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줄기세포] 황우석, 안철수, 진중권, 김두관, 이은정 기자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대통령? 재벌 총수?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김두관 청와대 정무특보가 바라본 바에 의하면 권력자는 아닌 듯하다

김두환 특보는 19일 SBS 라디오 `진중권의 SBS 전망대`에 출연해 자신의 `성공관`을 피력했다

진행자가 “우리사회에서, 신분상승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라고 보는가”라고 묻자 김특보는 “창의적 사고와 성실한 노력, 그리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부와 명예를 쌓았더라도 `사회적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성공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최근 이중국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혜택만 받고 책임은 지지 않는 기득권을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 김특보는 “예를 들면”이라고 뜸을 들인 뒤 “경제계 안철수, 스포츠 축구계의 박지성, 요즘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로 선정되신 황우석 교수”라고 사례를 공개했다. 각 분야별로 한 명씩 선정한 게 눈길을 끈다.

이날 방송에선 한나라당이 김특보의 지방순회를 두고 `선거법 위반`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김특보는 “당내 행사”라고 못박은 뒤 “부산 시민이나 일반 유권자를 대상으로 행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하게 선거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순회하면서 들은 민심을 언급했다.

사면복권과 관련해 “불법 자금 정치인 뇌물수수를 사면하면서 음주운전이라든지 단순한 경범죄에 대해서 사면을 왜 안해주냐”를 비롯 “경로당 지원을 지방정부에서 많이 해줘야 하는데 선거법 때문에 지원이 뚝 끊겨 어렵다” “농민들 정부 수매 끝나고 남은 잔량들이 많다”와 같은 내용들을 소개했다.

“내년 지방선거가 실질적으로 마지막 지방선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차기 정부에서 이뤄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금 이것을 시행할 순 없지만 차기 정부에서는 행정구역 개편과 축소를 하게 될 것”이라는게 그의 설명이다.

그외 `선거구 개편` `토지 공개념 도입`에 대해선 “중대선거구 플러스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당론” “참여정부에선 정말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부동산 문제만큼은 정확하게 잡겠다”는 원론적 답변을 했다.

[TV리포트 김대홍 기자] paranthin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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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조류 인플루엔자, 그리고 과학자 

과학과기술 2008년 6월호 / 이은정 KBS 과학전문기자
http://www.kofst.or.kr:8080/kofst/PDF/2008/n6s469/GGDCBE_2008_n6s469_84.pdf






5월 한달은 광우병과 조류인플루엔자로 온 사회가 시끄러웠다. 처음엔 정치, 외교적인 사안으로 시작한 이슈가 점점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황우석 사태 때 명성을 날렸던 ‘브릭(Bric.postech.ac.kr)’이 광우병 토론방을 개설한 데 이어 한림원,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까지 직접 광우병과 조류 인플루엔자 등 사회 이슈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과학자 단체가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5월 둘째주 전문가 토론회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번 주제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광우병, 새롭게 알게 된 과학적 사실들








▲ 지난 5월 9일 한국과총 주최로 열린 광우병, AI 관련 기자간담회. ⓒKOFST
과학계에서 토론회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한림원이었다. 지난 8일 ‘광우병과 쇠고기 안전성’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는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 기자들과 많은 전문가들이 참석해 광우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뒷받침했다. 광우병에 대한 많은 과학적 토론들은 그동안 언론을 통해 많이 보도됐을 테이니 그날 알게 된 숨어있는 사실들을 조금 소개해봐야겠다.


제일 재미있었던 일은 “영국에서 육골분 사료를 생산했을 때 우리나라도 수입을 했었다는데 왜 우리나라는 광우병이 안 생겼을까?”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광우병 소가 발생해 큰 문제가 됐는데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당시 수입한 육골분이 본 차이나 도자기의 재료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중복 건국대 수의대 교수는 “당시 육골분 사료값이 너무 비싸서 소에게 먹여서는 가격을 맞출 수가 없었다”며 “당시 육골분은 그릇을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비싸서 소에게 못 먹였던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에도 인간 광우병 환자가 있었다는데…”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크로이츠벨트 야콥병(CJD) 환자를 가장 많이 진료하는 서울대 의대 김상윤 교수는 “2003년에 서울대병원에서 진료한 환자를 얘기하는 것인데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변형 CJD(인간 광우병)로 의심했으나 이후 여러 가지 검사 결과로 변형 CJD가 아니라는 추정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내 진료 수첩에는 일반 CJD환자로 지금 진단이 붙어있는 상태임을 말씀드릴 수 있다”는 말을 하자 그 환자에 대한 의혹은 사라졌다. 확실히 전문가가 허심탄회하게 하는 말은 굉장히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변형 CJD든, 일반 CJD든 부검을 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이다. 부검을 한번 하려면 일단 병원측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휴일 반나절이나 하루를 완전히 CJD 환자를 위해 부검실을 비워야 한다. 철저한 소독과 더불어 의료진들의 감염도 주의해야 한다. 김 교수는 “조직 검사를 하는 신경외과 의사들의 위험도가 높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조직 검사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며 현장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세 번째는 일본에서 발생한 2명의 광우병 의심소에 대한 것이다. 일본에서 21개월령의 소와 23개월령의 소에서 두 건의 광우병 의심사례가 발생했으며 이를 일본 학자가 심포지움에서 발표했으나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이유는 해당 DNA조각을 검사하는 ‘웨스턴 블랏’에서는 양성 판정이 나왔으나 면역적합성 검사에는 음성이 나왔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둘 다 모두 양성이라야 광우병으로 판정한다.


그런데 토론회에 참석한 진보적인 과학자들은 “광우병이 계속 진화하는 병이며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재 유럽 과학자들은 비정상적인 프리온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있다. ELISA를 이용한 효소법과 면역적합성 검사 등 프리온을 검출하는 클래식컬한 방법이 소용이 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정상 프리온처럼 효소를 사용할 경우 다 잘라져버리는 변형 프리온이 논문에서 보고되고 있다. 클래시컬한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 빠져나가는 프리온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논문들을 볼 때 일본에서 발생한 2건의 광우병 의심 사례도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위험, 조류 인플루엔자


광우병에 대해 찬반 의견이 뚜렷하게 나누어지던 과학자들은 조류 인플루엔자에 대해서는 그 위험성을 한 목소리로 높였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측면에서 바라본 사회 현안 이슈 관련 기자간담회’에서는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발제를 맡은 김재홍 서울대 수의대 교수 뿐 아니라 참석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조류 인플루엔자 사태의 확산을 걱정하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류 인플루엔자의 초기 대응에 문제점이 제기됐다. 이기준 과총 회장은 “전북 김제에서 처음 조류 인플루엔자가 발견됐을 때 3㎞ 범위를 모두 살처분해야 하는데 500m만 살처분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2003년, 2006년에 3㎞범위로 살처분했을 때 감사원으로부터 예산 낭비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회장은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 정책 감사를 하는 것이 문제”라며 “심지어는 병원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낮에는 감사받고 밤에는 일했다”고 전했다. 물론 최종 결정에는 다른 요인들도 함께 작용했겠지만 결과적으로 감사원의 지적이 결정 과정에 심리적인 압박이 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조류 인플루엔자의 인체 감염 위험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우려를 표시했다. 겉으로 내놓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인체 감염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읽혔다. 이병건 녹십자 개발본부장은 “세계보건기구가 조류 인플루엔자의 인체 감염에 대해 예상 시나리오를 갖고 있으며 백신 개발도 지원하고 있다”며 “만약 인간에 감염된 후에 백신을 외국에서 사오려면 늦게 된다”고 지적했다. 전남 화순에 준공되는 백신 공장이 2010년에 실제 생산을 할 수 있으므로 이때까지는 외국 백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회 이슈에 대한 과학자 토론회 활성화 돼야


직접 토론회를 다녀보니 과학자들의 토론회는 나름 의미가 있었다. 일단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또 숨어있던 전문가를 언론에 노출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또 언론과의 짧은 인터뷰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얘기들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광우병이 문제가 된 것은 4월 중순부터였는데 과학자들이 토론회에 나선 것은 5월 7일이었으니 열흘이상 언론과 인터넷에서 과학을 떠들도록 방치했다는 점이다. 또 과학계 토론회가 짧은 기간에 집중되다 보니 연자가 중복되거나 토론회 시간 자체가 겹쳐서 많은 취재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또 각 단체 명의로 내놓은 의견이나 성명이 전체 회원들의 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몇 대표자 이름으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좀 더 깊이 있고 시의적절한 과학계 토론회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이은정 KBS 과학전문기자 ejung87@naver.com


글쓴이는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언론계 입문 후 경향신문을 거쳐 현재 KBS 과학전문기자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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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상 자진반납’의 아픈 기억 ‘황우석 사태’


[세명대 저널리즘특강]〈4〉 이은정 〈KBS〉 과학전문기자


정리=고승정 사진=김종석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8-11-21 오전 7:43:0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1120180748

한국사회에는 민주화 이후 오히려 담론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담론의 복원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건전하고 창의적인 언론활동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보도와 칼럼, 프로그램 제작, 매체창업 등을 통해 우리사회의 건전한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하는 <저널리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쓴 기사는 1학기에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데 이어, 2학기에는 <프레시안>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과학은 자본·권력과 뗄 수 없는 사회적 이슈”







▲”과학보도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라며 환하게 웃는 이은정 기자 ⓒ김종석
2005년 5월 제177회 이달의 기자상은 ‘황우석 생명과학 혁명, 한국의 과제‘를 쓴 경향신문 과학전문기자가 받았다. 심사위원회는 “많은 매체들이 황 교수팀 연구의 현상적인 측면만을 찬양 일변도로 쏟아내는 상황에서 연구의 문제점과 향후 과제 등을 전문적인 식견으로 오랜 기간 밀착 취재해 집중적으로 분석 보도했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1년 뒤 수상 기자는 “황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라는 이유로 상을 자진 반납했다.

지금은 KBS로 자리를 옮긴 이은정 과학전문기자의 이야기다. 세명대 저널리즘특강 네 번째 시간, 이 기자가 ‘과학보도와 전문기자 제도’라는 주제를 들고 예비언론인들을 만났다. 미생물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 이 기자는 1994년 과학전문기자를 염두에 두고 경향신문에 입사해 10년 만에 목표를 이뤘다. 2005년에는 ‘생명복제와 생명윤리’를 주제로 논문을 써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이날 과학보도의 사회적 의미와 전문기자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가 넘고 싶은 또 다른 하나의 산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

이 기자는 “과학보도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과학은 뭔가 정적이고 어려울 것 같지만 자본과 권력 같은 사회적 문제와 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차세대 에너지 혁명’, ‘세균분류체계 한국인 첫 발견’처럼 “누구에게도 해를 미치지 않는 전형적인” 과학기사도 있지만, 이 기자는 사회와 맞물려 있는 과학기사를 좋아한다.

그는 작년 말 수능 물리 오답 논란을 단독보도했다. 수능이 끝나고 한달이 지나서야 오답 논란이 일어난 것은 ‘단원자’, ‘다원자’, ‘이상기체’ 등 어려운 말이 들어간 제보를 언론사들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 기자는 소식을 듣고 바로 ‘큰 기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결국 교육부는 복수정답을 인정했다. 이런 기사는 어떻게 태어날까?

“과학기사는 같은 (소재로) 기사를 쓰더라도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느냐,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기사를 다루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기사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독자나 시청자가 접하는 기사는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다. 기자의 해석을 거쳐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의심하지 않고 ‘논란’으로 보도”

이은정 기자는 황우석 사태와 언론의 태도를 통해 예비언론인들에게 과학보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황우석 사태는 그를 비롯한 과학기자들에게 ‘큰 고민과 생각할 거리를 던진 사건’이었다. 2004년 2월 황우석 교수의 논문이 <사이언스> 표지논문으로 채택됐을 때, 언론은 ‘미국의 심장부에 태극기를 꽂았다’며 ‘황우석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이 기자는 ‘논란’만 무성했던 황우석 보도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2004년 첫 번째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됐을 때, <네이처>에서 여성연구원이 난자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연구윤리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논란이 되긴 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끝났죠.”

“11월 13일에 섀튼 교수가 갑자기 공동연구 중단을 선언합니다. 황 교수의 연구 내용 중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함께 연구할 수 없다고 했죠. 많은 기자들이 <네이처>에서 제기했던 난자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고 생각했어요.”

“11월 22일 피디수첩 1탄이 방영됐습니다. 황 교수 연구에 매매된 난자가 많이 사용됐고, 여성연구원 2명이 난자를 제공했다는 내용이죠. 그러자 황우석 교수가 윤리를 위반했다는 기자회견을 합니다. 기자들은 어느 정도 사건이 진화된다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황 교수 스스로 생명윤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면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줄기세포 진위 논란이 벌어집니다.”

돌이켜 보면 황우석 사태는 의심할 점이 많다. 브릭(BRIC) 사이트에서 제기한 의혹은 과학 전공자라면 논문이 조작됐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론은 논란의 진위를 파악하는 대신 논란 자체를 보도하는 데 그쳤다. 황 교수에게 유리한 내용은 부풀려 보도하고 견제 목소리는 줄였다. 언론이 황우석 신드롬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다.

전문기자가 ‘컨트롤 타워’ 역할 해야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발명에 관한 취재보도는 연구팀 관계자 등 이해당사자의 발언에만 의존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해관계가 없는 국내외 관련 전문가의 견해를 반드시 확인한다.”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취재 및 보도는 철저한 사실 확인을 토대로 하여 자칫 왜곡, 과장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2005년 11월 30일 과학기자협회가 채택한 과학보도 윤리선언 가운데 일부다. 과학담당 기자들이 황우석 사태를 겪으면서 그동안의 보도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황우석 교수 관련 보도에서는 전문기자가 쓴 기사와 사회부 기자가 쓴 기사 사이에 별 차이점이 없다는 비판도 있었다. 과학전문기자인 이 기자가 보는 한국의 전문기자 제도는 불완전하다. 1992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시행된 전문기자 제도가 도입 17년째를 맞고 있지만 장애물이 많기 때문이다.

“기자를 일단 뽑아놓고는 재교육을 시키지 않아요. 아침 6, 7시에 나가서 밤 11시까지 일하고 술먹고 들어가면, 입사 준비할 때 공부한 걸 빼먹으면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전문성을 갖추려면 기자 개인의 노력과 회사의 재교육이 필요하지만 열악한 업무 환경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출입처 위주의 취재 관행도 문제다.

“출입기자는 출입처에서 발생하는 일을 매일 챙겨야 하기 때문에 깊이 있는 기사를 쓸 시간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출입기자에게는 자료를 잘 주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료를 잘 안 주기도 하구요. 한 문제가 여러 부처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러 출입처를 교집합으로 챙기는 전문기자가 쉽게 나올 수 없습니다.”







