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문제가 뉴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 보도는 한국의 PKO(UN평화유지군) 파병 결정 보도였을 뿐이다. 굶주린 아이들의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아이티하면 이제 ‘진흙쿠키’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진흙으로 만든 빵. ‘빵’의 역사는 다른 한편 ‘기근 빵’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기근 때마다 등장한 것이 바로 곡식 아닌 무언가로 만든 빵이 아닌 빵, 즉 ‘기근 빵’(famine bread)이다.
1893년 영국의학저널(BMJ)에는 ‘러시아 기근빵의 진실’이라는 독자편지가 실렸다. “농부들이 기근 때 먹던 잡초로 만든 ‘기근 빵’이 영양이 풍부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빵’을 먹고나서 몸이 붓고 설사, 티푸스 등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고아원을 경영하는 한 귀족부인은 아이들이 그 ‘빵’을 먹고 극심한 복통을 견디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기를 택했다고 전합니다.”
중세부터 나타난 ‘기근 빵’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 즉 잡초, 나무껍질, 짚, 겨, 이끼 등이 재료로 쓰였다고 전한다. 그중 역사상 가장 최악의 것은 834년 프랑스 기근 때 흙과 소금을 섞어 만들었던 빵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세도 아닌 21세기에 역사상 최악의 기근 빵이 바로 아이티에 있다.
한국 정부도 전 세계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이티 구호활동에 참여했다. 1백만 달러를 기부한다고 했다가 안젤리나 졸리보다 못하다는 비판을 듣자 1천만 달러로 지원기금을 늘였다. 그러나 이 기금 중 5백만 달러는 다른 나라에 지원기금으로 보내야 할 국제협력기금 예산을 빼서 돌린 것이다. AP 통신 보도를 보면 미국 정부는 첫 주에 구호기금으로 1억 달러를 지출한 데 이어 지난달 말까지 3억 8천만 달러를 지출했다. 지난달 말까지 전 세계 정부는 20억 달러를 아이티에 지원했다.
이 돈은 물론 적은 돈이 아니며 아이티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난해 세계경제 위기를 몰고 온 금융회사들에게 각국정부는 구호기금을 얼마나 줬던가? 골드만삭스는 ‘구제금융’이라는 이름으로 1백억 달러의 구호기금을 받았다. 아이티 전체 구호기금의 다섯 곱절이다. 그런데 이 중 48억 달러가 고위직원들에게 보너스로 지급됐다. 직원 1인당 평균 약 60만 달러였다. JP 모건체이스는 2백50억 달러 구호기금을 받았고 86억 달러를 보너스로 나눠 줬다. 공적자금 4백50억 달러가 투입된 시티그룹은 2백77억 달러 손실을 봤는데도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53억 달러 지급했고 4백50억 달러 구제금융을 받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33억 달러를 보너스로 줬다.
한국 정부도 다르지 않다.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다고, 국격을 생각해서 아이티에 파병을 하겠다고 하는 나라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지난 한 해 동안 진정으로 구호자금을 몰아준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은행과 건설회사와 재벌이다. 2008~2009년 금융기관에 지원한 돈은 은행자본확충펀드, 구조조정기금, 금융안정기금 등 60조 원 규모다. 한국은행의 돈이거나 국민연금, 정부채권이 대부분인 공적자금이다. 이 돈은 지금까지 주식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으로 떼돈을 벌어들인 재벌과 금융ㆍ건설회사 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호기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돈은 물론이고, 아직 IMF 시기에 지출된 공적자금 1백68조 원 중 못 받은 돈 75조 원과 그 이자도 2027년까지 우리가 국민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전 세계 국가들은 이런 부자들에게 퍼준 돈 때문에 재정적자가 났다고 복지예산을 삭감했다. 한국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 결과로 한국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떨어졌다.
