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희귀병의 딜레마…약은 있지만
‘생명’과 ‘예산’ 사이
SBS | 문준모 | 입력 2012.03.18 16:48
핏속 적혈구가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보호막을 갖지 못해,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체 면역체계인 보체의 공격을 받고 부서지는 병. 환자들이 말하길 “피가 깨져” 적혈구가 제 역할을 못하다보니 신체 각 부분에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결국 장기가 서서히 망가져 사망에 이르는 병. 특히 사람이 밤에 수면을 취할 때 이런 현상이 종종 생겨 ‘발작성야간혈색소뇨증’이라는 명칭을 가진 고통스러운 질병.
바로 700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한다는 희귀병 PNH에 대한 설명입니다. 국내에 240여 명, 전 세계에 3천 명의 환자가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에겐 ‘보지도 듣지도 못한’ 병이겠지만, 분명 우리 이웃 누군가는 앓고 있는 병입니다. 문제는 치료제가 있는데도 환자들이 처방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한 명씩 사망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제가 취재를 하고 있던 2월 말에도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동영상 설명: PNH 환자의 적혈구 깨짐 현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건, 미국 제약업체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한 치료제 ‘솔리리스’ 투약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이 약은 PNH 환자의 적혈구에 보호막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100cc를 한 번 투약하는 데 약 2천2백만 원이 듭니다. PNH 환자들은 2주에 한 번씩 이 약을 투약 받아야 하는데, 보험적용이 안 돼 1년에만 5억 원 넘는 돈이 필요합니다.
PNH 환자들은 2007년 이 약이 미국 FDA 심사를 통과한 직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보험 적용해 달라고 요구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보험 적용만 되면 1년에 개인부담 상한선인 400만 원을 내고 투약 받을 수 있지만, 보건복지부에선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역시 돈 때문입니다. 개인부담금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건강보험 예산에서 지출해야 하는데 액수가 너무 크다는 겁니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보험급여가 지급되는 희귀약품은 총 108품목. 2010년 한 해 동안 총 675억 원이 지출됐습니다.
만일 PNH에 보험적용이 된다면, 국내 환자 중 투약이 시급한 40명 정도가 당장 투약을 시작한다고 봤을 때 1년에 약 200억 원이 나가게 됩니다. 즉, 약품은 단 하나가 추가되는데, 예산지출은 기존 희귀약품 전체에 대한 지급액(675억 원)의 30%가 늘어나는 겁니다. 게다가 1년만 투약하면 완치되는 게 아니라, 평생 투약해야 하는 약입니다.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보자면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의 대응도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닙니다.
건강보험공단은 지난해 12월부터 이 약의 국내 유통대행사인 한독약품과 가격협상을 벌여왔습니다. 공단에선 1년 투약 비용을 3억7천만 원대로 낮춰주면 보험 적용하겠다는 입장을 들고 나왔지만, 제약사 측에선 세계 공통가격표를 무너뜨릴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결국 2월 말 이 협상도 최종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 협상에 한낱 희망을 걸고 있던 환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취재 도중인 지난달 25일 사망한 PNH 환자의 유족은 정부의 복지철학 부재를 지적했습니다. 이 유족은 “누구나 아플 수 있는데, 어떤 병은 취급을 받고, 어떤 병은 도움을 못 받아서 (환자가) 죽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유력 정치인의 자식이 이 병을 앓는다고 해도 예산 운운할 건가”라고 꼬집었습니다. 다른 환자는 “차라리 약이 없는 불치병이었다면 낫겠다. 치료제가 뻔히 눈앞에 있는데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더 비참하다”고도 했습니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전문의 이종욱 교수는 “PNH로 진단받은 환자 중 3분의 1이 5년 내에 사망한다”면서 “정부가 환자들의 입장에서 전향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물론 각 국가별로 의료보험제도가 상이한 만큼 단순 비교하긴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 약품에 대해 보험을 적용하고 있는 일본, 타이완, 호주의 사례를 참조해 하루 빨리 환자들이 치료제를 투약할 수 있는 날이 오길 희망해 봅니다.
문준모moonje@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