▲현행 전문기자 제도는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면서 전문기자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은정 기자 ⓒ김종석

수용자와 언론사가 상품성을 낮게 평가해 깊이 있는 기사를 쓰기 어렵고, 내부 기자보다 외부 전문가를 신뢰하는 경향, 공채 위주 선발 방식과 배타적인 직업 문화도 걸림돌이다. 이 기자는 “현재 전문기자 제도는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황우석 사태를 예로 들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전문기자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황우석 사태 때 과학 전문기자, 사회부 기자 할 것 없이 다 몰려갔는데, 필요한 건 새로운 팩트가 나왔을 때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정확한 눈입니다. 과학전문기자는 과학 분야만 취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과학을 제대로 아는 기자들이 사회부나 정치부에도 있어야 돼요. 그래서 과학 분야에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일반기자들도 경중을 판단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죠. 사실 모든 기자가 전문기자가 돼야죠.”







▲2006년 2월 10일자 <경향신문> 10면. 이은정 기자가 검찰 수사상황을 취재해 쓴 기사는 사회면에 실렸다. ⓒ김종석
황우석 사태는 과학문제이면서 사회문제였다. 전공자들은 브릭의 의혹 제기가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해석 능력이 없는 언론사 대부분이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전문분야에만 매달리는 전문기자들의 태도도 경계한다.

“전문기자들이 특정 분야에만 매몰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과학 분야는 메울 수 있지만, 과학문제와 사회문제가 결합된 사안의 경우 기사의 가치나 편집 방향을 판단하는 데 문제가 생깁니다. 전문기자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죠.”

자신의 말처럼 이은정 기자는 2006년 검찰이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사건을 수사할 때, 검찰에 출입하며 수사상황을 취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과학전문기자가 검찰 수사를 취재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대부분 언론이 황우석 교수 수사에 대해 ‘반황’ ‘친황’의 여론싸움을 부추기는 동안, 경향신문이 심층적인 분석기사를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다.

전문적 지식도 윤리의식을 수반하는 게 중요

“전문가들이 인정할 만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사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찾아 매체 특성에 맞게 보도하는 기자.” 이 기자는 전문기자를 이렇게 정의했다. 전문기자가 갖춰야 할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전문기자는 전문적 지식, 지식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상당히, 이게 상당히 중요한데요,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윤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전문지식만 쓰면 되는데 왜 윤리의식이 필요할까,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윤리의식. 예비언론인들에게 던져진 과제다.

덧붙이는 글: 한국 언론의 새로운 표준과 가치를 모색해보려는 ‘저널리즘 특강’에 독자 여러분, 특히 언론인과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특강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은 사전에 연락해주시면(043-649-1148) 제한적이나마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특강일정표와 장소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홈피(http://journalism.semyung.ac.kr) 공지사항에 게시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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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999년 그해 연말 열렸던 각종 시상식에서 ‘올해의 과학자상’은 대부분 황우석 교수가 휩쓸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절, 황 교수는 복제소 영롱이로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과학계의 스타였다. 정보통신분야에는 또 한 명의 스타가 있었으니 안철수 사장이다. 두 사람은 그 시절부터 한국의 대표 과학자, 대표 벤처기업가로 자리매김하면서 현재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는 내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황 교수를 만나게 된 과정은 앞의 연재 글에 나와 있듯이 1998년 가을이었다. 내가 안철수 사장을 처음 만난 것도 1998년이었다. 지금은 안철수연구소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서울 남부터미널역 근교 허름한 빌딩에서 고작 10여명의 직원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자에게 예의바르고 진지하게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던 안 사장의 앳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1999년 말 한국과학기자협회에서는 올해의 과학자상으로 황 교수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으로 안 사장을 선정했다. 당시 과학과 정보통신 분야를 맡고 있던 나는 두 분을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같은 상을 받게 됐으니 한번 만나서 식사나 하자”고 제안했는데 둘 다 서로를 너무 만나고 싶었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스쳐가는 장소에서 얼굴을 본 적은 있으나 정식으로 말을 해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만남의 장소는 아마 서울 삼성동의 한 일식집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3자회동’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해에 서너 번씩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와 벤처기업가가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두 사람은 세상 유행에 둔감하다. 최근 황 교수가 “박주영이 누구에요?”라고 반문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황 교수는 TV 자체를 안 보기 때문에 연예인이니 월드컵이니 이런 소식을 전혀 모른다. 클론의 강원래 씨도 척수마비가 된 뒤에 그 사람이 가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런 판국이니 일단 연예인 얘기는 대화 주제가 안 된다.

그나마 사업을 하는 안 사장이 황 교수보다는 조금 나은데 거의 오십보백보 수준이었다. 한번은 그때 정보통신업계에서 회자되던 어느 벤처 기업가의 불륜 소문을 우연히 말한 적이 있는데(보통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재미있어 하지 않는가), 안 사장이 그 회사를 얼마나 걱정하던지 다시는 그런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하는 얘기는 참으로 재미없고 도덕적인 것들이었다. 생명공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 과학자들의 현실, 세상을 올바르게 살기 위한 방법, ……. 안 사장은 자신이 읽은 책 얘기를 자주 했다. 황 교수는 자신의 연구 내용이나 최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 참, 선거철이 되면 둘 다 정치권으로부터 엄청난 ‘오퍼’(?)를 받았는데 어떻게 정계 입문 제안을 거절했는지 그 노하우를 공개하느라 바빴다.

2004년 2월 황 교수는 전 세계 언론들 앞에서 스타가 됐다. 국내 언론에도 소개됐듯이 황 교수는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사이언스 표지논문으로 채택됐고 영국 BBC, 미국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에서 앞다투어 황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런데 언론에 소개되지 않은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으니 마침 시애틀을 방문 중이던 안철수 사장이 이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황 교수가 있던 호텔로 찾아가 축하인사를 했다(안 사장과 서울대 의대 동기동창인 부인은 당시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듣고 나도 기분이 좋았다.

2004년 8월의 어느날 안 사장 가족은 서울대 수의학과로 나들이를 했다. 원래는 우리의 ‘정기적인 3인 회동’을 하려던 날이었다. 그러나 안 사장은 부인과 딸이 미국에서 와 있어서 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사모님과 따님이랑 같이 만나요. 좀 일찍 와서 황 교수님 실험실도 구경하면 좋겠네요.”(나)
“그래도 될까요. 황 교수님, 너무 바쁘실텐데.”(안 사장은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황 교수와 친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방해될까 봐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고교생이던 안사장의 딸은 실험실 방문에 흥분해서 너무나 즐거워했다. 식사 자리에서 황 교수는 갑자기 미국에 전화를 걸었다. 황 교수 왈, 미국에 유학 중인 둘째 아들이 안철수 사장님을 무척 존경하는데 아빠가 안 사장님과 친하다고 하니 안 믿는다며 안 사장이 직접 몇 마디 해주라는 것이다. 안 사장은 그 자리에서 황 교수 아들과 전화로 덕담을 나누었다. 그날 황 교수의 아들은 안 사장을 존경한다고 하고, 안 사장의 딸은 황 교수에게 사인을 받았다. 참 흐뭇한 광경이었다.

나는 취재를 통해 두 사람을 만나게 됐지만 이들을 알게 된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에 대해 말하자면 자신의 일에 무척 열정적이다. 또 유명해졌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바른 길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가끔 회사 일이 잘 안되거나 개인적인 고민이 있을 때도 이들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고 새로운 힘이 솟는다는 느낌이 든다.

독자들이 궁금할 테니 한 가지 더, 지난 3월 은퇴 선언을 한 안철수 사장은 오랜 ‘기러기 남편’(안 사장은 부인을 공부시키기 위해 떨어져 있으므로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기러기 남편이라 주장한다) 생활을 끝내고 지금 미국에서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다. 안 사장은 서너 달 동안 자신이 공부할 분야와 다닐 대학에 대해 알아보았으며 9월부터 새로운 학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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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과학전문기자 이은정이 본 황우석 교수









황우석 서울대 교수에 과학기술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경향신문 이은정 과학전문기자의 ‘황우석 교수 취재 X파일’을 공개한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는 1998년부터 황교수를 따라다닌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교수를 취재한 전문가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판에 소개될 취재 X파일은 인간 황우석을 이해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편집자 註]

출처 : Science Times 2005.06.30 18:53









황우석 교수를 보는 세계의 시각은?
[사이언스타임즈 | 2005-08-25 17:18:00]
http://www.focus.co.kr/content.asp?aid=ecc764c73d6a04c6001c4870b0797da5
 













황우석 서울대 교수에 과학기술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경향신문 이은정 과학전문기자의 ‘황우석 교수 취재 X파일’을 공개한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는 1998년부터 황 교수를 따라다닌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 교수를 취재한 전문가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판에 소개될 취재 X파일은 인간 황우석을 이해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편집자 註]












황우석 교수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은 어떨까. 이에 대해 우리는 2가지 의견을 듣는다. 하나는 황 교수가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으로 세계적인 거물이 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국내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해외의 과학계가 황 교수를 엄청난 과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전 세계 사람들을 일일이 대면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과학계에 설문 조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황 교수의 연구를 보도한 언론들의 반응과 황 교수의 해외 일정 등을 보면 그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04년 2월 미 시애틀에서 열린 사이언스 기자간담회(정확히는 미국 AAAS주최 연례학술대회) 때만 해도 황 교수는 세계 과학계에서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이안 윌무트 박사처럼 복제로 이름을 날리지도 않았고 줄기세포 분야에서 ‘빅’ 논문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누가 몇년에 발표한 논문”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기억하는 해외 과학계에서 황 교수는 ‘경력을 알 수 없는’ 한국의 한 과학자에 불과했다.





































































기사 게재 순서
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2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3 브루셀라 백신 소동(하)
4 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5 대학 시절의 황우석
6 복제소 영롱이 태어나다
7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8 백두산 호랑이 극비 복제작전
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13 인간배아복제에 도전하다
14 배아복제 2건 공통점과 차이점
15 황우석 사단이 움직인다
16 황우석을 후원하는 사람들
17 세계 속의 황우석
18 인간배아와 줄기세포
19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20 미래를 위한 제언






*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시 황 교수와 서울대 문신용 교수는 외로운 강연을 했다. 그들은 시애틀 시내에서 30분이나 떨어진 값싼 호텔에서 투숙하며 AAAS 연례회의장을 오갔다. 과학계는 황교수팀의 발표 후 연구 내용에 대해 놀라움과 찬사를 보내면서도 의문의 눈초리도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이 난자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며 미국 등 선진국들이 윤리 문제에 막혀 연구를 하지 못했던 틈새를 공략한 성공”이라는 해석을 했다. 또 240여개의 난자를 이용해 단 1개의 줄기세포를 배양한 사실(특히 난자를 제공한 여성의 체세포로 배양에 성공했다)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했다.

1년이 지난 올해 5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사이언스 기자간담회. 황우석 교수가 난치병 환자의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한 내용을 발표했다. 지난해와 가장 달라진 모습은 제럴드 섀턴 교수(미 피츠버그대)의 존재였다. 논문의 공동저자이며 세계적인 영장류복제 전문가인 섀턴 교수는 황 교수의 연구 내용에 대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생명공학 혁명”이라고 평가하며 힘을 실어줬다.















▲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줄기세포협약관련 회의에 참석한 황우석 교수  ⓒ
해외 언론들의 반응도 지난해보다 한 단계 높아졌다. 한 해외 언론이 타이틀로 쓴 “이제는 더 이상 의문이 없다”가 바로 해외에서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황 교수팀이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학자들조차 이번 연구결과에 열광하고 있다고 밝히며 “작년에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복제해냈을 때 과학자들은 그 과정이 너무 번거로워서 되풀이할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고 일부는 연구가 옳은지 자체를 의심했었지만 이번 연구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고 보도했다. 윤리 문제에 대한 언급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있었지만 기사의 행간에서 황 교수의 연구 내용에 대해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최근 미국 샌디에이고의 바이오클러스터를 방문했을 때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와 황 교수의 업적이 지난해보다 훨씬 많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었다.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만난 UC샌디에이고 마리에 앤 폭스 총장은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에 관심이 많다”고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또 샌디에이고 지역의 생명과학전문연구소인 번햄연구소(www.burnham.org)는 앞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집중할 예정이라며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이 연구소로 이사 온 에반 스나이더 박사는 한국의 미즈메디 병원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닥터 황이 만든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 우리가 확립해놓은 분화 연구를 함께 하면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며 연구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결국 미국의 과학자들이 황 교수를 ‘한국에서 온 과학자’에서 ‘닥터 황’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이제 황 교수는 과학자들을 만나러 굳이 ‘해외 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직접 해외를 찾아가 과학자들을 만나지 않아도 그들이 직접 한국을 찾아오는 단계가 된 것 같다. 앞글에서도 말했듯이 지난 7월 섀튼 교수와 영국의 윌머트 박사가 직접 한국에 와서 공동 실험을 진행했다. 앞으로 섀튼 교수와는 원숭이 배아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를, 윌머트 박사와는 루게릭병 도전에 나설 계획이다. 오는 10월에는 우리나라에 줄기세포 은행이 세워지고 해외 연구자들이 이 은행을 이용할 것으로 보인다(서울대 의대 안규리 교수는 최근 줄기세포 은행이 꽤 빠른 속도로 진척 중이라고 귀띔해주었다).

황 교수의 해외 방문 일정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과학계에만 그 활동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 교수의 연구테마가 줄기세포, 난치병, 생명윤리와 관련이 있어서이겠지만 다양한 곳에서 초대를 많이 받는다. 지난해 10월 유엔에서 열린 세계 줄기세포협약을 위한 회의에 참석, 슈퍼맨의 주연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영상 메세지 앞에서 황 교수가 연설을 하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올해는 브라질에서 열린 임상유전학회에 참석한 데 이어 8월말 콜롬비아를 방문할 예정으로 황교수는 남미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이 글이 나갈 때쯤에는 콜롬비아에 가 있을 수도 있겠다).

황 교수의 높아진 위상만큼 우리나라의 위상도 높아지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줄기세포 연구의 세계적인 메카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무기는 황 교수팀의 체세포복제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그것 하나뿐이다. 줄기세포를 실용화하기까지 필요한 연구들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다.

미국 하버드대 스템셀연구소의 더글러스 멜튼 교수는 “한국은 정부의 지원 아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반면 미국은 정치, 윤리적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한다. 뒤집어보면 미국 정부가 지원을 해준다면 언제든지 한국의 연구 내용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과학계에 알려진 ‘닥터 황’의 이름을 발판으로 ‘한국의 스템셀 연구’가 더 많이 알려지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필자소개]







경향신문 이은정 과학전문기자

서울대 미생물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과학기자의 꿈을 안고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사회부, 경제부, 매거진 X부 등을 거쳐 현재 과학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2004년 팬택과학언론인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 서울대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는 등 공부하는 과학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와는 1998년부터 8년간 취재현장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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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Ⅱ]황교수 뒤에 ‘황금박쥐’가 있네


2005 06/07뉴스메이커 627호



金병준 정책실장·박기영 보좌관·진대제 장관과 정례회담… 한국의 미래 논의




“성공하려거든 성공한 친구를 사귀어라.”
미국 격언이다.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 한국 과학의 성가를 드높인 서울대 황우석 석좌교수와 정·관계 인사들의 인연이 속속 드러나 흥미를 끈다. 백신 발견과 비견되는 황 교수의 업적은 단지 한 개인의 집념에서 얻은 성취만은 아니다.

