 현실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습관처럼 내뱉는 과학, 또는 과학적이란 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과학은 근대 사회 이전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설명하는 자연과학과는 성격이 다르다. 굳이 이름을 달리 붙이자면 응용과학이라 해야 할 터인데 이는 과학이란 앎을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제작하고, 조작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통용되는 ‘과학적’이란 말에 효율성, 편리성, 실용성, 상업성이 내포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객관적이며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응용과학이 과학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과 재정 지원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니면 자본의 지원을 받거나. 그런 과학이 과연 가치중립적인 객관적인 사실 또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주장을 비난하고 폄훼할 때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비과학적’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말은 정부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시민단체의 의견을 묵살할 때, “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되었다”라는 말은 정부 정책을 홍보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다.
지금 이 시대의 과학은 국가 권력과 학위 장사를 하는 주식회사 수준으로 전락한 대학, 그리고 기업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과학자들의 운명은 이 삼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가 어찌 가능하겠는가? 과학이 종교 이상으로 숭배되는 나라에서 정작 과학자들의 삶이 고달프고 미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 시대를 봉건 사회라 부르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학문이 소수 사대부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무식한 상것”들을 함부로 다룰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학문의 힘이기도 했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과정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국회의원을 향해 한 통상 관료는 언성을 높여 “공부 좀 하”라는 막말을 퍼부어 댄 적이 있다. 정부 관료의 시각에서 볼 때 그 국회의원의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실지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그 말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이 무식한 상것들이 어디서 감히…”라고 하는 언어폭력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말이다.
헌법에서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고 있는 나라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종복이라는 공직자가 국민의 대표에게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사과의 말도 없었고, 임명권자 역시 어떤 문책도 없이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지금 부와 권력과 직업이 세습되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서울과 변방으로, 부촌과 빈촌으로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다. 그리고 법은 정의와 형평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소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법(私法)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법률가의 양성 구조는 부촌에서만 나올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서서히 현대 봉건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상식의 힘, 상식의 연대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 3일, 의사협회는 <의협신보>에 “새로운 시대의 의학”이란 제목 아래 의학 각 분야에서 일어날 전망들을 전 지면에 걸쳐 쏟아내 놓았다. 20편이 넘는 글 대부분이 생명공학·유전공학이 세상을 뒤바꿀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제 불과 10년 남짓 지난 시점이어서 평가를 내리기에 이르기는 하지만 아직 그 전망들이 실현된 것은 별로 없다.
그 중에 10 년 만에 정확하게 현실이 된 것이 하나 있다. 의료계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최소화”되고, 정부의 서비스 기관(공공기관)은 민영화” 될 것이며, “보건의료의 공급도 소비자의 선택에 바탕을 둔 자유 경쟁 체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 전망은 의료계의 수동적인 전망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이었기도 하고, 그래서 의료계는 지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향해 의료 사회주의를 획책하는 좌파 정권이라며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료계의 주장에는 항상 “국민 건강을 위하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규제 철폐, 민영화, 자유 경쟁 체제를 주장하는 이유 역시 당연히 “국민 건강을 위하여”서일 테지만 그런 주장이 관철되었을 때 국민건강이 향상될 것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있는가? 없다!
우리나라는 2009년 기준, 후진국의 상징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결핵의 발병과 사망률에 있어 OECD 국가 중에 1등이고, 2010년 기준으로 항생제 소비량이 OECD 국가 중 1 등이다. 항생제 소비량이 1등이란 말은 슈퍼 박테리아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국가란 이야기다. 그런데 1997년부터 2007년 10년 동안 1인당 의료비 실질 증가율은 OECD 국가 중 단연 1등이다. 의료 선진국이라며 정부와 의사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미국보다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여기에 자살률이 1등인 반면, 출산율은 끝에서 1등이다. 이런 성적은 의료의 규제 철폐, 민영화, 자유 경쟁 체제가 몰고 온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더 끔찍한 1등도 있다. 한국은 국토 면적당 원전 시설 용량이 세계 10대 원자력 대국 가운데 또 1등 이다. 대형 사고가 일어나면 국토 전체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지 진과 해일, 핵발전소 사고 세 가지 대재앙이 한꺼번에 덮친 후쿠시마 지역에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재앙이 있다. 핵발전소는 원래 의료 취약 지구라 할 수 있는 지방의 소도시에 건설되기 마련인데, 그나마 일본 정부의 구조 조정 정책으로 의사, 간호사, 병원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 일어난 사고였고, 그 여파로 가까스로 피난처에 도착한 병약자, 노약자들이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해 상당수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핵발전소가 건설되어 있는 지역의 의료 인프라는 어떤 수준인가? 최고급 의료 시설이 몰려 있고, 의료 인력과 병상의 절반 이상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 중심의 수도권에는 핵발전소가 없다.