더욱이 각국 정부가 아이티에 지원한다는 돈의 내역을 보자. 미국 정부가 지원한 돈의 33퍼센트는 미군 파병에 쓰였다. 이 돈은 식량 지원에 쓰인 돈(9퍼센트)의 3.5배고 생존자 지원에 쓰인 돈(5퍼센트)의 여섯 곱절이 넘는다.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독트린≫이라는 책에서 재난을 이용해, 또 심지어 재난을 만들어서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재난자본주의’라고 묘사한 바 있다. 동남아시아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의 해변은 어민들이 쫓겨나고(쓰나미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에)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고급리조트 단지가 들어섰다(쓰나미는 부자들은 피해 가기 때문에). 이라크에서는 전쟁이라는 재난을 일으키고 대대적인 파괴를 ‘재건’이라고 포장해 전 부통령 딕 체니의 핼리버튼 같은 군수기업들이 천문학적 이윤을 얻을 수 있게 했고, 석유 채굴지가 다국적기업의 사유지가 됐다.
아이티도 재난을 이용한 패권과 이윤 추구에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미 미국은 항공모함을 동원해 미군 2만 2천 명을 파병했다. 미국이 지진을 이용해 군사적 점령을 하려 한다고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비난하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미국과 미국 국민의 관대함, 미국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공격에 깊이 분개한다”며 발끈했다.
관대함과 지도력? 아이티의 흑인혁명 이후 경제 봉쇄를 한 관대함? 1915년에 군사적 침공을 한 관대함? 아니면 1950년대 이후 쿠바 견제를 위해 뒤발리에 독재정권을 30년이나 지원한 관대함? 클린턴 부부는 신혼여행을 아이티로 갈 정도로 아이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혼여행을 간 1975년 당시의 아이티는 지금의 아이티가 아니다. 당시 아이티는 식량자급률이 1백 퍼센트인 나라였다. 그러나 IMF 차관을 조건으로 농업을 개방하고 클린턴 집권기인 1995년에 미국 쌀 수입 관세를 35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내리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시행한 이후 아이티는 진흙쿠키를 먹는 나라가 됐다. 힐러리 클린턴이 말하는 지도력이 바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러한 지도력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민영화에 그나마 저항한 선거로 뽑힌 대통령 아리스티드를 쫓아낸 부시 전 대통령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인가?
이웃의 재난을 이용해 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아이티에 다녀온 의료진은 미군 한 무리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사무실에 들이닥쳐 의약품을 달라고 요구하고 한국에서 운반해 간 의약품을 가져갔다는 황당한 경험담을 전한다. 미군은 아이티에서 이미 점령군이다. 아리스티드가 집권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찰 2천 명을 해산한 것이다. 통통마쿠트로 불리는 경찰이나 군대는 아이티에서 고문과 폭력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 식량과 의약품이 아니라 군대를 보낸다고?
한국 정부를 비롯해 세계 각국 정부들은 지금 아이티를 두고 인류애에 대한 현란하기까지 한 호소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인류애를 말하려면 아이티 같은 빈국과 남반구 국가에 IMF와 WTO가 강요하는 농업개방 프로그램부터 중단해야 한다. 또 인구의 3퍼센트가 HIV/AIDS 감염자인 아이티에 의약품특허권을 강요해 약값을 몇 곱절이나 오르게 한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 같은 자유무역협정부터 철회해야 한다.
세계 각국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가 인류애를 말하려면 경제 위기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걷어 부자들의 손실을 메꿔 주는 ‘부자들을 위한 로빈후드’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 구제기금은 부자들이 아니라 정말로 당장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식량과 의약품과 교육과 식수를 주는 데 써야 한다.
UN이 새천년을 맞아 내세운 목표의 첫 번째 항목은 “2015년까지 하루소득 1달러 미만인 세계인구와 기아인구 비율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9년 세계식량계획의 보고를 굳이 인용할 것도 없이 세계의 기아인구는 아이티에서 드러나듯 전혀 줄지 않았다. 왜 식량은 남아도는데 전 세계에서 매일 어린이 1만 8천 명 등 2만 5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야만 하는가?
아이들의 굶주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어디서 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눈물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진흙쿠키를 먹는 아이들을 만든 바로 이 현대 자본주의의 잔혹함, 그리고 이웃의 식량과 재난마저 이윤과 패권을 위해 이용하려는 정부와 기업 들이어야 한다.
레프트 21 2월 13일자 /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 건강과대안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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