황 교수는 올 1월 3일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새해인사를 갔다. 이날 방문은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국민의 정부’ 당시 두뇌한국(BK21) 사업을 받아 경이적인 성공으로 귀결될 수 있었던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킬 당시만 해도 황 교수가 컨테이너를 개조한 시설에서 젖소 체세포 복제에 몰두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한국무역협회장)이 2000년 4월 동원육영재단을 통해 지원한 연구비 3억원으로 현미경 등 연구장비를 마련해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전폭적인 정책 지원 이외에 김 전 대통령의 황 교수에 대한 심정적 후원 역시 대단했다. 복제 한우의 ‘진이’라는 이름도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지은 것. 황 교수는 연구에 지치면 안방에 걸어놓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김 전 대통령의 휘호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서울대 동기 정동영 장관과 돈독

‘두뇌한국’ 사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교육부장관으로 BK21사업을 기획·추진했던 이해찬 국무총리다. 이 총리는 “바이오 산업이 생소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BK21을 통해 지원했다”면서 “교육부장관 때 추진했던 BK21사업을 통해 황우석 박사 같은 과학자가 나오는 성과를 거뒀다”고 감격했다.

이 총리와 황 교수는 20년 지기다. 두 사람의 만남은 황 교수가 이 총리를 찾아 이뤄졌다. 두 사람은 서울대 72학번 동기지만 학창시절 교분은 없었다. 이 총리는 황 박사가 대전고등학교 출신이고 친구들 가운데 대전고 출신이 많아 황 교수를 알고는 있었지만 왕래는 없었다. 이 총리는 “대학 때 데모에만 정신을 쏟는 내가 궁금했는지 1984년 어느날 황 박사가 찾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알게 된 황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모임인 ‘마당’에도 가끔 참석하며 친분을 쌓아왔다. ‘마당’ 회원 가운데 정계 인사는 이 총리를 비롯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등이 있다. 지난 2월 인간줄기세포 복제 연구성과가 나왔을 때 황 교수는 이 총리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줄 정도로 막역지우다. 이 총리는 지난 주말 황 박사의 초청으로 과외의 연구결실인 ‘맛있는 쇠고기’ 시식회에도 참석했다.

서울대 72학번인 정 장관과 황 교수의 친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1996년 정 장관이 15대 총선에서 처음 금배지를 달고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 속해 있을 당시 황 교수를 만나 ‘노벨상 후원회’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후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다. 정 장관의 한 측근은 “두 분이 매우 돈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최근 정 장관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만사를 제쳐두고 서울 강남성모병원 빈소를 찾아 남다른 우정을 드러냈다.

이런 친분은 황 교수의 정계 입문으로 이어질 뻔했다. 정 장관은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황 교수를 비례대표 1번으로 추천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했다. 하지만 황 교수가 “이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사양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 장관은 지난해 황 교수 후원회 발족식 인사말에서 “‘지난 연말 당을 만들 때 과학기술입국에 기여하는 정당을 만들자’면서 ‘황 교수를 영입하자’고 의견을 모았다”면서 “그러나 오명 과학기술부장관이 ‘그렇게 하면 큰일난다’고 해서 단념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황 교수의 관계는 이 총리나 정 장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천하다. 두 사람은 박 대표가 2004년 4월 황 교수 후원회 발족식에 참석한 이후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황 교수는 답례로 지난해 12월 박 대표의 동생 지만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한나라당에서 외부인사 영입을 담당하고 있는 김형오 의원은 “황 교수를 영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었다.

중부권 신당을 추진하고 있는 심대평 충남지사도 황 박사와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심 지사와 황 교수의 관계는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 지사는 지사가 된 뒤 부여로 황 교수의 모친 댁을 찾아 “제가 충남도 지사인데 황 교수는 저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오명 과기부 장관 든든한 후견인

황 교수의 정계진출을 극구 막았던 오명 장관은 황 교수의 ‘든든한 후견인’이다. 올해 예산 가운데 265억원을 ‘황우석 연구팀’에 투입한 것도 오명 장관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일. 황 교수팀을 위한 의·생명연구 공학동 건립, 황 교수의 연구기반을 서울대에 두되 연구·회계 등을 분리시켜 연구센터로 확대하는 등의 아이디어와 구상이 오 장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얼마전 노벨상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외국인사가 황 교수의 연구실을 직접 방문하고 돌아간 것도 사실은 오 장관의 글로벌 인맥이 가동된 결과였다고 한다. 오 장관은 또 ‘황우석 노벨상 추진위’를 준비하고 있다.

황 교수는 관계인사와 특별한 정례모임도 갖고 있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이 모임의 목적은 친목이 아니다. 황 교수와 IT의 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 박기영 정보과학기술보좌관 등이 멤버인 이 자리에서는 ‘한국의 미래’가 논의된다. 황 교수의 ‘황’, 김 실장의 ‘금’, 박 보좌관의 ‘박’에 진 장관의 성씨 발음과 비슷한 ‘쥐‘를 모아서 ‘황금박쥐‘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여기서 논의된 아이디어가 국가정책으로 반영된 사례도 많다. 배아복제 금지 논란을 벌인 UN에 우리 대표단을 급파해 여론을 돌려놓자는 생각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황 교수가 ‘척추병원’ 구상을 처음 밝힌 곳도 바로 이 모임이다. 매월 한번씩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앞으로 한국은 어떤 기술로 먹고 살 것이냐”를 주제로 얘기하는 것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황우석 취재 X파일]
과학전문기자 이은정이 본 황우석 교수

황우석 서울대 교수에 과학기술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경향신문 이은정 과학전문기자의 ‘황우석 교수 취재 X파일’을 공개한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는 1998년부터 황교수를 따라다닌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교수를 취재한 전문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판에 소개될 취재 X파일은 인간 황우석을 이해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관훈 클럽에 초청된 첫번째 과학자






















▲ 관훈클럽 토론회 도중 파안대소하고 있는 황우석 교수 [데일리서프라이즈 제공]. ⓒ


지난 6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황우석교수 초청 관훈토론회가 열렸다. 보통 관훈토론회 하면 대통령 후보나 여야 당 대표들을 초청해 날카로운 질문들을 퍼붓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황우석교수는 130회가 넘는 관훈토론회 역사 상 첫번째로 초청된 과학자이다. 정치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김수환 추기경이나 영화인 신상옥·최은희부부가 아주 예외적으로 초청받은 인물이라고 하니 과학자 황우석은 정말 특이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훈클럽도 황교수를 초청하며 긴장했던 것 같다. 정치인들이야 기자들이 다소 무례한 질문을 하더라도 별반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들은 호의적인 질문보다 곤혹스러운, 비판적인 질문을 던져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과학자인 황교수는 다르다. 요즘처럼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상태에서, 거기다 몇몇 언론사들의 엠바고(보도제한) 파기 문제로 언론에 대한 눈초리가 좋지않은 상황에서 기자들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연구 내용을 잘 모르고 어설프게 하는 질문이라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황교수에게 질문을 할 패널들도 과학, 의학전문기자 4명이 선정됐다. 영광스럽게 나도 패널에 포함됐다. 다른 3명은 조선일보 김철중기자, 중앙일보 박방주기자, 국민일보 이기수 기자였다. 우리는 미리 모여서 어떤 질문을 할지, 질문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할지, 시간 안배는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했다.

그날 토론회를 기자단과 황교수의 대결이라고 본다면 TV방송을 본 사람들은 황교수의 판정승이라고 느끼지않았을까.

우리는 일단 `분위기 좋게’ 하려고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했다.
“요즘 황교수님 너무 유명해져서 싫은 점은 없냐”는 첫번째 질문에 황교수는 “관훈토론회가 무시무시한 곳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충청도 촌놈출신의 과학자임을 감안해 살살 (질문)하시는 것 같다”고 응수했다. 첫 질문부터 기자를 `물 먹이더라’(`당했다’는 의미)는 게 언론계의 정평(?)이다.

패널 중 한분이 애써 준비해온 줄기세포 연구 마라톤 코스에도 황교수는 답변을 한사코 회피했다.
“온 국민들이 궁금해하는데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패널)
“내가 대답을 하지않아도 국민들이 이해해줄 것이다”(황교수)
이 실랑이는 YTN 돌발영상에 재미있게 소개됐다.
나의 경우는 “종교계나 윤리학자들이 제기하는 생명윤리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고 물었는데 황교수는 엉뚱하게 나의 이력(의학 박사, 생명윤리 전공)을 들먹이며 훌륭한 질문이라고 칭찬만 했다. 솔직히 내 질문이 진짜 훌륭했던 게 아니라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즉답을 피하고 주위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황교수의 답변 기법이라 볼 수 있다.

국민들은 기자들이 황교수에 대해 과도한 취재경쟁을 벌이며 엠바고를 깬다고 비난한다. 물론 언론의 취재 열기가 좀 지나치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취재 현장에 있는 우리도 할 말은 있다. 황교수는 과기부 출입기자들에게 연구 내용에 대해 엠바고를 요청하면서도 대중 강연을 통해서 혹은 정부 고위관계자들에게 연구 내용을 얘기한다. 이럴 경우 다시 소식이 돌아돌아 기자들의 귀에 들어오면 기사를 써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다.

예를들어 이번에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되기 직전, 세계를 깜짝 놀래킬 연구업적이 나온다는 소식에 각 언론사는 취재 경쟁에 들어갔다. 당시 황교수는 절대 사이언스에 내는 게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렇다면 `네이처에 싣는 거냐’고 질문하면 `답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자라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라. 취재원이 답하지않으니 기사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을 통해 팩트를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할 것인가? 언론학 교과서에 따르면 취재원이 거부하면 기사를 싣지말아야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않다(이 복잡한 내용은 다음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여튼 황교수는 이처럼 골치아픈 `꺼리’를 기자들에게 던져주는 취재원이다. 축구로 치면 공격수와 수비수의 관계. 기자는 어떡하든 골(기사)을 넣으려 하고 황교수는 골을 막으려 한다. 황교수가 `페인트 모션’으로 기자들을 따돌리는 일이 점점 늘고 있다.

내가 황교수를 처음 만난게 1998년이니 8년간 취재 현장에서 황교수를 만나왔다. 아마도 현직에 있는 기자들 중에 나와 만난 햇수가 가장 많을 것이다. 외부에 알려지지않았던 황교수의 `작은 비밀’들을 이 시리즈를 통해 공개해보려 한다.

첫회를 읽고 독자들이 흥미를 가졌을래나?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편-브루셀라 백신과 황교수편에 이어진다.
http://tu.ac.kr/t01_tit/act/act003_view.aspx?seq=7221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브루셀라 백신 소동과 황우석’ 편을 쓰기 위해 나는 8년 전 기자수첩을 다시 꺼내들었다. 기자생활 4년차였던 그 때, 정말 몸속의 아드레날린이 모두 쏟아져나오는 느낌을 갖고 황교수를 취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내가 황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가을이다. 아마도 그때가 황교수가 기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언론에 막 데뷔하기 시작한 시점일 것이다. 당시 과학기술부 출입 기자들은 매달 2번씩 과학자를 초청해 최근의 과학기술동향을 공부하는 세미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세미나 중 하나로 황교수가 초청 인사로 왔다.

황 교수의 연구 주제는 복제소였다. 1997년 2월 영국 로슬린연구소에서 윌머트 박사가 양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으나 우리 나라 과학계에서는 남의 잔치일 뿐이었다. 그런데 양을 복제한 기법과 같은 기법으로 소의 복제가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새로이 등장한 `체세포 핵이식’ 기법도 공부할 겸, 황 교수의 연구 내용도 들을 겸 많은 기자들이 모였다.

황 교수는 이 날 기자들에게 연구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느라 상당히 노력했던 듯하다. 지금이야 체세포핵이식 기법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난자의 핵을 빼고 체세포의 핵을 끼워 넣는다는 걸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요즘 대중 강연에서 황 교수는 정말 쉽게 이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만 당시는 황 교수도 초보자였던 것 같다. 사실 그 설명을 듣는 우리 기자들도 초보자였다. 뭔가 대단한 기술인지는 알겠는데 긴가민가 헷갈리는 것이다. 그나마 생물학을 전공한 내가 알아들으면서 간간이 질문도 하자 황 교수가 나를 기억하게 된 듯하다.

그때 황 교수가 세미나를 끝내면서 한 말이 있었는데 요즘 농가에 브루셀라병이 돌아서 황 교수가 대리모로 사용하던 많은 소들이 유산을 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와 관련해 정부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황 교수도 이 과정에 참여하는 중이라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 두 달 여가 흐른 어느 날 검찰에서 불량 브루셀라 백신 사건을 수사한 일이 있었다. 모든 신문 1면 톱을 장식한 이 기사를 보면서 나는 갑자기 황 교수가 생각났다. 그때 황 교수가 말한 브루셀라병이 이것이구나. 이때가 밤 11시. 아직 연구실에 계실까? 부랴부랴 서울대 수의학과를 찾아 연구실로 전화했더니 그 시간에 전화를 받는다.

“아니, 교수님. 이 시간까지 학교에서 일하세요?”(지금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알고 있듯이 황 교수는 12시가 되어야 집에 간다)
“기자님이야말로 이 시간에 퇴근 안 하시고 뭐하세요?”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한밤중에 자지 않고 야근하는 사람들의 동질감. 나와 황 교수의 개인적인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시간 여를 넘는 통화로 나는 브루셀라 백신 사건이 검찰에서 발표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황 교수는 농림부에서 만든 브루셀라 특별대책반의 조사팀장을 맡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농민들이 브루셀라병으로 소들이 죽어나가자 황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황 교수가 대책반 활동을 하게 된 듯하다. 아마도 농림부는 적당히 조사를 끝내고 외부에 알리지 않는 상태로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으리라. 황교수가 적정 수준에서 덮어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특정 연구팀이 백신 프로젝트를 맡게 된 과정, 백신 시험 과정의 문제, 농가 보급의 문제 등을 상당 수준까지 파헤쳤다. 주위로부터 간접적으로 조사활동을 그만두라는 압력도 받았고 집으로 협박성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털어놓았다. 나중에 황 교수가 열받아서 “오늘부로 내가 조사팀장 그만두겠다. 나가서 독자적으로 조사한 뒤 개인 자격으로 기자회견 하겠다”고 하니 놀라서 수그러졌다고 한다.

