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불안정 고용
4월 28일은 국제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일하다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100여개 이상의 나라에서 열린다.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의 오명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추모 행사는 열린다. 하지만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추모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부가 발표한 ‘공식’ 통계에 잡힌 것만으로 2010년 한 해 동안 22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였다. 하루에 6명꼴이고 4시간마다 한 명꼴이다. 산재 사망의 특성상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고려하면 그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정부도 이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안심일터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오랜 동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없는 것일까? 기업이나 정부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이 ‘안전 불감증’에 빠져서인가? 아니다. 한국의 노동 구조 자체가 이러한 상황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노동 구조, 고용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돌파구는 없다.
가장 문제는 점차 심화되어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불안정한 고용 형태다. 하청에 재하청으로 도급이 사슬을 이루고, 용역과 파견 노동으로 노동 인력이 대체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수준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2007년 가천의대 임준 교수 등이 시행한 연구에 의하면, 상용직에 비해 일용직, 파견직, 임시직, 시간제 등 비상용직의 산재 사고 발생 비율이 높았다. 특히 일용직의 경우 상용직에 비해 6배 이상 산재 사고 발생 비율이 높았다. 이를 원하청 고용 구조별로 비교하여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원청 노동자에 비해 하청 노동자는 2.5배, 파견 노동자는 1.8배나 사고 위험이 높았다. 산재 위험이 비정규직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인 것이다.
하청 노동자, 용역 노동자, 파견 노동자 등 비정규직이 더 산재를 많이 당하는 까닭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직업을 얻기 위한 계약 경쟁 속에서의 경제적 압박, 일단 직업을 얻은 후에는 계약을 지속하여야 한다는 압박, 최저생계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 등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많은 수가 성과급으로 보수를 받는데 이러한 상황은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사업주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힘들다. 영세사업장 노동자,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등은 큰 사업장이나 정규직 노동자가 거부한 일을 하도록 강제되기도 한다.
비정규직 증가, 시스템을 해체한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산재 예방 시스템 자체를 허물어뜨린다는 면에서 더욱 문제다.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등의 존재 자체가 작업장의 안전보건 시스템의 해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일에도 동원된다. 그래서 한 작업장에 그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노동자가 존재함으로써 전체적인 안전보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
임시노동자나 하청노동자는 해당 작업에 경험이 부족할 때가 있고, 직업안전보건 관련 규칙이나 법규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와 관련된 정보의 교육 기회가 박탈되기도 한다. 이들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그들 자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충분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반적인 체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관련된 제도가 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도 문제다. 1980년대에 틀을 갖춘 관련 제도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그 제도에 따른 자신의 권리를 알지 못하거나, 권리 주장을 하였을 경우 직업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권리와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산재 예방을 위한 제도뿐 아니라, 산재에 대한 보상 제도인 산재보험 제도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안전망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특수 고용 노동자는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고, 적용대상이더라도 정보 부족이나 고용 유지에 따른 불안 때문에 이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의 산업 구조 개편, 유연화 된 생산방식의 도입 등, 최근 들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경제 및 산업 구조도 이전의 건강 문제와는 다른 형태의 건강 문제를 광범위하게 야기하고 있다.
생산방식의 변화로 생산과정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며, 생산기일도 여유가 없어지고, 그에 따라 노동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한 시간도 불충분해지고 있다. 무리한 생산량을 정해 놓고 이를 자동화된 공정에서 수행해야 하기에 빠른 생산 속도에서 지속적으로 노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한편 노동을 효율화한다는 명목 아래 생산기일을 매우 짧게 잡아서 노동을 쥐어짜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빠른 생산과정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력과 시장의 기호에 맞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감소하기는커녕 더욱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 역시 OECD 국가 중 1위임은 잘 알려져 있다. 법률에서 정한 노동시간과 관계없이 다양한 형태로 초과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생활을 온전히 직접 임금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법정 노동시간이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초과근무수당을 받지 않는다면 생활의 어려움에 봉착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초과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절대적 노동시간의 증가와 별도로 비정상적인 노동시각에 노동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교대근무가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고, 야간 근무, 휴일 근무를 해야 하는 직업도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 역시 비정규직과 서비스직에 두드러진다.
’사회적 책임’ ‘국제기준’ 말이 아닌 제도로 만들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작업장에서의 노동을 감시, 통제하는 방법도 고도로 발전하고 있다. CCTV를 설치하여 노동자 개개인의 활동을 감시함은 물론이거니와 개인 메일까지도 검사하는 등, 노동의 질 관리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노동의 자리가 점점 더 병영 혹은 감옥을 닮아가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높이고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여러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는 유연화 된 생산방식은 한 명의 노동자가 여러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등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형태로 경영 방식을 바꾸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당연히 이전보다 더 적은 수의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그에 따라 노동강도 강화, 노동시간 연장에 따른 건강 영향을 고스란히 노동자가 짊어지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으로 기업이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을 다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요즘 한국의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 혹은 ‘국제 기준’을 얘기한다. 이것이 구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항목에 고용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얼마나 잘 보장하는가와 관련된 지표가 적지 않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기업에 막대한 벌칙을 주는 제도도 강구되어야 한다.
호주, 캐나다, 영국 등에서는 사업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하였을 경우, 그 사업주에게 징역형을 처하고, 징벌적 배상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의 벌금을 내도록 하는 법안이 있다.
작업장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참여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안전보건 선진국의 경우 예외 없이 작업장에 노동자들이 선출한 노동자 안전보건 대표위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사업주가 보장한 시간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그 지식으로 사업장을 순회하며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도 도입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일상적 산재 예방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도 필수적이다. 현재와 같이 전시 행정 위주의 지도, 감독으로는 현실을 바꾸어내기 힘들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에 대한 감시, 감독, 제재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자율’과 ‘규제 완화’가 아니라, ‘감독과 제재’, ‘규제 강화’가 노동안전보건 정책의 모토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상윤(건강과대안 책임연구원,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 프레시안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