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여성호르몬 요법'>
연합뉴스 입력 2013.05.07 09:23 수정 2013.05.07 09:37(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의학 연구자에겐 여성호르몬이 바로 그런 존재다.
가임기 여성은 남성에 비해 고혈압 환자가 적고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 폐경기에 이르러 여성호르몬 수치가 떨어지면 혈압과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급상승하고 심혈관질환 위험도 덩달아 높아진다. 그렇다면 폐경기 여성에게 여성호르몬을 투여하면 심혈관질환 위험을 낮출 수 있지 않을까.
연구자들도 똑같이 생각했다. 실제로 1970년대 미국에서 간호사 12만명을 대상으로 한 ‘간호사건강연구’(Nurse Health Study) 등 과거 임상연구에서도 여성호르몬요법(HRT)을 쓰면 심장병 예방효과가 있다는 분석이 도출된 바 있다.
제약업계의 관심은 학계 이상으로 컸다. 폐경기 여성에게 호르몬요법이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가 입증된다면 전세계적으로 수억명이나 되는 ‘폐경기 여성 환자’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펼칠 수 있을 게 아닌가. 가설이 증명되기만 한다면 또 하나의 ‘노다지’ 의약품이 나올 판이었다.
미국 보건당국은 이런 기대를 업고 1991년 ‘여성건강계획’(WHI; Women’s Health Initiative)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건강한 50∼79세 폐경 여성 16만명을 대상으로 호르몬요법이 심혈관질환, 암, 골다공증에 미치는 효과를 관찰했다.
결과는 기대를 배신했다. 에스트로겐·프로게스테론 복합 요법을 받은 여성들이 유방암 발병 위험이 비교집단에 비해 더 높게 나타났다. 심장병과 뇌줄중 위험도 더 높았다. 미국 보건당국은 2002년 “이번 임상연구에서 사용한 호르몬요법의 위험이 유익을 상회한다는 판단에 따라 연구를 조기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WHI 연구 실패 후폭풍은 거셌다. 의사의 권유로 호르몬요법을 받던 폐경기 여성들이 대거 치료를 중단했다. 갱년기 증상은 삶의 질 문제지만 유방암은 생사의 문제였다. 비만 등 다른 위험인자에 비하면 그 영향이 미미하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대중의 두려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의학계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 연구결과가 모두 엉터리는 아닐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상반된 결과의 원인을 따져본 결과 WHI 연구의 여성은 기존 연구에 비해 나이가 더 많았고 비만이나 심장혈관 상태가 안 좋은 경우도 많았다. 여성들이 겉으로 봐서는 건강했지만 혈관상태는 이미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온 것이라는 해석에 점차 힘이 실렸다.
2006년 비영리기관이 크로노스장수연구소가 ‘젊은’ 42∼58세 폐경여성 727명을 꼼꼼히 골라 호르몬(에스트로겐)요법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KEEPS Trial). 참가자들의 체중과 혈관상태까지 꼼꼼히 미리 점검했다. 폐경학자들은 이번에야말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작년 10월 KEEPS 연구의 결과가 발표되는 미국 북미폐경학회 보고에 의학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가설대로 결과가 나온다면 폐경 초기 여성에서 호르몬요법의 심장질환 예방효과가 입증되는 것이었다.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참석자들은 실망감으로 입을 떼지 못했다. 호르몬요법은 심장병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치매 예방효과(인지기능 향상)도 없었다. 전문가들 역시 더 이상 설명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인지 1차 결과 공개 후 7개월이 지나고도 지금까지 논문조차 안나왔다. 날고긴다는 의학자들이 수십년간 매달리고도 여성호르몬의 작용을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축적된 연구로 얻은 공감대는 ‘여성호르몬을 만성질환 예방용으로는 권하지 않는다’는 정도다. 초기 폐경 여성에서 얼굴이 붉어지거나 밤새 땀을 흘리는 신체증상과 우울증 같은 갱년기 증상에는 크게 도움이 되고, 골밀도가 급격히 소실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박형무 중앙대의대 교수(산부인과)는 7일 “초기 폐경 여성의 삶의 질을 높이고 뼈를 보호하는 데 호르몬요법이 효과적”이라며 “만성질환 예방 목적으로 장기간 투여하지 않는다면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호르몬요법을 쓸 수 없다면 승마(Black Cohosh) 등 여성호르몬과 작용이 비슷한 ‘식물성분 호르몬’을 함유한 갱년기 증상 개선제를 권하기도 한다.
박 교수는 “식물성분 제제는 호르몬 요법처럼 확실한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체내에서 여성호르몬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환자의 거부감 등으로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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