또 같은 특별대책반의 한 인사가 “우리 나라 수의학계의 전체 비리가 드러나자 그만 덮자”고 할 때 “그러면 우리 둘이 역사의 죄인이 된다. 만약 정권이 바뀌고 이 내용이 다시 도마에 오르면 조사를 덮은 우리가 구속될 것”이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검찰이 조사를 시작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면서 이 일은 마무리됐다. 황 교수는 브루셀라 백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 전말을 파헤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 사건은 이렇게 종결됐지만 나와 황 교수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됐다. 브루셀라 백신 사건과 관련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가 다음편에 계속된다. 
 


 


















브루셀라 백신 소동과 황우석(상)
과학전문기자 이은정이 본 황우석 교수
| 이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한마디


























  작성자 : 백병걸 교수     ㅣ     등록일 : 2005.08.18 01:13:23     |     이메일: bbaek@uiuc.edu  
  조회수 : 102      ㅣ     추천수 : 3  

 

Dr, J.의 공개 질의에 대한 수의학계 학자, 이은정 기자 그리고 싸이언스측의 답이 10일이 지나도록 없어 부루세라병의 확산에 대한 심려하시는 분에 대한 도리와 본 “황우석 X 파일”에 직접 거론된 본인으로서 간단히 질의에 대한 답을 드리고자 하며, 제한된 공간으로 그 간 언론에 소개된 글(수의축산신문 참조)을 소개함으로써 소 부루세라병 근절을 위한 저의 의견으로 제안 드리며,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이 조속히 마련되어 더 이상 축산농가의 고통과 국민들의 안전한 식생활이 외면당하지 않으며, 혈세가 부당하게 낭비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매몰에 따른 심각한 환경오염의 문제 또한 새로운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국민들의 관심만이 해결책임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첫째질문: 법정 전염병으로서의 부루세라병이 왜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박멸되지 않고 있는가?


답: 정부의 현행 검진, 살처분 정책만으로는 발병을 예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미국이나 남미 국가 등의 예를 보더라도 세계적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예방백신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루세라병에 대한 정부 당국의 대처 외면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답: “황우석 X 파일”에서 이은정 기자가 게재한 바와 같이 예방접종으로 유산사고가 발생하자 본인의 연구가 잘 못되었다며, 검찰로 하여금 기소토록 한 당시의 정부의 정책을 스스로 번복할 수도 없거니와, 지금에서 와서 이미 부루세라 백신사고의 구상권 재판이 백신을 만든 회사의 책임, 즉 백신 생산과정의 오염으로 인한 사고로 결론지어져서 선고되어 끝났으나, 본인의 재판은 고등법원의 벌금형 이후 상고하여 3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되나, 결코, 이는 국가 가축방역 책임 당국의 외면 사유가 되지 않으므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세째: 부루세라병을 현재와 같이 방치할 경우 어떠한 일들이 야기될 것인가?

답: 검진, 살처분 정책만으로 예방할 수 없으므로 현재의 전 소중 검진 율이 약 30%에 불과하므로 그 검진 두수가 전체로 확대된다면 살처분 두수는 매년 만두 이상에 달할 것이며, 도태 유도되는 소를 포함하면 이에 대한 국가 보상액은 매년 현재의 천억원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고, 또 소의 발병두수가 증가하면 이와 함께 인체 부루세라병의 확산이 축산 관련 전문 직종인 외에도 감염된 소고기가 시중에 유통될 소지가 있으므로 불특정 다수의 일반 국민도 감염되는 불상사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끓이기 전에 만져서 요리하므로 가정주부도 이러한 점을 유의해야하고 육회 등을 먹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더구나 이 병에 걸려도 진단이 쉽지 않고 항생제 치료 역시 6주 이상 걸리므로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당면 과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네째: 당사자인 축산농가의 입장은 무엇이며, 그들은 무얼 원하는가?

답: 발병농장은 백신을 외국에서 시판되고 있는 일, 이천원짜리 주사약을 사와서라도 쓰고 싶지만 국내 수입이 허가되지 않으므로 예방의 길이 있음을 알고 있는 전문 축산 농가들 마저도 애만 태우고 있고, 그 살처분 보상에 있어서도 불구하고 폐농이 되다시피 하니 피해 농가들은 조속히 근본적인 예방정책 수립을 원하고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다음 TV 방영 매체를 참조하시면 그 실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http://jeonju.kbs.co.kr/program/tvpatrol_vod.htm와 http://www.imbc.com/broad/tv/culture/sisa2580/vod/index.html.



다섯째: 정부가 그 동안 부루세라병에 걸린 소에 대해 국민혈세를 투입하여 매년 년중 행사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보상을 실시해 왔다는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답: 농림부의 자료가 없어 정확치 않으나, 언론 매체에 의화면 금년 한해에도 예상 살처분 두수는 만두 이상이며, 국가 보상비는 천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섯째: 이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이상 입니다.

답: 국회에서의 국정 조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아래의 수의축산 신문에서 “기사검색”에서 “백병걸”을 검색하시면, 그간 본인의 주장을 쉽게 접하실 수 있습니다.


수의축산신문 부루세라병 연재 기사

http://72.14.253.104/search?q=cache:8l12aawx5-8J:junior.sciencetimes.co.kr/service/article/view_opinion.jsp

 



브루셀라 백신 소동(하)  


지금은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대규모 소떼를 이끌고 방북하던 장면을 기억하는지?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가던 그 소들이 혹시 병들었다면 어땠을까?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우리 정부가 막 시작하던 햇볕정책이 물거품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편에서 예고했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바로 불량 브루셀라 백신을 맞은 소들이 북한에까지 공급됐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내가 그 내용을 취재하게 된 데는 황우석 교수의 도움이 컸다. 혹시 독자들이 오해할까봐 서두에 밝혀두는데 불량 백신을 맞은 소는 휴전선을 넘어간 현대 서산농장의 소는 아니고 [한국이웃사랑회]에서 선박편으로 북한에 보낸 젖소들이었다.

나는 황 교수와의 1시간 남짓한 첫 통화를 마친 후 이 내용을 정보보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최근에 다시 찾아보았다.


“황우석 교수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정주영 회장이 방북 때 데려간 소들 중에 이 백신 때문에 피해를 본 소가 있어 앞으로 남북문제에 영향을 끼칠 것 같다고 말함. 최근 우리나라 전문가 1명이 북한에 다녀왔는데 브루셀라 발병이 거의 확인되고 있다고 함”

그리고 다음말도 적혀 있었다.

“황 교수는 여기까지 말한 뒤 말을 끊고 절대로 기사화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나중에 자신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함”
(지금 이 메모를 다시 보니 황 교수는 그때도 이미 기자를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운은 띄워놓되 확인은 기자에게 하라는 것. 황 교수는 요즘도 가끔 이런 기법으로 연구 내용을 살짝 흘릴 때가 있다)

다음날 나는 황 교수의 방을 직접 찾아갔다. 그 때가 바로 1998년 12월 31일 저녁 8시쯤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우리는 불량 백신과 한국 과학 현실을 비판하며 한 2시간쯤 길고 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불량 브루셀라 백신을 보급한 주체인 농림부의 안일한 자세, 브루셀라 연구를 한번도 해보지 못한 연구진이 백신 보급을 맡게 된 우리나라 연구과제 선정의 문제점, 시험 과정에서 부작용이 나타났는데도 이를 은폐한 과학자들의 비겁한 태도 등 대화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그래도 나의 초점은 방북 소였다. 황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며 말을 돌렸다. 다만 방북과 관련, 황 교수는 “방북 소에 백신을 맞은 소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소가 가는 시기를 늦추자고 건의했으나 농림부에서는 이미 대통령 결재를 받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며 추진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방북 연기를 보고하려면 백신 파동의 전말을 얘기해야 하는데 도저히 보고할 수 없다는 게 농림부 관계자들의 판단이었다. 하여튼 황 교수는 안기부, 청와대 등 소수기관만 이 내용을 알고 있으며 북측에 불량 백신 접종사실을 빨리 말하라고 당부했다는 것까지만 얘기해주었다.

회사에 돌아와 이 내용을 보고하자 취재를 더욱 깊이 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농림부 출입 기자와 데스크 1명과 함께 아예 기획취재에 들어갔다.

나는 불량 백신을 맞은 소는 정주영 회장의 소가 아니라 `한국이웃사랑회’라는 단체가 북한 어린이에게 우유를 공급하기 위해 보낸 젖소라는 사실을 알아냈다(황 교수는 처음에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기 위해 정주영 회장의 소인 것처럼 내게 얘기했다). 또 이웃사랑회에 젖소를 공급한 서울우유 관계자를 찾아가 1998년 9월 27일 북송한 젖소 104두 가운데 26두가 불량 백신을 맞았으며 37두는 백신 접종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취재했다.

다시 황 교수에게 전화했다. 1999년 1월초, 황 교수는 미국 학회에 가 있었는데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았다(황 교수는 그때부터 이미 휴대폰 로밍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대학원생과 통화하며 실험을 지시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낸 사실을 다시 물어보자 황 교수도 손을 들었다. 열심히 취재하는 태도에 감동받았다며 자신이 아는 내용을 다 내어놓겠다는 것이다. 우리팀의 취재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후 브루셀라병이 사람에게도 발병할 수 있다는 사실, 함남 대안젖소목장에 옮겨진 방북 소에서 유산한 소가 발견됐다는 내용 등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내용은 기사화되지 못했다. 북한이 혹시 일부러 불량 백신을 맞은 소들을 보냈다고 오해하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는 게 윗선의 판단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너무나 아까운 기사였지만 4년차 기자인 내가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내 기자 생활 중 가장 큰 `건수’였을 수도 있는 방북소 불량 백신 접종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공계를 전공한 과학도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칠 수 있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또, 지금은 세계적인 과학자가 된 황우석 교수와 `취재원-기자’로서의 공감대를 느끼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지면에 싣지 못했던 미출고 기사의 일부를 아래에 게재해본다. 이제는 8년이나 지났으니 별탈이 없겠지….

불량 브루셀라 백신으로 인한 피해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9월 북한에 보낸 젖소 중 일부가 불량 백신을 맞은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농림부는 당시 이 백신의 부작용을 인지하고 접종을 전면 중지한 채 피해 조사를 벌이고 있었슴에도 방북 소들에 대해 이 백신 접종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젖소 북송 과정에 참가했던 단체들에 따르면 북한 어린이에게 우유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해 9월 27일 북송한 젖소(임신우) 104두 가운데 26두가 브루셀라 백신을 맞은 것으로 10일 드러났다. 또한 37두는 백신 접종 여부가 미확인됐으며 41두만이 백신을 맞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농림부는 지난해 4월부터 전국적으로 보급한 백신이 소들에게 유산·조산 등의 피해를 일으키는 불량 백신이라는 보고를 받고 8월28일 「브루셀라 특별대책반」 구성을 지시하고 백신 접종을 중지한 상태였다. 따라서 방북할 소가 검역원에 들어온 9월14일까지 보름 남짓한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젖소 매입과정이나 검역과정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관리체계의 헛점을 드러냈다.

방북 소들의 검역업무를 맡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측은 『지난해 9월14일부터 26일까지 인천 불로리 계류장에서 젖소를 관리하며 브루셀라 검출시험을 한 결과 모두 음성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의학 전문가들은 브루셀라가 감염 초기에 발견되지 않다가 임신 후반기에 발병할 수도 있는 병이기 때문에 백신을 접종한 소는 방북 과정에서 제외시켜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 수의사는 『브루셀라는 세포 내 감염이 되는 병으로 소들은 임신 6개월 후 자궁내에 「I-에리스티롤」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지면서 브루셀라 균이 급격히 증가한다』며 『이는 수의사들에게 상식에 속한다』고 밝혔다.

브루셀라는 가축 법정 1종 전염병으로 다른 소들에게 감염시킬 가능성이 높아 방북 소 외에도 기존의 북한 소들에게 브루셀라 발병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단체는 11월 14일 2차 북송과정에서 96두의 젖소를 보 한 마리가 북송 전날(11월13일) 유산하는 바람에 원래 96두를 보내기로 했으나 95두밖에 보내지 못했으며 유산한 소는 브루셀라 백신을 맞았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http://agorabbs1.media.daum.net/griffin/do/debate/read?bbsId=D116&articleId=8057&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


 


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 소와 씨름하는 대학시절의 황우석 교수  ⓒ





황우석 교수는 말할 때마다 본인이 충청도 촌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황교수의 겸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황 교수에게서 `촌티’를 느낀 적은 없다. 오히려 그의 말하는 품이나 행동들은 중산층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세련된 것들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황 교수를 오래 만나 왔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는 나눈 적이 별로 없다. 부여의 촌에서 대전으로 유학 가서 중고교를 공부했다거나 어릴 적 소를 키웠던 기억으로 수의대를 택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그냥저냥 지방 출신의 엘리트 학생이었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황 교수가 쓴 ‘나의 생명 이야기’를 통해 그의 어린 시절이 공개됐을 때 나 자신도 적잖이 놀랐다.





































































기사 게재 순서
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2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3 브루셀라 백신 소동(하)
4 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5 대학 시절의 황우석
6 복제소 영롱이 태어나다
7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8 백두산 호랑이 극비 복제작전
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13 인간배아복제에 도전하다
14 배아복제 2건 공통점과 차이점
15 황우석 사단이 움직인다
16 황우석을 후원하는 사람들
17 세계 속의 황우석
18 인간배아와 줄기세포
19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20 미래를 위한 제언







*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황 교수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1953년생. 한국 전쟁이 막 끝난 그때는 누구나 가난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의 집도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누운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며 여섯 남매를 홀로 키웠다.

황 교수의 집은 남의 소를 대신 키워주며 생계를 잇는 가난한 농가였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농가들이 그랬겠지만 소는 살림 밑천이고 집안의 대들보였으며 사람과 가장 친근한 존재였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만 파하면 소를 끌고 뚝방에 나갔다는 황 교수, 그는 가난한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며 평생 소와 함께 할 거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때 수의대를 택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황 교수가 수의대를 가겠다고 하자 담임 선생님이 강력하게 의대를 권유했다. 선생님이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가난하고 똘똘한 제자를 아끼던 선생님 입장에서는 의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편하게 살 텐데 굳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의대를 가겠다는 게 안쓰러웠을 것이다.

지금은 수의대의 인기가 많이 올랐지만 황 교수가 대학을 입학하던 1970년대는 수의대와 의대의 격차가 하늘과 땅이라고 할 만했다. 아마 그 담임 선생님도 지금은 자신의 뜻을 저버리고 수의대로 진학한 황 교수를 대견해하리라.



















▲ 황우석 교수는 1953년 12월 15일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사진은 황 교수가 유년시절을 보낸 부여군 은산면 홍산리 생가.  ⓒ

황 교수는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바로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에서 초등학교까지는 걸어서 왕복 6킬로미터 거리였다. 사시사철 산을 돌아 개울을 낀 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이 골짜기로 휘몰아쳤지만 누구도 학교 가기 싫다고 꾀를 부리지 않았다. 학교라도 다닐 수 있는 것이 그 무렵의 아이들에게는 행운이고 축복이었다.