우리 나라가 1등만 기억하고, 1등만 행복한 나라이지만 우울하고 슬픈 1등들은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한 무리의 연예인들이 1박 2일 동안 서로 밀치고 당기고 낄낄대면서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누리며 장수하고 있는 세상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무관심과 세상은 어차피 끼리끼리 다 해먹는 법이라는 냉소주의가 이 난세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처세의 철학이 되어 있다. 이런 바탕 위에 소수의 지배체제는 점점 견고해지고, 민주주의는 가마득히 멀어지고 있다.
의료의 민영화, 의료 산업화가 과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차세대 성장 동력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가? 정부가 의료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철폐하고 자유 경쟁 체제로 방임하는 것이 헌법 취지에 맞는 것인가? 또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좌파적 사고인가?
의사의 의료 행위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병든 몸의 원상 회복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므로 진료로 말미암은 추가 이익이 없다. 그나마 몸이 원상회복 되는 경우는 가벼운 질병에 걸렸을 때뿐이다. 몸은 회복이 되더라도 대부분 발병 이전의 노동력을 회복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뇌졸중이다. 어렵사리 생명을 건졌다 하더라도 후유증 때문에 정상적인 노동이 불가능한 것이 뇌졸중의 특성이다. 그런데 현대 의학의 특성상 의료 서비스에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환자에게 의료비라는 것은 추가 이익을 내는 것도 아니고, 노동력이 유지되거나 배가되는 투자의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소모적인 비용인 셈이다. 소모적 비용 지출이 많은 가계는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어느 집이든 의료비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의료는 원래 산업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 있다.
그 렇다면 의료 산업은 어떤 상품으로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인가? 의료비 지불 능력이 충분한 계층들의 건강 염려증과 욕망을 자극하여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 의료 산업의 속성이다. 수백 만 원이 넘는 건강 검진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노화가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는 괴변들이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수익 구조는 한계가 있다. 의료 체계를 시장의 자유 경쟁 체재에 방임할 경우, 의료 양극화·소득 양극화는 더 빠르게 진행할 것이므로 의료비 지불 능력이 있는 인구수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을 해외로 돌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발상이 의료 관광 사업이다. 의료 관광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소득 수준이 높은 일본과 중국의 부자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야 한다. 과연 얼마나 올까? 우울하고 슬픈 일들만 골고루 1 등을 하는 나라에….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납세의 의무를 지는 대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진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그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특히 현대 사회의 질병의 원인은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 환경적 요인이 더 크다. 그래서 우리 헌법 34조, 35조에는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해주어야 할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하나같이 헌법에 명시된 책임을 방기해왔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게 입을 다물어 왔다.
선거 민주주주의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기본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떤가? 이런 움직임을 파퓰리즘, 좌파의 준동이란 말도 모자라는지, “주인이 먹다 남긴 돼지고기를 모은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노예들(포크배럴)”이란 막말이 이명박 정부의 장관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과학적이란 말에, 전문가라는 지위에, 박사라는 이력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그들이 쓰는 말이 우리들의 일상 언어와 다른 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사기라고 하는 비난하는 행위를 황우석 박사는 “인위적 실수”라고 했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책을 그들은 “파퓰리즘”이라고 부른다. 건강 검진의 정확성은 비용에 비례한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없다. 노화가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는 노화 전문가의 말에 의학적 근거가 있는가? 없다. 구미 지역의 단수 사태가 4대강 사업과 연관이 없다는 정부 측 전문가들의 말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없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과학이나 전문가의 주장은 사술이나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냉소주의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체념 절망하게 만든다. 그 절망이 깊어지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이르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 합리적인 회의주의다. 의심은 관심에서 출발하고, 관심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최소치는 바로 투표다.
앞으로 우리가 본받고 키워 나가야 할 것은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한 표의 주권 행사로 핵발전소를 멈추게 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국민들의 상식적 사고일 것이다. 이 세상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서로 쉽게 소통가능한 상식의 힘이요, 그런 상식의 연대일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