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세상 속으로’]신림동에만 편의점 108개 난립… 골목길 마주 보며 ‘제 살 깎아먹기’
경향신문 입력 : 2013-03-23 01:22: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230122125&code=940202
ㆍ‘편의점 간 거리 250m’ 공정위 권고 비웃듯 한 건물에 같은 브랜드 2개도
ㆍ편의점 4곳 중 1곳은 하루 매출 100만원도 안돼
“이제는 그만 가게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골목에 우리 가게뿐이었는데 하나씩 늘더니 이제는 열 개도 넘어요. 그만큼 매출도 줄어서 적자만 쌓이고….”(서울 신림동의 한 편의점 점주)
언제부터인가 편의점이 골목 곳곳마다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네에 1~2개 꼴로 있던 것이 이제는 길목마다 들어섰다. 그렇게 조성된 편의점은 전국에 2만3000여개나 된다. 편의점은 다른 프랜차이즈(소매가맹점) 사업에 비해 창업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너도 나도 점포를 열었다.
그런데 그것이 독이었다. 편의점이 우후죽순 생겨나 난립한 탓에 ‘창업 붐’은 이제 ‘폐업 붐’으로 연결되고 있다.
■ 4년 만에 점포 수 2배 이상 ‘가파른 증가’
민주통합당 김영주 의원실이 22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 현재 전국에서 편의점 2만3687개가 영업 중이다. CU, GS25, 미니스톱, 세븐일레븐(옛 바이더웨이 포함) 등 전국에 1000개 이상의 점포를 두고 있는 주요 4개 업체의 편의점만 집계한 결과다. 유명 브랜드가 아닌 편의점까지 더하면 3만여개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편의점 증가 추세는 가파르다. 2008년 1만1802개였던 총 점포 수는 2009년에 1만3152개로 1700여개가 늘었다. 이후 2010년 3000여개, 2011년엔 4200여개가 각각 순증했다. 불과 4년 만에 배 이상으로 증가한 셈이다.
가맹본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영점이 2008년 352개에서 지난해 10월 408개로 50여개 늘어난 반면 일반 창업자들이 문을 여는 가맹점은 같은 기간 1만1450개에서 2만3279개로 2배가량 늘었다.
편의점이 급증하다 보니 좁은 지역에 수십 개씩 난립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경향신문이 서울 대치동·신림동·화곡동 등 서울 시내 3개 동을 무작위로 뽑아 편의점 현황을 전수 조사한 결과 1개 동에서만 무려 80~100개의 편의점이 영업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신림동은 108곳, 대치동은 85곳, 화곡동은 89개의 편의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신림동 신림역 사거리 주변에만 30여개의 편의점이 운집해 있다. 유흥가와 오피스텔이 몰려 있어 상권이 발달한 곳이다. 골목 하나만 돌아가면 곧바로 1~2개가 눈에 보일 정도다. 걸어서 5분 정도에 1개씩 점포가 있었지만, 가깝게는 편의점끼리 좁은 길 하나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곳도 5~6개나 됐다.
■ 기술 필요없고 창업 비용 적어 너도나도
공정위가 지난해 11월 권고한 ‘편의점 간 거리 250m’라는 모범기준에 모두 위배되는 것이다. 특히 같은 브랜드의 편의점끼리 10m도 안되는 거리에 함께 있는 경우도 있었다. 걸어서 1분도 채 안 걸리는 간격이다.
대치동의 사정도 비슷했다. 선릉역 역세권에 30~40개가 몰려 있다. 주거보다는 사무실이 많은 빌딩촌이라 저녁보다는 대낮에 회사원들을 상대로 한 곳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한 건물에 같은 브랜드 편의점이 2개, 그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같은 브랜드 편의점까지 모두 3개가 몰려 있는 곳도 있었다.
주거지역이 많은 화곡동은 출·퇴근 시민이 몰리는 까치산역과 아파트 단지 앞 사거리 쪽이 20여개 정도씩 영업 중이다.
이렇게 편의점들이 난립하다 보니 매출이 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지난해 2월부터 신림동에 편의점을 내고 영업 중인 유모씨(32)는 자신이 개업한 이후 인근에 2개의 편의점이 새로 생겼다고 말했다. 처음 기대했던 매출은 예상과 달리 반토막이 났다. 유씨는 “300만원 정도의 수익을 기대했는데, 이젠 적자만 한 달에 150만원씩 나온다”며 “어쩔 수 없이 폐점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편의점 주인은 “신규 매장이 생기면 매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이제 동네 슈퍼마켓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모조리 편의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같은 브랜드 편의점이 가까이 몰리지 않게 한다고 해도, 다른 브랜드는 그렇지 않다”며 무분별하게 늘어나는 편의점 창업 붐의 문제를 지적했다.
실제로 창업 러시로 인한 매출 하락세는 확연했다.
공정위가 공개한 ‘주요 편의점 5개 업체의 가맹점 평균 매출 증감 추이’를 보면 2008년 5억3332만원이던 평균 연매출은 해마다 감소해 2011년 4억8276만원으로 줄었다. 한 편의점 업주는 “파이 하나를 놓고 여러 명이 달려들어 싸우게 한 결과가 뻔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매출이 부진한 편의점도 늘고 있다. 한국편의점협회 조사 결과 일일 매출 100만원 이하인 매출 부진 가맹점 수 비율은 2004년 13.1%에서 2011년에는 25.8%로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편의점 4개 중 1개는 하루 매출이 100만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편의점이 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유로는 간편한 창업 조건이 한몫하고 있다. 치킨·피자 프랜차이즈처럼 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할 필요도 없고, 창업비용도 상대적으로 적다. 누구나 쉽게 경험이 없어도 뛰어들 수 있다는 점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 경영난에 중도 폐점·운영권 양도 속출
하지만 이제 편의점 창업은 제살 깎아먹기 경쟁으로 비화하는 양상이다. 창업에 들인 본전은 고사하고 빚만 떠안고 폐업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김영주 의원실이 공정위로부터 받은 가맹점 증감 추이 자료를 보면, 2009년 계약해지를 한 점포가 465개에서 2011년 503개로 늘었다. 계약해지는 계약기간 중 점주가 중도 폐점을 한 사례다. 가맹점 점주간 운영권을 양도하는 ‘명의변경’ 사례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그만큼 편의점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신규 개점은 2009년 2750개에서 2011년 4992개로 두배 가까이 늘었다.
성공의 꿈을 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편의점 업계에 뛰어들고 있지만, 이미 과포화될 대로 되어버린 시장은 성공을 보장하기는커녕 그들의 꿈을 집어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