마을에서 드물게 중학생이 되어 대전에 유학하던 시절, 그는 차비가 없어 1년에 2번밖에 집에 가지 못했다. 머리 깎을 돈이 없어 두발검사 때 늘 주임선생님께 걸려 머리를 잡아뜯겼고 헌금이 없어 성당 다니길 포기하기도 했다. 분명 가난은 어린 그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극한 상황에서 스스로 역경을 뚫고 나간 그였기에 연구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숙의 후원으로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있었던 그는 대전중학교와 대전서중학교에 동시에 합격했다. 3년 동안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대전서중을 선택했다. 세 학급 중 한 학급만이 진학반이었고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 당시 충청지역 명문 대전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됐던 ‘400등 황 교수’는 바로 황 교수가 고등학생이 된 첫 시험에서 전교 480명 중 400등을 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공부 못하던 학생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풀이하지만 이는 좀 비약된 해석이다. 충청권의 수재들이 모두 모인 대전고에서 400등을 했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황 교수의 진가는 ‘등 안대기 클럽’에서 드러난다. 그는 고교 졸업 때까지 방바닥에 절대로 등을 대지 말자고 친구들과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졸리면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깐 눈을 붙이기는 했으나 정말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 끝에 황 교수는 고교 2학년 때는 200등, 3학년 말쯤에는 공부를 좀 한다는 평판을 듣게 됐다.
http://72.14.253.104/search?q=cache:fk_wLvuMPTgJ:scienceculture.sciencetimes.co.kr/data/article/11000/0000010643.jsp

 



대학 시절의 황우석





















▲ 황우석 교수의 대학시절 사진  ⓒ





타임머신을 타고 약 30년 전으로 돌아가 대학 시절의 황우석 교수를 만난다면 그는 어떤 모습일까. 한번은 그가 “이기자, 대학교 때 미팅 몇번 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한 대여섯번 한 것 같은데요”라고 답했다. 황 교수는 자신은 대학 때 미팅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팅이나 데이트를 한 기억은 한번도 없고 친구들과 놀러 다닌 적도 없었다.

황 교수가 4년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이 소의 직장에 손을 집어넣는 일이다. 소를 내진하기 위해서는 길다란 고무장갑을 끼고 항문을 통해 자궁까지 손을 넣어야 한다. 이때 팔이 거의 어깨까지 소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황 교수는 이 작업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소의 직장에 손을 가장 많이 넣은 사람이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기사 게재 순서
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2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3 브루셀라 백신 소동(하)
4 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5 대학 시절의 황우석
6 복제소 영롱이 태어나다
7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8 백두산 호랑이 극비 복제작전
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13 인간배아복제에 도전하다
14 배아복제 2건 공통점과 차이점
15 황우석 사단이 움직인다
16 황우석을 후원하는 사람들
17 세계 속의 황우석
18 인간배아와 줄기세포
19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20 미래를 위한 제언







*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황 교수의 대학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적다. 황 교수 스스로 대학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데 별로 얘기할 게 없든지, 굳이 대학 시절의 기록을 들춰낼 필요를 느끼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처음엔 전자라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에 공부하고 연구하고 소를 돌보고 또 공부하고 연구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 했나 보다고 추측했다.

그런데 가끔 다른 얘기도 들린다. 황 교수가 학생회 간부를 맡았으며 대학신문에 시국과 관련한 글을 쓴 ‘데모꾼’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라며 “데모는 무슨…글은 한번 썼었지”라고 했다.

솔직히 황 교수가 평소 말하는 품이나 신문에 기고하는 칼럼을 보면 젊은 시절 뭔가 활동을 했거나 최소한 세상에 대한 고민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04년초 전경련의 초청으로 총학생회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총학생회 간부들은 28년전 학생회 간부였던 나의 모습보다 밝고 신선했다”고 술회했다. 참, 그리고 황 교수가 대학 시절에도 한번 크게 아파 병원 신세를 졌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서울대 수의대의 석사,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것은 황 교수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사 논문은 소의 번식을 주제로 했다. 박사 학위를 받으면 전임 교수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위기가 닥쳤다. 그의 지도교수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느닷없이 배정된 강의가 취소되고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것. 그의 어릴 적 목표는 첫째는 서울대 교수, 둘째는 소와 함께 평생 사는 것이었다. 어릴 적 꿈이 눈앞에서 무너지자 그는 절망했다.



















▲ 대학시절 실험에 열중하고 있는 황우석 교수  ⓒ

누구에게나 위기와 시련은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황 교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이를 헤쳐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살고 있던 18평짜리 잠원동 아파트를 팔아 경기도 광주에 황무지를 샀다. 그 무렵 서울대학교 수의과에는 실험농장이 없었다. 그라도 인공수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강사 생활을 하는 도중 서울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교수로 오라는 제안이 왔다. 그러나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교수로 내정되어있던 나를 제치고 비전공자가 교수가 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황우석·최재천 글 `나의 생명이야기’ 중에서)

3년간 시간 강사를 하던 황 교수에게 수의대 학장이 일본 훗카이도 연수를 주선했다. 그는 일본 유전공학계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가나가와 교수의 연구실에 배속돼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박사 과정에 있는 다른 학생들보다 10살 정도가 많았는데 특히 화학적인 기본 지식이 취약해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 3시간 남짓 자면서, 나이 어린 동료들을 귀찮게 따라다니며 열심히 물어보고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뭔가 좀 알겠다 싶을 무렵 서울대에서 교수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1년 남짓한 경험이었지만 홋카이도 대학은 그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능력이 뛰어난 우량종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복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일본 연수는 요즘으로 치면 박사후연구원(포스터닥터)에 해당한다.

1980년대에는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바로 교수 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에 황 교수처럼 박사를 받은 후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도 그가 교수 임용에 탈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으리라. 그는 일본에서 향후 자신이 연구할 ‘동물 복제’라는 연구 테마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소 ‘영롱이’는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이 가능했다.

http://www.sciencetimes.co.kr/data/article/11000/0000010676.jsp


복제소 영롱이 태어나다




















복제소 영롱이가 출산한 사진 





황우석 교수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였을까. 미국에서 전 세계 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연 날?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표지에 논문이 실린 날?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한 날?

내가 생각하기에 황 교수가 가장 기뻤던 날은 1999년 2월 12일 복제소 영롱이가 탄생했을 때일 것 같다. 영롱이는 가난한 농촌에 태어나 소꼴을 베러 다녔던 그의 어린 시절, 농민들에게 우수한 젖소를 공급하겠다는 그의 꿈, 또 교수 임용에서 탈락하고 농장으로 백의종군했던 시련의 시기, 이 모든 것이 녹아 있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영롱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동물이며 전 세계 다섯 번째의 복제 동물이다. 동물복제란 다 자란 동물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해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드는 기술이다. 수컷와 암컷의 교배가 있어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컷 혹은 암컷 하나만 있으면 복제된 새끼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영롱이 복제방법은 1997년 영국 로슬린연구소의 이안 윌머트 박사가 복제양 ‘돌리’를 만든 것과 똑같은 원리였다. 그러나 돌리가 단순한 복제 실험이었던 것과 달리 황 교수팀은 품종 개량이라는 목적 의식을 갖고 복제기술을 이용한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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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20 미래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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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우석 교수가 동물 복제를 했다는 사실보다 ‘왜’ 복제를 했는가를 말하고 싶다. 서울대 수의학과 산과학교실 출신인 황 교수는 소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전문가였다. 그리고 우수한 품질의 소를 만들어내는 품종 개량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소의 품종 개량은 그동안 인공 수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암소와 수소가 교미해 새끼를 낳는 줄 알겠지만 실제로 농가에서 기르는 소들은 자연교배를 통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인공 수정을 통해 태어난다. 우수한 소의 정액을 직접 암소의 자궁에 넣어주거나 아예 바깥에서 수정란을 만들어 대리모 암소에게 넣어주는 방식이다. 소의 자궁에 넣는 수정란의 우수성에 따라 태어나는 새끼의 품질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황 교수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수정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하다 체세포 복제기술을 알게 됐다.

황 교수팀은 축협중앙회, 한국종축개량협회에 등록된 소 55만마리 중 우유생산량이 보통 젖소의 3배나 되고 질병도 없는 ‘슈퍼 젖소’를 찾아냈다. 이 젖소의 난구세포를 채취해 미리 준비한 탈핵난자(핵을 제거한 난자)에 이식하고 전기자극으로 탈핵난자와 체세포 핵을 융합시켜 수정란을 만들 수 있었다. 수없이 만들어낸 이 수정란을 수많은 젖소의 자궁에 착상시켜 1999년 2월 12일 드디어 영롱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복제양 돌리와보니 

영롱이가 태어나고 1주일 후인 2월 19일 황 교수는 과기부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했다. 12일 오후 1시쯤 어미소가 진통을 하기 시작, 4시간만인 오후 5시쯤 송아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롱이는 자궁에 거꾸로 들어앉아 다리부터 나오는 역산(逆産)이었다.

황 교수가 출산 과정을 찍은 비디오를 틀었다. 대여섯명의 연구원들이 시퍼런 수술 가운을 입고 어미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황 교수는 가장 중심에서 새끼소를 직접 받고 있었다.

“야, 이 눔아 빨리 나와”

황 교수는 애가 탔다. 송아지의 다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점점 몸이 드러났다. 진통 4시간만에 영롱이가 세상을 보는 순간이었다. 뒷다리부터 쑥 빠져나온 영롱이는 잠시 주저앉는 것 같더니 네 다리로 섰다. 영롱이는 출산 당시 건강한 상태로 몸무게는 43㎏이었다. 나는 어미 뱃속에 그렇게 큰 송아지가 들어앉아 있는지 처음 알았다.

당시 영롱이를 보도한 기사들을 살펴보면 “난자의 파손을 최소화 한 스퀴징법(난자를 쥐어짜면서 핵을 빼내는 기법)을 사용해 복제 성공가능성을 높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 말한 스퀴징법이 바로 오늘날 황 교수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손놀림’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복제소 영롱이를 만들면서 익힌 기술이 5년 후 세계 최초의 체세포 인간배아복제 기술의 모태가 된 것이다.

영롱이의 탄생으로 황 교수는 무명 과학자에서 세상이 주목하는 과학자로 탈바꿈했다. 1999년 황교수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상, 수의학술대상,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올해의 과학자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러나 황 교수는 무엇보다도 농민들이 주는 대산농촌문화상을 받을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참, 영롱이라는 이름은 황 교수 연구실의 한 대학원생이 지었다. 원래 이름의 후보는 다솜이, 영롱이, 풍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의 3가지였는데 황 교수는 당시 강창희 과기부 장관에게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서 영롱이를 낙점 받았다. 그때는 영어 이름에 주목을 안 했는데 나중에 보니 영어로 ‘young-long’이었다. 그 이름 탓일까. 복제양 돌리는 사망했으나 영롱이는 아직도 건강한 상태로 살아있다.
http://72.14.253.104/search?q=cache:D3D7JdvgqfcJ:www.ksf.or.kr/etc/IDX_news_detail.jsp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서울대 황우석교수가 경기 광주군 목장에서 복제 한우 암송아지(진이)를 껴안은 채 발육상태를 관찰하고 있다(1999년 4월 2일) 







복제소 영롱이가 태어나고 한 달여가 흐른 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은 또 하나의 경사를 맞았다. 바로 복제 한우 진이의 탄생이다.

황우석 교수팀은 1999년 3월 27일 새벽에 27㎏의 한우 암송아지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용한 기술은 영롱이 때와 마찬가지로 체세포 복제기술이다. 한우의 체세포를 떼오고 이를 무핵난자(핵을 제거한 난자)에 넣어 세포를 융합시킨 후 암소의 자궁에 넣어 복제송아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롱이가 젖소였다면 진이는 한우다. 영롱이는 우유 생산량이 많은 슈퍼 젖소를 복제한 것이고 진이는 내병성이 뛰어난 한우를 복제한 것이다. 황 교수가 한우를 복제한 것은 한우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였다. 한우의 단점은 외국소에 비해 여러 가지 질병에 약하다는 것. 호흡기 질환과 설사 등에 쉽게 노출돼 생산 농가에서 피해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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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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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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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배아복제 2건 공통점과 차이점
15 황우석 사단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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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과정에서 진이는 영롱이에 비해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영롱이는 생식세포인 자궁세포에서 채취한 체세포를 이용하여 비교적 복제성공 가능성이 높았지만, 진이의 경우 채취하기는 쉽지만 성공 가능성이 낮은 귀 세포를 이용했다.

보통 복제 연구에서 처음에는 자궁이나 유방 등 생식과 관련한 기관의 세포를 먼저 사용하고 이 기법이 발달하면 피부 세포로 옮겨간다. 진이의 탄생으로 이제 다양한 종류의 세포로 복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황 교수는 당시 “한우의 세포들은 젖소보다 크기가 3분의 2 정도로 작아 세포융합 단계에서 여러 차례 반복실험을 해야 했다”며 “중간에 몇 차례 유산 고비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인간배아 체세포 복제 과정에서도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황 교수팀은 처음 인간체세포복제배아를 만들 때는 사람의 난구세포에서 채취했다. 난구세포로 만든 복제배아에서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2004년 2월)하자 이후 피부세포에 도전, 올해 5월에는 피부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진이라는 이름은 김대중 대통령이 지었다. 황 교수는 언론 발표에 앞서 1999년 4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참석, 김대중 대통령에게 진이의 탄생을 보고했다. 그때 김 대통령이 “이름은 뭐냐”라고 물었을 때 “아직 못 지었다”고 답하자 “그럼 내가 지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날 오후 김 대통령은 ‘진이’(眞伊)라는 이름을 지었다. ‘역사를 앞서 가면서 시대를 초월해 칭송받는 작품을 남긴 황진이처럼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소가 돼라’는 뜻. 아마도 황 교수의 성(黃)을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황우석교수와 김대중 대통령(1999년 사진) 


이름을 짓는 과정을 돌아보면 황 교수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롱이는 앞의 연재글에서 말했듯이 과기부 장관이 3개의 이름 중에서 낙점한 것이다. 그러나 진이는 대통령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황 교수의 주가는 한 달 반 사이에 그만큼 높아졌다.

황 교수의 연구는 국민의 정부의 두뇌한국(BK21) 사업 지원대상에 포함돼 활기를 띠게 됐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황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끔씩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올해 1월 초 황 교수 부부는 김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 새해 인사를 나눴다. 그때 황 교수는 “2004년 여름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이 ‘實事求是(실사구시)’ 휘호를 써주었으며 그 휘호를 안방에 걸어놓은 후 일이 잘 풀렸다”는 덕담을 했다.

