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종플루 대유행과 강제실시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무더운 여름철에 돼지독감(신종플루)이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다. 8월 21일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800명이 넘는 사망자가 확인되었다. 국내에서도 2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3명이 목숨을 잃었고, 태국의 사망자는 110명을 넘겼다.
 
한국의 보건당국은 지금과 같은 속도로 신종플루 감염자가 확산될 경우 앞으로 2~3개월 후에 대유행(pandemic)이 시작될 것으로 예측했다. 올 10~11월쯤에는 입원환자가 13만~23만 명에 이르고, 외래환자는 450만~800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최근 네덜란드 유트레히트대학 연구팀은 신종플루의 치사율은 0.5%로 1957년에 발생해 이듬해 전 세계에서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아시아독감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누구나 감염될 수 있으며, 또 누구나 사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대중들은 엄청난 공포에 떨고 있다. 실제로 국내 사망자 2명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러한 공포가 지나친 기우로 치부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사망자 중 61세의 여성은 위염, 고혈압, 퇴행성 관절염 등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였다. 반면 56세의 남성 사망자는 특별한 질환이 없었고 평상시 건강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초기에 치료약인 항바이러스제를 투여 받지 못해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과학수준으로 신종플루 대유행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크게 2가지가 있다.

첫 번째 대처방안은 감염 후 48시간 내에 투약하면 효과가 있는 치료약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현재 치료제로 인정받은 약은 로슈가 판매하고 있는 ‘타미플루(오셀타미비르)’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 판매하고 있는 ‘리렌자(자나미미르)’ 2종류다. 미국의 경우 전 국민의 50%에게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의 타미플루를 확보했으며, 영국은 30%, 일본은 25%의 국민에게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을 비축한 상태다. 한국은 전체 국민의 5%에게 투약할 수 있는 247만 명분을 확보했으며, 올 연말까지 300만 명분을 더 구입하여 비축량을 전체 국민의 11% 분량까지 늘릴 계획이다. 하지만 이 정도 분량만으로 대유행 시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는 힘들 것이다.

WHO 권고안은 대유행 시 최소한 전체 인구의 20~30%에게 투약할 수 있는 비축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한국은 형편이 나은 편이다. 전 세계 68억 인구의 80%가 거주하고 있는 제3세계 122개국은 치료제 비축을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다. 최근 UN보고서는 보이지 않는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20억 명에 달하며, 남아시아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11억 8천만 명이 1일 2달러 이하를 벌고 있다고 밝혔다. 가난한 나라의 민중들은 특허보호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지나치게 비싸게 값이 매겨진 치료약을 사먹을 여력이 전혀 없다. 이와 반대로 거대 제약회사 로슈는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2009년 상반기 타미플루 판매액은 9억 3800만 달러에 이르렀으며, 각국 정부에 비축용으로 판매한 타미플루 판매액도 6억 1250만 달러(4억 3000만 유로)에 달했다. 이에 따라 로슈의 타미플루 판매는 203%나 상승했다. 로슈는 스스로 타미플루를 개발한 것이 아니라 길리어드로부부터 독점적인 특허사용권을 구입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슈가 세계 각국 시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종플루 대유행 시 세계 각국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로슈와 GSK의 특허권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강제실시를 시행하는 방법이 있다. 강제실시는 WTO의 지적재산권(TRIPs) 협정에도 명문화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WHO나 각국 정부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현행 한국의 특허법은 ‘전쟁이 나거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일 때에만 강제실시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정부의 재량권이 협소한 문제가 있다. 그런데 미국은 특허법에 강제실시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고 개별 법률에 그 규정이 들어 있다. 따라서 비상시에 특허발명을 사용하거나 불공정거래 사건에서 강제실시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수 년 전부터 국내의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의 특허법에서 정부의 강제실시 요건에 대한 재량권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으나 정부는 미국, EU 등과 무차별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면서 이를 외면했다. 한미FTA 협정문 상에 강제실시에 대한 제한규정이 없기 때문에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강제실시를 통한 신종플루 복제약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부 부처 내에서도 보건복지부는 강제실시의 확대에 우호적이고 특허청을 비롯한 경제부처는 강제실시의 확대를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로슈가 강제실시를 허용한 사례도 있다. 로슈는 2006년 조류독감 사태 당시 중국과 인도 업체에 복제약 제조를 허락한 바 있다.

두 번째 대처방안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 예방접종을 통해 면역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전 세계 신종플루 백신 시장에서 가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은 노바티스와 GSK이며, 국내 공급용으로 각국의 대규모 제약사들이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사노피, 씨에스엘 등 5개 제약사들이 백신개발에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은 녹십자가 유일하게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스, 네덜란드, 캐나다, 이스라엘 등은 전 국민이 2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의 백신을 확보했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전체 인구의 30∼78%에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의 백신을 주문했다. 한국의 대유행성 신종 전염병 백신의 물량 비축 수준은 인구 대비 0.08%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WHO는 전체 인구의 20∼25%에게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비축해야 된다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최근 전체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1084억 원의 예산을 추가로 확보하기로 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이 북반구의 신종플루 대유행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10월까지 백신생산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녹십자의 경우도 11월 중순이나 12월 초가 되어야 국산 백신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WHO도 “애초 예상했던 수치의 25~50% 수준밖에 생산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백신공급 대란을 우려했다.

신종 플루 치료약과 마찬가지고 예방접종 분야도 초국적 거대 제약기업의 막대한 이윤 추구와 세계 각국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이라는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 2009년 WHO의 돼지독감의 대유행 선언으로 ‘황금 독감(Flu’s Gold) 시대’가 도래했다. 2006년 세계 7개 주요시장에서 인플루엔자 백신 시장의 규모는 약 22억 달러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인플루엔자 대유행 위험 가능성이 높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2007년 이후 연평균 8.2%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의 백신시장도 2000년 이후 연간 12%씩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백신을 구매할 경제력이 없는 제3세계 가난한 국가의 민중들은 WHO나 제약회사에 자비를 요청하여 생명을 구걸해야할 형편에 놓여 있다. 지난 6월 노바티스는 신종 플루 백신을 기부하지 않기로 했다며 개발도상국들이나 원조 공여국들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론 GSK는 빈민층을 위해 5천만 회분의 백신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일부 소규모 제약회사들도 생산량의 10%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빈곤, 기아, 질병 등에 시달리고 있는 건강 취약 계층이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제실시를 통해 예방접종을 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표(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정책국장,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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