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가 뭐가 나쁘냐?
OBS 설립 과정서 6대 주주 CBS와 송사 벌였다 최근 승소한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오기로 방송사업 더 열심히 할 것”
한겨레21 등록 : 2013.05.02 16:11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5609.html
백성학(73) 영안모자 회장은 현재 전방위적으로 접점을 넓히고 있다. 한 달 전 기독교방송(CBS)과의 7년 송사를 끝낸 게 계기다. 2006년 경인방송(OBS) 출범 단계에서 불거진 최대주주 백 회장의 ‘스파이 논란’이 일단락됐다는 판단이다.
백 회장은 나름대로 ‘결백’을 입증했다는 생각에 각종 언론 인터뷰를 잇따라 진행 중이다. 4월3일 대법원 판결이 공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4월15일에 나온 <주간조선>은 백 회장의 인터뷰를 실었다. 곧이어 4월17일 출간된 월간 <신동아> 5월호에도 백 회장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다. <한겨레21>에도 백 회장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한겨레21>은 2006년 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그를 직접 인터뷰한 첫 인쇄매체였다.
‘미국 간첩’ 혐의를 받은 충격
이번 대법원 판결은 ‘CBS는 백 회장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간첩 의혹을 제기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삭제하라’는 게 내용이다. 당시 OBS 설립 과정에서 지분을 가졌던 CBS가 경영 주도권 장악을 위해 간첩 의혹을 의도적으로 제기했다는 게 백 회장 쪽 주장이다. 영안모자는 지분 29.56%를 가진 1대 주주(현재는 39.12%), CBS는 5.36% 지분으로 참여한 6대 주주(현재는 5.28%)였다. 문제가 된 2006년 10월31일~2007년 4월8일 CBS 기사의 제목을 보면,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미 정보당국에 국내 정세 보고’ ‘백 회장 수집 정보, 미 일류대 출신 번역 후 보내져’ ‘스파이는 언제든 용도폐기될 수 있다’ ‘국정원, 백성학의 수상한 활동 알고 있었다’ 등 백 회장의 간첩 행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내용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언론사 대주주가 되기는커녕 간첩죄로 형사처벌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을 상황이었다.
CBS는 보도 당시 “이 사건의 본질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비애국적인 국가정보 유출 의혹’에 관한 것”이라고 못박고, “경인방송을 둘러싼 경영권 갈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라고 전제했다. 백 회장과의 재판 과정에서도 CBS 쪽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정을 내세웠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것이 기사를 삭제해달라는 요구에 대한 거절 이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용이 진실하지 않거나 공익과 관련이 없는 기사 등으로 인격권이 침해되고 있는 상태에 있으면 기사 삭제 청구는 인정된다”며 49건의 CBS 기사에 대해 “진실이 아니거나 진실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삭제함이 상당하다”고 한 원심 판결이 타당하다고 봤다.
남한에선 보기 드문 ‘미국 간첩’ 혐의를 받은 충격 탓일까, 미국과의 깊은 인연을 자랑하는 백 회장은 재판을 받는 도중 사무실 곳곳에 놓였던 미국인들과의 기념사진을 모두 치워버렸다.
백 회장은 전쟁고아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미군들의 심부름꾼으로 보살핌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사업에 성공한 뒤 자신을 돌봐준 미군 병사를 수소문해서 끝내 찾아낸 일화는 미국에서도 큰 화제였다.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이 이야기를 접한 뒤 백 회장을 자택에 초대했다. 각종 취임식이나 한국전 참전 군인 행사에서 백 회장은 단골손님이었다.
그의 주력 상품인 모자가 가장 잘 팔리는 시장도 미국이었다. 상당 부분의 사업 기반을 미국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력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아칸소주 인근에 공장을 지을 땐 아칸소주 주지사 출신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지을 땐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인 존 매케인 전 공화당 대선 후보를 각각 알게 됐다.
녹록치 않은 OBS 경영 정상화
이렇게 쌓인 인연은 한국의 민간외교 자산이 됐다는 게 백 회장 쪽 얘기다. 4월22일 백 회장과의 인터뷰에 배석한 아들 백정수 부회장은 “역대 정권에서 민간 외교라인은 회장님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간첩 논란도 이런 배경이 원인이 됐던 것으로 백 회장 쪽은 보고 있다. 미국의 유력 정치인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를 얻고, 그들과 찍은 사진이 엉뚱하게도 근거로 제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백 회장은 자신의 ‘친미’ 색채가 OBS 사업권을 얻는 과정에서도 당시 노무현 정부 코드와 맞지 않아 ‘손해’였다고 여긴다. 기념사진 액자를 치운 건 나름대로 특단의 조처였다.
그렇다고 백 회장이 ‘친미’를 벗어던진 건 아니다. 백 회장은 “친미라고 불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큰 도움을 준 나라다. 친미로 누가 따로 덕본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보수건 진보건 다 덕을 봤다. 친미해서 나쁠 게 뭐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이번 재판이 마무리되면서 백 회장의 영안모자는 OBS의 최대주주로 지위가 더욱 굳건해졌다. 영안모자와 계열사는 애초 414억원(백 회장 사재 158억원 포함)을 투자했으며, 추가 증자 등을 통해 모두 556억원 규모의 투자를 한 상태다.
그러나 OBS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OBS는 2007년 8월 자본금 1400억원으로 개국했지만, 해마다 적자를 기록하며 까먹은 탓에 현재 자본금은 250억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가뜩이나 줄어든 광고 수익은 종합편성채널 개국 여파로 좀처럼 개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영안모자의 지분이 상한선(40%)에 이른 상황이라 자체 증자도 난망하다. 경영난이 투자 감소로 이어지고, 인력 유출과 콘텐츠 경쟁력 약화로 귀결돼, 다시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백 회장은 “연간 적자 규모가 줄어드는 추세고, 올해부터 시설투자 감가상각이 끝나 흑자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OBS노조(전국언론노조 OBS희망조합지부)와의 노사 갈등도 OBS 경영 정상화의 큰 걸림돌이다. 2월28일~3월19일 임금 인상과 국장임면제 등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던 노조원들이 복귀한 지 한 달이 넘도록 본업에서 제외된 경우가 많다. 노조는 윤승진 사장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고 있지만, 대주주인 영안모자 백 회장에게도 경영 정상화 의지가 있느냐는 의심을 던지고 있다. 백 회장은 “파업이 끝났다고 해서, 파업 기간 대체인력으로 채용한 비정규직을 바로 내보낼 순 없다. 늦어도 6월 안에는 노조원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는 백 회장이 더 적극적으로 재정적·경영적 노력을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애초 OBS 출범 당시 약속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 시·도민주 공모 등도 백 회장에겐 숙제로 남아 있다.
“방송 안 했다면 안 겪었을 일들”
막대한 경제적 손실, 간첩 논란 및 그에 따른 비난, 정치·사회적 책임 등 백 회장에게 방송을 시작한 대가는 작지 않아 보였다. 백 회장은 “처음엔 문화사업을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방송에 뛰어들었다. 내가 겪은 고난은 방송을 안 했다면 안 겪었을 일들”이라고 말했다. 혹시 방송 사업에서 손을 떼고 싶어진 건 아닐까? “오기가 생겼지. 오히려 더 할 거야. 나처럼 언론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안 생기도록 더 열심히 할 거야.”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