다시 진이로 돌아가자. 보통 한우 송아지의 평균 체중이 24㎏인 점에 비춰볼 때 진이는 27㎏으로 10% 가량 무겁다. 진이의 체세포는 고기 맛이 좋고 질병에 강한 한우 암소에서 떼어낸 것이다. 슈퍼 한우암소의 체중은 980㎏. 일반 재래종 암소(500㎏)의 2배에 달하는 슈퍼 체중이었다.

당시 진이, 영롱이와 같은 우수한 형질의 복제소들이 전국적으로 보급될 경우 우리 축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영롱이와 진이는 농장에서 대기 중이다. 농림부측은 복제소의 생존율이 50%를 밑돌고 안전성 검사가 완결되지 않아 일반 농가에 보급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왜 복제소는 아직도 실용화 되지 못했을까? 실용화 과정의 인프라 문제인가? 복제소의 고기와 우유를 먹는 게 찜찜해서일까? 아니면 복제소를 실용화시킨다는 생각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는 이상적인 것이었을까?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의문이며 여러 전문가를 만났으나 아직까지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http://72.14.253.104/search?q=cache:AbiF-UFbxIgJ:www.ksf.or.kr/etc/IDX_news_detail.jsp 


백두산 호랑이 극비 복제작전





















황우석 교수가 백두산호랑이 수술장면을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호랑이 복제과정을 설명하고 있다(1999년 10월) 





‘영롱이’와 ‘진이’의 복제로 복제전문가 황우석 교수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졌다. 황 교수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 서빙하던 웨이터가 황 교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최근에 누가 좀 보자고 해서 갔는데…. 북한에서 들여온 호랑이가 있대요. 그래서 호랑이 복제를 해볼까 합니다.”

듣는 순간 나도 깜짝 놀랐다. ‘이건 특종이다’라는 감과 함께, 정말 호랑이 복제가 가능할까? 기사를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등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나 나를 믿고 얘기해 준 황 교수를 배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서로 합의해서 기사를 쓰기로 약속했다. 그날 나는 엄청 흥분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한참이 흘렀을까. 2000년 봄이었다. 미국 출장을 다녀온 날 아침, 황 교수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나와 꼭 갈 곳이 있으니 지금 당장 나오라”는 것이다. 출장으로 피곤했지만 놓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 동물원. 우리가 동물을 구경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차가 달렸다. 내가 간 사육장은 동물원에서 가장 높은 위쪽에 있었다. 그 곳에는 덩치 큰 사자가 한 마리 누워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수의사들이 사자에게 마취제를 놓았는지 네 다리가 밧줄로 묶인 채 누워있었다. 아직 마취가 덜 되었는지 사자가 다리를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황 교수팀의 임무는 사자의 뱃속에 ‘호랑이수정란(배아)’을 넣는 것이었다. 황 교수팀은 이미 몇 번 해본 작업인지 능숙한 솜씨로 사자를 다뤘다. 사자의 몸에 들어간 마취제가 효력을 발휘해 사자가 거의 움직이지 않자 사자를 들어 배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흥분되기도 하고 혹시 사자가 갑자기 깨면 어쩌나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연구팀은 무섭지도 않은지 수술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들어온 백두산호랑이 ‘낭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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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녹색 수술천을 사자의 몸에 올리고 배 부분만 드러낸다. 배의 솜털을 깎고 메스로 길게 배를 가른 후 수술을 시작했다. 보통 동물의 몸에 수정란을 넣어주는 작업은 황 교수가 직접 한다. 황 교수는 몇번의 익숙한 손놀림으로 난관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곳에 체세포복제기법으로 복제한 호랑이수정란을 넣어주었다(난관을 타고 내려간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면 사자의 뱃속에서 호랑이새끼가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후 황 교수는 재빠른 솜씨로 배를 봉합한 후 수술 부위를 소독하고 작업을 끝냈다.

호랑이복제는 소나 돼지를 복제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소나 돼지는 그들의 종족 내에서 복제가 가능하다. 예컨대 소는 소의 난자를 이용해 복제배아를 만들고 나중에 암소의 자궁에 복제수정란을 넣어준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소나 돼지는 도축장에서 버려지는 난소를 갖고 와서 난자를 채취하기 때문에 난자를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다.

그런데 호랑이는 호랑이 자체가 귀한 동물이므로 도축장에서 난자를 구할 수가 없다. 굳이 난자를 얻겠다면 암호랑이를 마취시켜 난소에서 난자를 채취해야 한다. 또 호랑이는 사람처럼 매달 일정하게 난자가 나오는 게 아니라 발정기가 되어야 난자가 배출되므로 채취 시기도 제한된다. 황 교수의 표현대로 “그 사나운 호랑이가 툭 치면 죽는 건 난데 어떻게 난자를 채취하겠냐”이다. 그래서 황 교수팀은 소나 고양이의 난자를 대신 이용했다(소의 난자로는 호랑이 체세포 융합기술을 터득했고 실제 복제과정에서는 고양이 난자를 사용한다).

결국 호랑이복제 과정은 첫째, 고양이의 난자에서 핵을 빼고 둘째, 호랑이의 귀에서 떼온 체세포를 고양이의 난자와 융합시켜 세째, 사자의 뱃속에 넣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체세포는 호랑이에게서, 난자는 고양이에게서, 임신과 출산은 사자가 담당한다. 이렇게 3가지 종(種) 사이의 복제는 영롱이 복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어려운 작업이었다.

황 교수는 2000년초부터 호랑이 복제에 매달려 임신 말기까지 성공적으로 진행시켰다. 호랑이를 뱃속에 밴 대리모 사자(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사자가 대리모다)는 유방이 커지고 배가 불러와 겉으로 보기에 임신에 성공한 것 같았다. 임신 말기로 출산을 조금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대리모 암사자가 재발정을 일으켰다. 자세히 살펴보니 유방이 줄어드는 등 유산의 징후가 발견됐다. 착상에 성공했던 5마리의 대리모가 모두 유산이 되자 황 교수는 “호랑이 복제가 실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종(이종) 사이의 체세포 핵이식 기술을 개발했으며 이를 특허로 출원했다.

이러한 황 교수의 호랑이 복제 과정에서 사실은 북한에서 건너온 백두산 호랑이 ‘낭림’이를 복제했다는 사실은 이후 경향신문 특종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낭림이는 1993년 낭림산맥에서 생포한 야생 호랑이로 김일성 주석이 이름을 붙여준 호랑이다. 이 기사가 나가자 서울대공원과 서울시측은 1999년 1월 배편으로 북한의 호랑이를 들여온 사실을 시인했다. 낭림이뿐 아니라 반달가슴곰, 은여우, 여우, 삵, 풍산개 등도 같이 들어왔음이 차후에 밝혀졌다(서울대공원 동물원은 당시 북한의 평양중앙동물원과 희귀 야생동물 교류 사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면 평양중앙동물원 코너에서 그때 북한에서 왔던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다. 참, 낭림이는 다른 호랑이와 섞어놓기가 힘들어 방사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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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2004년 여름 황우석 교수 연구실을 방문했던 안철수 사장 가족(오른쪽부터 안 사장과 부인, 딸, 황 교수, 필자) 







1999년 그해 연말 열렸던 각종 시상식에서 ‘올해의 과학자상’은 대부분 황우석 교수가 휩쓸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절, 황 교수는 복제소 영롱이로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과학계의 스타였다. 정보통신분야에는 또 한 명의 스타가 있었으니 안철수 사장이다. 두 사람은 그 시절부터 한국의 대표 과학자, 대표 벤처기업가로 자리매김하면서 현재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는 내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황 교수를 만나게 된 과정은 앞의 연재 글에 나와 있듯이 1998년 가을이었다. 내가 안철수 사장을 처음 만난 것도 1998년이었다. 지금은 안철수연구소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서울 남부터미널역 근교 허름한 빌딩에서 고작 10여명의 직원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자에게 예의바르고 진지하게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던 안 사장의 앳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기사 게재 순서
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2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3 브루셀라 백신 소동(하)
4 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5 대학 시절의 황우석
6 복제소 영롱이 태어나다
7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8 백두산 호랑이 극비 복제작전
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13 인간배아복제에 도전하다
14 배아복제 2건 공통점과 차이점
15 황우석 사단이 움직인다
16 황우석을 후원하는 사람들
17 세계 속의 황우석
18 인간배아와 줄기세포
19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20 미래를 위한 제언







*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1999년 말 한국과학기자협회에서는 올해의 과학자상으로 황 교수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으로 안 사장을 선정했다. 당시 과학과 정보통신 분야를 맡고 있던 나는 두 분을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같은 상을 받게 됐으니 한번 만나서 식사나 하자”고 제안했는데 둘 다 서로를 너무 만나고 싶었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스쳐가는 장소에서 얼굴을 본 적은 있으나 정식으로 말을 해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만남의 장소는 아마 서울 삼성동의 한 일식집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3자회동’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해에 서너 번씩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와 벤처기업가가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두 사람은 세상 유행에 둔감하다. 최근 황 교수가 “박주영이 누구에요?”라고 반문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황 교수는 TV 자체를 안 보기 때문에 연예인이니 월드컵이니 이런 소식을 전혀 모른다. 클론의 강원래 씨도 척수마비가 된 뒤에 그 사람이 가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런 판국이니 일단 연예인 얘기는 대화 주제가 안 된다.

그나마 사업을 하는 안 사장이 황 교수보다는 조금 나은데 거의 오십보백보 수준이었다. 한번은 그때 정보통신업계에서 회자되던 어느 벤처 기업가의 불륜 소문을 우연히 말한 적이 있는데(보통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재미있어 하지 않는가), 안 사장이 그 회사를 얼마나 걱정하던지 다시는 그런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하는 얘기는 참으로 재미없고 도덕적인 것들이었다. 생명공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 과학자들의 현실, 세상을 올바르게 살기 위한 방법, ……. 안 사장은 자신이 읽은 책 얘기를 자주 했다. 황 교수는 자신의 연구 내용이나 최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 참, 선거철이 되면 둘 다 정치권으로부터 엄청난 ‘오퍼’(?)를 받았는데 어떻게 정계 입문 제안을 거절했는지 그 노하우를 공개하느라 바빴다.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난 황우석 교수(오른쪽)와 안철수 사장(왼쪽), 그리고 필자(2004년 봄) 


2004년 2월 황 교수는 전 세계 언론들 앞에서 스타가 됐다. 국내 언론에도 소개됐듯이 황 교수는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사이언스 표지논문으로 채택됐고 영국 BBC, 미국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에서 앞다투어 황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런데 언론에 소개되지 않은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으니 마침 시애틀을 방문 중이던 안철수 사장이 이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황 교수가 있던 호텔로 찾아가 축하인사를 했다(안 사장과 서울대 의대 동기동창인 부인은 당시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듣고 나도 기분이 좋았다.

2004년 8월의 어느날 안 사장 가족은 서울대 수의학과로 나들이를 했다. 원래는 우리의 ‘정기적인 3인 회동’을 하려던 날이었다. 그러나 안 사장은 부인과 딸이 미국에서 와 있어서 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사모님과 따님이랑 같이 만나요. 좀 일찍 와서 황 교수님 실험실도 구경하면 좋겠네요.”(나)
“그래도 될까요. 황 교수님, 너무 바쁘실텐데.”(안 사장은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황 교수와 친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방해될까 봐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고교생이던 안사장의 딸은 실험실 방문에 흥분해서 너무나 즐거워했다. 식사 자리에서 황 교수는 갑자기 미국에 전화를 걸었다. 황 교수 왈, 미국에 유학 중인 둘째 아들이 안철수 사장님을 무척 존경하는데 아빠가 안 사장님과 친하다고 하니 안 믿는다며 안 사장이 직접 몇 마디 해주라는 것이다. 안 사장은 그 자리에서 황 교수 아들과 전화로 덕담을 나누었다. 그날 황 교수의 아들은 안 사장을 존경한다고 하고, 안 사장의 딸은 황 교수에게 사인을 받았다. 참 흐뭇한 광경이었다.

나는 취재를 통해 두 사람을 만나게 됐지만 이들을 알게 된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에 대해 말하자면 자신의 일에 무척 열정적이다. 또 유명해졌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바른 길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가끔 회사 일이 잘 안되거나 개인적인 고민이 있을 때도 이들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고 새로운 힘이 솟는다는 느낌이 든다.

독자들이 궁금할 테니 한 가지 더, 지난 3월 은퇴 선언을 한 안철수 사장은 오랜 ‘기러기 남편’(안 사장은 부인을 공부시키기 위해 떨어져 있으므로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기러기 남편이라 주장한다) 생활을 끝내고 지금 미국에서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다. 안 사장은 서너 달 동안 자신이 공부할 분야와 다닐 대학에 대해 알아보았으며 9월부터 새로운 학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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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인간배아복제에 도전하다





















2004년 2월 세계최초의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을 발표한 후 귀국하는 황우석 교수와 문신용교수의 모습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를 복제해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 결과는 2004년 2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연례회의 때 주요 성과로 발표돼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AAAS란 사이언스를 발간하는 협회 이름으로 국내에서는 ‘사이언스 주최 기자간담회’로 소개되기도 했다). 미국 뉴욕타임즈 1면에 황 교수가 대서 특필됐던 상황을 아마도 많은 이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소 복제 전문가로 알려진 황 교수가 인간줄기세포를 만들었다니 연결이 잘 안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줄기세포를 만드는 과정의 가장 기초적인 방법인 ‘체세포 핵이식’이 바로 동물 복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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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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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황 교수는 영롱이가 태어난 이후 인간 세포도 같은 방법으로 핵이식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과학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관심이 많은데 과학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궁금했을까.

황 교수가 언제부터 인간의 세포를 실험에 사용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최소 5년은 거슬러 올라간다. 황 교수는 2000년에 이미 인간의 세포에서 핵을 떼어내 핵을 제거한 난자에 집어넣는 실험을 실시했다.

2000년 8월 10일 황교수는 “36세의 한국인 남성에게서 채취한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 실험을 통해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기술은 한 달여 전인 6월 30일 미국 등 세계 15개국에 국제 특허를 내놓았다(이때 사용한 난자에 대해 황 교수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소의 난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바로 2004년 발표한 인간줄기세포의 원형인 셈이다. 황 교수는 당시 “배반포 상태에서 내부 세포덩어리를 분리, 여기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얻어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전 세계 생명공학계는 2가지 방면에서 큰 혁명적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997년 복제양 돌리의 탄생으로 시작된 체세포동물복제 기술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98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톰슨박사가 인간의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만들어낸 것이다. 줄기세포(stem cell)란 모든 인간장기로 분화될 수 있는 만능세포로 당시에는 성체에서밖에 만들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배아에서도 줄기세포 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톰슨 박사의 연구로 확인되었다. 두 가지 연구 결과를 합친다면 체세포핵이식 기술로 인간의 배아를 복제한 다음, 여기서 줄기세포를 추출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인간의 세포로 복제배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은커녕 원숭이의 복제배아도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황 교수가 인간배아복제를 시작할 때 주변에서는 모두 다 “무모한 일”이라고 말렸다. 황 교수는 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를 시작, 4년여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요즘 황 교수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미 피츠버그대 제럴드 섀턴(Gerald Schatten) 교수와 황 교수 사이에 재미있는 뒷얘기가 있다. 섀턴 교수는 원래 오리건주 영장류센터에서 원숭이 복제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생식세포를 이용해 붉은털원숭이 복제에 성공한 후 체세포핵이식법으로 원숭이를 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인간난자에 체세포핵이식 기술로 공여자의 핵을 집어넣는 현미경 사진  

그는 아무리 애를 써도 원숭이의 체세포복제배아를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섀튼 박사는 2003년 4월 사이언스에 “영장류에서는 체세포복제배아가 특정 시기 이상으로 분화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인간의 체세포복제배아를 연구하던 황 교수는 실의에 잠겼다. 세계적인 영장류 전문가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공식 발표한 것을 한국의 이름 없는 한 과학자가 성공할 수 있을까. 수년간 인간배아복제에 매달려온 연구팀 내부에서도 회의하는 기색이 보였다. 연구진들도 지쳐갔다. 그러나 여기서 황 교수는 그만두지 않고 ‘고(go)’를 외쳤다.

2003년 가을, 황 교수를 만났을 때 그는 얼굴빛이 아주 나빴다.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다. 그는 “요즘 상당히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박사 공부를 위해 휴직 중이었는데 “황 교수가 정말 ‘한 건’을 준비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앞뒤 정황을 견줘볼 때 인간배아줄기세포는 2003년 여름쯤에 이미 완성되었던 것 같다.

2003년 가을과 겨울 사이, 제럴드 섀튼 박사 연구팀의 한 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황 교수는 이때 인간배아를 배양한 최근의 성과를 이 연구원에게 보여줄지 말지 고민을 했다. 세계적인 전문가가 인정해준다면 황 교수팀이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데 엄청난 힘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고 발표했던 만큼 자신들의 주장을 뒤엎은 황 교수팀의 연구 업적을 솔직히 인정해줄지 의문스러웠다. 만에 하나 황 교수팀의 연구결과만 살짝 보고 가서 자신들이 연구를 먼저 하고 발표해 버릴 수도 있다. 이 모든 우려들이 섞인 가운데 황 교수는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온 연구원에게 인간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내용을 공개했다. 실험 현장도 보여주었다. 이를 본 연구원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부로 섀튼의 해가 지고 내일부터 우석의 해가 뜰 것이다”

섀튼 교수는 황 교수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는 과정도 도와주었고 논문 심사과정에서 다른 전문가들이 반신반의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자신이 나서서 설명해주었다. 또 미국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때 발표할 내용에 대해 모니터링 해주었다. 사용할 단어 하나하나까지 지정해주었다는 후문이다. 아마도 섀튼의 활약이 없었다면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관련 논문을 낸 적이 한번도 없던 한국의 과학자에게 이렇게 많은 조명과 찬사가 쏟아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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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황우석


 





















▲ 지난 8월초 서울에 모인 이안 윌머트박사, 황우석교수, 제럴드 섀튼교수  ⓒ





황우석 교수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은 어떨까. 이에 대해 우리는 2가지 의견을 듣는다. 하나는 황 교수가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으로 세계적인 거물이 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국내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해외의 과학계가 황 교수를 엄청난 과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전 세계 사람들을 일일이 대면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과학계에 설문 조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황 교수의 연구를 보도한 언론들의 반응과 황 교수의 해외 일정 등을 보면 그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04년 2월 미 시애틀에서 열린 사이언스 기자간담회(정확히는 미국 AAAS주최 연례학술대회) 때만 해도 황 교수는 세계 과학계에서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이안 윌무트 박사처럼 복제로 이름을 날리지도 않았고 줄기세포 분야에서 ‘빅’ 논문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누가 몇년에 발표한 논문”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기억하는 해외 과학계에서 황 교수는 ‘경력을 알 수 없는’ 한국의 한 과학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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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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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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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황 교수와 서울대 문신용 교수는 외로운 강연을 했다. 그들은 시애틀 시내에서 30분이나 떨어진 값싼 호텔에서 투숙하며 AAAS 연례회의장을 오갔다. 과학계는 황교수팀의 발표 후 연구 내용에 대해 놀라움과 찬사를 보내면서도 의문의 눈초리도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이 난자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며 미국 등 선진국들이 윤리 문제에 막혀 연구를 하지 못했던 틈새를 공략한 성공”이라는 해석을 했다. 또 240여개의 난자를 이용해 단 1개의 줄기세포를 배양한 사실(특히 난자를 제공한 여성의 체세포로 배양에 성공했다)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했다.

1년이 지난 올해 5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사이언스 기자간담회. 황우석 교수가 난치병 환자의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한 내용을 발표했다. 지난해와 가장 달라진 모습은 제럴드 섀턴 교수(미 피츠버그대)의 존재였다. 논문의 공동저자이며 세계적인 영장류복제 전문가인 섀턴 교수는 황 교수의 연구 내용에 대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생명공학 혁명”이라고 평가하며 힘을 실어줬다.

해외 언론들의 반응도 지난해보다 한 단계 높아졌다. 한 해외 언론이 타이틀로 쓴 “이제는 더 이상 의문이 없다”가 바로 해외에서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황 교수팀이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학자들조차 이번 연구결과에 열광하고 있다고 밝히며 “작년에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복제해냈을 때 과학자들은 그 과정이 너무 번거로워서 되풀이할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고 일부는 연구가 옳은지 자체를 의심했었지만 이번 연구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고 보도했다. 윤리 문제에 대한 언급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있었지만 기사의 행간에서 황 교수의 연구 내용에 대해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줄기세포협약관련 회의에 참석한 황우석 교수  ⓒ

나는 최근 미국 샌디에이고의 바이오클러스터를 방문했을 때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와 황 교수의 업적이 지난해보다 훨씬 많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었다.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만난 UC샌디에이고 마리에 앤 폭스 총장은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에 관심이 많다”고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또 샌디에이고 지역의 생명과학전문연구소인 번햄연구소(www.burnham.org)는 앞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집중할 예정이라며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이 연구소로 이사 온 에반 스나이더 박사는 한국의 미즈메디 병원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닥터 황이 만든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 우리가 확립해놓은 분화 연구를 함께 하면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며 연구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결국 미국의 과학자들이 황 교수를 ‘한국에서 온 과학자’에서 ‘닥터 황’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이제 황 교수는 과학자들을 만나러 굳이 ‘해외 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직접 해외를 찾아가 과학자들을 만나지 않아도 그들이 직접 한국을 찾아오는 단계가 된 것 같다. 앞글에서도 말했듯이 지난 7월 섀튼 교수와 영국의 윌머트 박사가 직접 한국에 와서 공동 실험을 진행했다. 앞으로 섀튼 교수와는 원숭이 배아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를, 윌머트 박사와는 루게릭병 도전에 나설 계획이다. 오는 10월에는 우리나라에 줄기세포 은행이 세워지고 해외 연구자들이 이 은행을 이용할 것으로 보인다(서울대 의대 안규리 교수는 최근 줄기세포 은행이 꽤 빠른 속도로 진척 중이라고 귀띔해주었다).

황 교수의 해외 방문 일정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과학계에만 그 활동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 교수의 연구테마가 줄기세포, 난치병, 생명윤리와 관련이 있어서이겠지만 다양한 곳에서 초대를 많이 받는다. 지난해 10월 유엔에서 열린 세계 줄기세포협약을 위한 회의에 참석, 슈퍼맨의 주연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영상 메세지 앞에서 황 교수가 연설을 하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올해는 브라질에서 열린 임상유전학회에 참석한 데 이어 8월말 콜롬비아를 방문할 예정으로 황교수는 남미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이 글이 나갈 때쯤에는 콜롬비아에 가 있을 수도 있겠다).

황 교수의 높아진 위상만큼 우리나라의 위상도 높아지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줄기세포 연구의 세계적인 메카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무기는 황 교수팀의 체세포복제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그것 하나뿐이다. 줄기세포를 실용화하기까지 필요한 연구들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다.

미국 하버드대 스템셀연구소의 더글러스 멜튼 교수는 “한국은 정부의 지원 아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반면 미국은 정치, 윤리적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한다. 뒤집어보면 미국 정부가 지원을 해준다면 언제든지 한국의 연구 내용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과학계에 알려진 ‘닥터 황’의 이름을 발판으로 ‘한국의 스템셀 연구’가 더 많이 알려지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LAE&qnum=4298452


인간배아와 줄기세포





















▲ 영화 아일랜드에서 부호들에게 장기를 제공하기위해 복제인간을 만든다.   ⓒ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화제를 불러일으킨 다음, 영화 ‘아일랜드’가 개봉됐다. 황 교수의 인기 덕분인지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보다 높은 흥행 실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지금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점은 인간배아로 복제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느냐는 것과 줄기세포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 두 가지다.

주위에서 “황 교수의 연구가 발전하면 아일랜드처럼 인간 복제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때마다 “황 교수의 연구와 인간 복제는 출발점은 같으나 중간에 완전히 갈라진, 다른 방향의 연구”라고 얘기한다. 사람의 체세포를 떼어내 여성의 난자(무핵난자)에 삽입, 인간의 복제배아를 만든 부분까지는 인간복제의 과정과 같다. 인간복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복제배아를 대리모에 착상시키는 연구를 해야 한다.

그러나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인간복제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만들어내고, 이 줄기세포로 질병을 고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황 교수팀이 시도한 연구 중에 체세포배아복제까지는 인간복제와 같은 흐름이지만 이후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물줄기라 할 수 있다.





































































기사 게재 순서
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2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3 브루셀라 백신 소동(하)
4 농촌 출신 세계적 과학자
5 대학 시절의 황우석
6 복제소 영롱이 태어나다
7 복제소 진이와 김대중 대통령
8 백두산 호랑이 극비 복제작전
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10 다이어트도 하셨다면서요
11 소에서 돼지 연구로(상)
12 소에서 돼지 연구로(하)
13 인간배아복제에 도전하다
14 배아복제 2건 공통점과 차이점
15 황우석 사단이 움직인다
16 황우석을 후원하는 사람들
17 세계 속의 황우석
18 인간배아와 줄기세포
19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20 미래를 위한 제언







*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여러 과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할 때 “인간 복제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황우석 교수는 복제인간 출현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앞으로 100년 내에 복제 인간이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근거로 ▲충분한 수의 인간 난자를 구할 수 없으며 ▲인간 대리모는 더 구하기 어렵고 ▲인간의 난자는 동물의 난자보다 훨씬 다루기가 힘들고 ▲기형아가 태어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다 영장류의 복제는 불가능하다는 게 최근 제럴드 섀튼 박사와 황우석 교수가 잠정적으로 낸 결론이다. 요약하면 인간은 영장류라는 특수성과 인간 난자의 특수성, 윤리적인 문제 등으로 복제인간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고 있다.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 박세필 박사는 “윤리적인 논의를 제외하고 과학적으로만 따진다면 인간 복제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특히 “180여 개의 인간난자에서 11개의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것은 엄청난 효율이며, (이론적으로는) 인간 복제가 가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영화 아일랜드처럼 인간의 성장속도를 빨리 하는 ‘속성재배’는 현재 과학으로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론적으로 가능하다’에 방점을 둔다면 복제인간 탄생의 위험이 있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임을 중시한다면 복제 인간은 만들 수 없다. 여하튼 분명한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인간개체복제를 금지하고 있으며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연구가 아니라 줄기세포를 만드는 연구이며, 앞으로도 줄기세포 연구에 집중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줄기세포란 또 무엇인가. 완전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줄기세포를 ‘밀가루 반죽’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밀가루 반죽만 있으면 빵, 국수, 과자 같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줄기세포는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반죽 상태의 만능세포이다. 줄기세포로 심장도 만들어지고, 간도 만들어지고 피부 세포도 만들어진다.



















▲ 줄기세포와 밀가루 반죽 비교 그림.  ⓒ


줄기세포는 크게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로 나뉜다. 황 교수팀이 만들어낸 것은 배아줄기세포의 일종이고, 우리가 ‘제대혈’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성체줄기세포이다. 성체줄기세포는 빵이나 국수에 아직 익지 않고 남아 있는 반죽을 찾아내는 작업이다(다 자란 한 성체에서 찾았다고 하여 성체줄기세포라고 한다).

반면 배아줄기세포는 물과 밀가루를 이용해 밀가루반죽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반죽만 만들면 되는데 배아줄기세포 만들기가 그렇게 어려운 작업일까? 밀가루 반죽은 수천년 동안 우리가 만들어와서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가 만들어지는 작업은 어머니의 뱃속, 즉 자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거의 알지 못한다. 물과 밀가루를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 어떻게 주물러야 제대로 된 반죽이 되는지 등 비법을 알아내야 한다.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기가 성체줄기세포에 비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 위 그림처럼 인간배아를 만드는 것 까지는 복제인간 생산과정과 같다.  ⓒ




















▲ 그러나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은 복제인간 연구와 다르다.   ⓒ


황 교수는 인간배아줄기세포 추출과 배양의 대가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황 교수팀은 현재까지, 체세포복제기법으로 인간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연구팀이다. 똑같은 연구 분야의 경쟁자로는 영국 뉴캐슬대학 연구팀이 있다. 뉴캐슬대학 연구팀은 지난해 체세포복제배아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연구를 승인받고 시작했다. 잔여배아에서 처음으로 줄기세포를 만든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톰슨 박사나 최근 인간배아줄기세포를 대량으로 만들고 있는 하버드대 더글라스 멜턴 박사도 넓은 의미에서 경쟁자라 할 수 있다(체세포복제기법에 능통한 이안 윌무트 박사와 제럴드 섀턴 박사는 황 교수팀과 경쟁하기보다는 공동 연구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황 교수팀은 인간에게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배아줄기세포를 처음으로 만들어내 줄기세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황 교수는 지난 5월 런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전체 7개의 문 중에 서너 개를 한꺼번에 열어젖힌 성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귀국 기자회견 때는 “큰 문은 열었고 사립문만 남았다”고 표현했다(나는 둘 중에 런던 때의 비유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실용화 작업이다. 황 교수팀이 만든 체세포배아줄기세포로 실용화가 먼저 될지, 톰슨 박사의 잔여배아줄기세포로 실용화가 먼저 될지, 아니면 성체줄기세포로 실용화가 먼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궁금한, “줄기세포 연구는 언제 실용화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이 글에서 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줄기세포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들일수록 예측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분화와 발생의 비밀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는 언제 결실을 맺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최근의 발 빠른 성과와 잠재력에 대해 놀라고 있다. 앞으로 줄기세포 연구가 얼마나 성장할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줄기세포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아둬야 할 것이다. 
링크

 

생명윤리 논쟁과 황우석








▲ 황우석교수와 천주교 서울대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생명윤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위해 만났다(2005년 6월).   ⓒ
최근 원자력연구소의 과학자들을 만났다. 한참을 얘기하던 중에 그들은 “우리는 국가를 위해 원자력을 연구하고 있는데 사회가 원자력 종사자들을 나쁜 놈으로 인식하고 있어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 1990년대 환경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올랐을 때 원자력은 ‘인류의 환경을 파괴하는 주모자’로 비판을 받았다. 지금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아직도 원자력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부담감은 남아있는 듯 하다.

원자력을 연구하는 과학자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많고 할말도 많을 것이다. 또 연구자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는 1990년대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기때문에 원자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아지고 안전성 연구도 더 확보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연구는 인간복제와 아무 관련이 없어요. 연구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수십번 검토합니다. 사이언스에서도 연구 과정에 따른 윤리적인 검토도 다 했던 거구요. 국내에서 왜들 이러는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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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훈클럽 초청 첫 과학자
2 브루셀라 백신 소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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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생명윤리 논쟁이 가장 격렬했을 때가 2004년 상반기였다. 나는 황교수가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이때만은 상당히 높은 어조로 심경을 토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교수는 2004년 2월 배아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배양을 발표, 과학자로서 커다란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생명윤리에 저촉되는 연구를 하는 과학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서 황교수팀의 여성연구원이 난자를 제공했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황교수팀은 여성 연구원이 난자를 제공한 사실이 없으며 의사 소통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문제라고 해명했다).

황교수를 비판하는 주요 논점을 정리하면 크게 생명을 바라보는 철학적인 문제와 연구 과정의 윤리성으로 나뉜다.

생명을 바라보는 철학적인 문제는 주로 종교계와 윤리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다.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정리해보면 ▲인간배아를 다루는 행위가 신의 섭리에 위배된다 ▲인간의 체세포로 배아복제연구를 하면 향후 인간복제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 ▲줄기세포를 위해 만들어진 배아를 파괴하는 것은 살인행위다 라는 부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연구 과정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2004년 5월 한국생명윤리학회가 띄운 공개 석명서에 잘 나와 있다. 주요 내용은 ▲인간배아복제연구에 사용한 난자의 출처 ▲연구의 윤리성을 검토하는 한양대병원 기관심사윤리위원회(IRB)의 심사가 제대로 되었는지 ▲연구에 사용한 연구비의 출처 ▲논문 저자 문제 등 4가지였다.







▲ 인간복제의 위험을 다룬 슈피겔지(1997년 2월).  ⓒ
황교수팀은 ▲체세포로 복제한 배아는 세포덩어리이므로 생명으로 볼 수 없다 ▲인간배아복제가 인간복제로 이어질 위험성은 없으며 ▲여성의 난자제공 등 연구과정의 윤리적인 부분은 연구팀 내 전문가가 잘 검토하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공방은 2005년 5월 줄기세포 연구 ‘2탄’이 발표됐을 때도 되풀이되었다. 천주교, 유교 등 종교단체에서 인간복제 위험을 들고 나왔으며 생명윤리학자들은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따른 생명윤리 공개토론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은 체세포배아복제기법을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의 불가피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났어도 논쟁 안에 든 내용은 비슷했다. 왜 과거에 했던 문제들이 자꾸 되풀이해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생명윤리 자체가 종교, 과학,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이 얽힌 복잡한 사안이며 ‘정답’을 낼 수 없는 문제기때문이다.

연구를 하는 과학자 입장에서 자신의 연구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은 참으로 따가울 것이다. 원자력 연구를 예로 들었듯이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조국을 위해 혹은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전세계에서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나오는 기술 동향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연구 외적인 부분에 신경을 써야하니 이중고에 시달릴 것이다. 황우석 교수도 생명윤리 문제에 대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그럴 때마다 절에서 불공을 드리며 마음을 다스린다고 한다.







▲ 인간배아연구를 둘러싼 국내의 생명윤리 토론회 모습(2004년 8월).  ⓒ
그러나 황교수만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윤리학자들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어찌보면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것에 대해 받은 비난의 강도는 생명윤리학자들이 더 크다.

“생명윤리학자 중에서도 배아복제 연구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배아복제 연구 전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마디만 하면 황우석교수의 연구를 못하게 하는 세력이라고 몰아대니 말하기가 겁납니다.”(한 생명윤리학자)

양측을 함께 취재하는 나로서도 이 문제만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사실 머리만 아픈 것이 아니라 가슴도 아프다). 지금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해 부가되는 생명윤리 논쟁은 아마도 원자력을 둘러싼 환경 논쟁과 비슷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연구 자체가 인류의 희망과 재앙이라는 2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연구자들이 사회적인 논의에 깊숙히 관련되어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과학자 사회에서 생명윤리를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면 한다. 현재 생명윤리 논쟁은 ‘황우석 연구팀 대 종교단체 혹은 윤리학자’의 구도로 비치고 있고 배아 연구 종사자에게 국한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생명윤리 문제는 실험동물, GMO, DNA 등 다양한 과학분야에 모두 해당되는 문제이다. 지금은 생명윤리 논쟁이 대립 구도로 비치지만 시간이 좀더 흐르면 안정기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http://www.sciencetimes.co.kr/data/article/12000/0000011443.jsp


 


 


미래를 위한 제언


드디어 황우석 취재 X파일의 마지막편이 되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미래를 위한 제언’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 글을 완성하는 지금까지도 나의 고민은 진행 중이다.

이달 초 나는 지방의 동물복제 연구자들을 취재하러 갔었다. 이제 초기 성과물을 내고 다음 연구를 위해 프로젝트를 짜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1999년 영롱이가 태어날 때의 황 교수가 떠올랐다.

그들은 학교에서 농장을 빌리고, 실험 기기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대학원에 좀더 진학해주었으면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황 교수도 1998년, 1999년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마도 ‘황우석 카리스마’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기사 게재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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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황우석과 안철수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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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게재 순서와 내용은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과학을 무기로 대중에 다가간 스타 과학자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내용이 부각되는 반면, 요즘 황 교수는 그 자신이 기사의 중심에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복제소 영롱이가 탄생했을 때만 하더라도 ‘서울대 수의학과 생물공학연구팀 황우석 교수’라고 썼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기사의 주인공은 ‘황우석 사단’, ‘황우석 연구소’, ‘황우석 연구팀’ 등으로 바뀌어 있었다(물론 공식적인 명칭은 서울대 수의학과 생물공학연구팀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초인적인 체력, 외부 강연과 연구를 병행하는 스케줄 관리 능력, 연구팀을 관리하고 장악하는 추진력, 여기에다 대중에 대한 강한 흡인력 등이 황우석 카리스마의 밑거름일 것이다.

황우석 카리스마는 그동안 황 교수팀의 생명공학연구를, 또 한국의 생명공학연구를 발전시켜왔지만 일부 한계를 가질 수도 있다. 지난 6월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토론자 중 한 명이 “지금 황 교수님 연구팀은 통제받지 않는 줄기세포 권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황 교수의 연구 자체가 워낙 보안이 중요해지고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와 별도로 황 교수팀이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몇몇 기자들이 받고 있는 것 같다.




















▲ 황우석 교수팀 농장.  ⓒ


나도 황 교수팀을 취재하면서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는데 경상대 생명과학부를 취재하면서 그 원인을 발견했다. 경상대 생명과학연구센터는 대학원생들이 자라고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경상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해외 박사과정에서, 혹은 박사후연구원(포닥)으로 셀,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서울대 수의학과 생물공학연구팀에서는 연구팀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이 부각된 일이 많지 않았다. 물론 체세포배아복제나 줄기세포연구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시스템으로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경상대와는 연구 내용에서 특수성이 있다.

또 1980년대부터 대학 차원에서 육성한 연구센터와 교수 개인의 능력으로 키워온 연구팀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금 황 교수팀에게 그 부분까지 바라는 것이 성급할 수 있겠지만) 후배 연구자들이 황 교수를 뛰어넘어 많은 활약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면에서 안규리 교수가 언론에 전면으로 등장하고 이병천 교수가 스너피 복제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점 등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황우석 카리스마를 뛰어넘자’는 얘기는 단순히 황 교수팀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생명공학 연구에, 나아가 우리나라 과학계에 필요한 일이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주변으로부터 황 교수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듣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황 교수의 연구 업적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황 교수로 인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공계 기피현상’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과학자의 연구 업적이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영웅 스토리’로 미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줄기세포 연구의 장밋빛 미래가 너무 부각되고, 과학자들이 열악한 연구 환경을 희생정신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은 장기적인 과학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우려들은 이미 황우석 교수 연구팀에 전달되어 있으며 이를 감안하여 더 발전할 것으로 생각한다.


 


 


 


http://www.sciencetimes.co.kr/data/article/12000/0000011516.jsp


 


 


 




















미 스탠포드대학의 한국 유학생들에게 강연 중인 황우석 교수 





“여러분들이 앞으로 과학 한국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올 때까지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미 스탠포드대학에서 열린 한인학생회 초청 강연회. 황우석 교수의 마지막 멘트가 떨어지자 200여명의 청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립 박수를 쏟아냈다.

이날 강연은 황 교수가 한 달 반의 침묵을 깨고 다시 시작한 해외 방문의 첫 행사였다. 지난 5월 영국 런던의 사이언스 미디어센터에서 난치성 환자의 줄기세포 배양 연구결과를 발표한 후 황우석 교수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6월 한 달 동안 그는 브라질에서 열린 임상유전학회에 참석하고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줄기세포 정상회담에서 ‘세계적 연구 업적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해외 나들이를 했다.

그러나 7월 한 달은 전혀 해외로 나가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외부 활동을 많이 줄이고 실험실에 틀어박혔다. 전화를 걸면 “중요한 실험이 있어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 한다. 해외로 나가는 대신 8월 초에 이안 윌무트 박사(영국 스코틀랜드대), 제럴드 섀튼 교수(미국 피츠버그의대)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공동 실험을 했다.

이러던 황 교수가 갑자기 미국에 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중요한 행사일까 궁금해서 나도 동행했는데 알고 보니 미국의 한인 과학자들이 초청한 강연이었다. 하나는 UC어바인대학에서 열리는 재미한인과학자협회의 학술대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스탠포드대학 한인학생회 초청이었다.

그는 스탠포드 강연을 위해 주어진 일정을 몇 차례나 바꾸면서 ‘무박 3일’의 일정을 만들어냈다. 그의 일정은 [12일 오후 3시 인천 출발(한국시간) -〉 12일 오전 11시 LA 도착(이하 미국시간) -〉 어바인으로 이동 -〉 오후 2시 재미한인과학자대회 강연 -〉 오후 3시 25분 산호세발 -〉 4시 30분 산호세 도착 -〉 스탠포드대학으로 이동 -〉 5시 30분 스탠포드대학 강연 -〉 12일 오후 9시 샌프란시스코 출발 -〉 14일 새벽 한국 도착]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틀을 자고 미국에서 딱 하루를 머무는 희한한 일정이었다(이 때문에 LA공항의 입국심사대 직원이 ‘숙소가 없는 여행이 어딨냐’고 한참을 캐물어 수속이 지연되기도 했다).



















이번 강연에는 청와대 박기영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함께 했다.  

스탠포드 강연은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한국의 과학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1시간 후 황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위에 언급한 일정대로 12시간의 비행과 잦은 이동으로 피곤했는지 강의를 시작할 때는 다소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강연이 진행되면서 점점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황 교수의 대중 강연은 크게 3가지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수많은 강연을 거치며 다듬어진 프리젠테이션 파일은 이제는 하나의 작품이라 할 만큼 높은 수준이다.

먼저 복제 동물 생산. 세계적인 동물 복제 현황과 황 교수의 연구팀에서 만든 복제소 영롱이와 복제돼지 생산과정을 설명한다. 또 황 교수가 시도했던 백두산호랑이와 최근에 성공한 복제개 스너피도 복제과정이 상세히 담겨 있다.

두 번째는 이종이식 연구. 인간에게 장기를 공급하는 미니복제돼지가 탄생하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보인다. 또 돼지의 심장을 이식 수술하는 장면도 소개한다. 돼지의 심장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다른 동물에게 이식된 후 급성면역거부반응으로 심장 주변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도 보인다. 황 교수는 “이러한 면역거부반응을 모두 제거하고 인간에게 장기를 제공하는 것이 최종목표”라고 설명한다.

세 번째는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 화면 가득히 난자가 보이고 난자의 핵을 빼내는 장면도 동영상으로 소개된다. 단 20여초에 불과한 이 장면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황 교수팀에서도 단 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러한 손놀림 기술을 전 세계가 탐내고 있다고 설명하자 학생들 사이에 감탄의 목소리가 터졌다.

황 교수의 강연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간중간에 농담도 많이 한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배고픈 것은 잘 참는데 배아픈 것은 못 참는 경향이 있더라”(공동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혹은 “그 큰 호랑이가 한번 치면 죽는 건 나인데 어떻게 난자를 입수하겠냐”(호랑이복제의 어려움을 설명하며)고 말하자 청중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안철수 사장 가족도 참석해 황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안 사장은 9월부터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를 할 예정으로 강연 전날 시애틀에서 팔로알토로 이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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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연을 끝낸 후 학생들과 1시간 남짓한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시간에 쫓겨 질의응답을 생략한 UC어바인대학에서의 강연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인 셈이다. 한 학생이 “연구가 잘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하자 “목표를 성취했을 때의 내 모습을 그려보며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는 자기최면을 건다”고 답했다. 또 생명윤리논쟁과 관련한 질문에는 “주말에 부처님을 찾아 절을 하며 나를 공격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며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연구가 잘 풀린다”고 설명했다.

황우석 교수가 스탠포드 강연을 하게 된 것은 스탠포드 한인학생회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지난 6월 스탠포드대학의 저명한 줄기세포 연구자들과 심포지엄을 할 때 한인 학생회 멤버들이 무작정 현장을 찾아왔다. 그들은 황 교수에게 “한국 학생들 앞에서도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황 교수는 “다음에 미국에 오는 길에 강연을 해주마”고 약속을 했다.

나는 황 교수의 마지막 멘트에서 그가 왜 스탠포드 강연에 특별한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모인 학생들 중에 생명공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러분들은 모두 한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들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앞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의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꼭 일해주십시오”

그 순간 황 교수가 요즘 자주 언급하는 ‘2막론’이 생각났다. 황 교수는 지난 5월 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내년쯤 줄기세포 연구의 1막이 내리고 2막이 올라간다”고 했다. 또 “2막의 지휘자는 그 연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임해야 하며 내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순간에는 흘려들었으나 UC어바인대학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때도 황 교수는 “우리팀은 오케스트라처럼 잘 조화되어야 한다”며 “앞으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황 교수가 혹시 어느 순간, 연구 일선에서 은퇴하고 후진 양성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직접 물어봐도 그의 스타일 상 ‘예스 or 노’를 정확히 답변해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스탠포드대학에서 학생들을 대하며 최선을 다하던 황 교수를 보며 내 마음에 잠시 스쳐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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