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사일로 천막 날려 아프간 여성들 해방시켰나?


2001년 9월 11일 다음날 <르몽드>는 신문 1면에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는 기사를 전면에 걸쳐 실었다. 미국인들에 대한 우의와 위로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9.11 당시 전세계인들의 심사는 <르몽드>가 표현한 것 보다는 복잡했다. 물론 9.11 테러에 지지를 보낸 사람은 당연히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전적으로, 아무런 유보 없는 애도를 표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아마 소수였을 것이다.

비록 중동의 어떤 축구경기장에서처럼 조의를 표하자는 방송에 관중들이 거꾸로 환호했다는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반응은 아니었겠지만, ‘미국인들이 폭격을 당하기도 하네’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지 않았을 사람들 또한 드물었을 것이다. 이미 지구상의 너무 많은 나라에 너무 많은 폭탄이 미국에 의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지배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9.11을 통해 어떤 일도 허용되는 만능의 면죄부를 얻었다고 판단했고 또 미국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는 듯이 보였다. 그랬기에 9.11이 발생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한 국가가 테러에 관여되었다는 근거가 없고 설사 근거가 있어도 그 사실이 군사적 침공을 정당화해주지 못한다는 ‘상식’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9.11 희생자를 앞세운 미국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미국과 나토군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맞서는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자신들의 침공을 규정했다. 그들은 ‘군사적 침략’을 테러에 대항하는 전쟁 즉 ‘대테러전쟁’이라고 불렀고 그 이름으로 국민소득이 150달러인 나라에 8만 달러짜리 토마호크 미사일을 쏟아 부었다.

9.11 이후의 전쟁에는 테러에 대항한다는 명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인권과 여성 해방을 위한 전쟁’이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거둔 많은 군사적 성공 때문에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에 감금되지 않게”됐고 “음악을 듣고 자신의 딸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테러리즘에 맞선 투쟁은 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고 설파했다. 미사일로 그들의 천막을 날려버림으로서 여성들을 가정의 감금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은 조지 오웰도 놀랄만한 역설적 수사이지만 9.11이후 이러한 수사는 일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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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의 여성과 어린이들, 전쟁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이 ‘해방전쟁’은 곧바로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졌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으며 사담 후세인이 9.11의 배후라는, 아무도 믿지 않는 주장이 군사적 침략의 명분이 되었다. 전세계 수천만 명의 반대시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광범위한 반전 운동에 의해 유럽이 분열했고 유엔의 전쟁 지지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배층에게 9.11은 미리부터 계획된 석유와 패권을 위한 중동 전쟁의 절호의 기회였을 뿐이다.

이라크를 아무리 뒤져도 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았다든지, 심지어 이라크 침공이 9.11 이전에 계획되었다는 객관적 증거가 나와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이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핼리버튼이 이라크 ‘재건사업’을 통해 얼마를 벌어들였다거나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이라크의 석유채굴권을 나누어가졌다거나 하는 것은 ‘비애국자들’의 주장으로 취급됐다.

미국의 ‘애국법’에 의해 도청은 자유를 위한 것이 되었고, 물고문(워터보딩)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심문기술이 되었다. 이라크의 유아식 공장이었던 아부 그라이브는 이라크인을 발가벗기고 개를 풀어 모욕하고 성폭행을 하는 장소가 되었고 관타나모는 전세계인들 누구라도 테러용의자라는 이름으로 재판없이 가두고 물고문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 와중에 부시 대통령이 매우 우연히 동생 제프 부시가 주지사로 있던 플로리다에서 흑인들을 제외하는 원천적인 부정선거를 통해서 재선에 성공했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어떤 제국에서 황제가 선거로 뽑힌단 말인가?

‘제국’이 발가벗은 권력을 휘두르자 전세계에서 민족적·인종적 탄압과 전쟁이 이제는 부끄럼도 없이 정당화되었다. 러시아의 체첸 침공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다시 명명되었다. 푸틴이 권좌에 오르기 위한 피의 발판이 되었던, 체첸인 20만 명 학살에 대한 서방의 ‘말로만’ 비판조차도 러시아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중국은 티베트에서 ‘목탁’과 ‘돌맹이’로 무장한 ‘테러리스트’를 군대를 동원해 살해하고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체에서, 스리랑카 정부가 타밀족을 학살해도 모두 테러와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중동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터키가 쿠르드인들에게 무슨 짓을 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중동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든, 또 옆 나라 레바논에서 정부가 바뀌었다고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한들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었겠는가.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빅브라더의 구호가 실현되었다.

‘테러와의 전쟁’ 10년은 테러를 전혀 근절시키지 못했고 세계는 평화와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세계는 과거보다 훨씬 불안정해졌고 테러는 더 빈발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히잡이 금지되고 유럽의 극우정당이 여러 나라에서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 극우정당이 20% 가까이 득표를 했고 그 극우파에 의해 테러가 일어났다.

한국도 이제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 해안에까지 군을 파병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인들조차 파병국의 일원으로 해외에서 납치를 당하고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호언과는 달리 파키스탄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고 이라크의 미군은 말로만 철수했을 뿐 영구 주둔으로 귀착되고 있다.

심지어 미 중앙정보국(CIA)도 스스로 ‘알카에다’라 부르는 세력이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 사하라는 물론 소말리아까지 팽창했다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테러와의 전쟁은 실패했다. 그러나 과연 미군이 무인정찰기로 폭격을 퍼붓는 파키스탄의 북부지역이 정말 알카에다 점령지역이고,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연맹이 알카에다인가? 이들은 그 지역 민중의 지지를 받는 무슬림 정치세력들일 뿐이다. 미국이 쫓는 알카에다의 상당수는 미 랜드연구소가 이야기하듯이 “조직과 자금동원력을 가진 사회운동단계로 진화”한 세력일 뿐이며 미국 정부가 알카에다로 부르는 그 무엇은 태반이 허상일 뿐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또 민중의 생명과 건강에 해악을 끼쳤다. 전쟁과 폭력은 전염병과 함께 2대 사망원인이며 ‘테러와의 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근 위키리크스 폭로에 의해 밝혀진 바, 이라크 전쟁 사망자는 미군 집계로만 2010년 1월까지 10만명이 넘으며 이중 이라크 민간인 사망이 2/3인 6만6000명에 달한다.

권위있는 보건학적 연구들에 의하면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전쟁으로 인한 위생조건 악화와 전염병, 영양부족 등으로 최소 수 십만 명이 넘는다. 미군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만 6000명이 사망했고 4만명 이상이 팔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제대군인의 19.1%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린다.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 사회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매카시즘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또 전쟁으로 인한 군비지출은 미국의 대규모 재정적자를 극히 심화시켰고 이것은 현재 미국 경제위기의 중요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언론인 타리크 알리의 표현에 의하면 미국은 ‘저질’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의 실패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은 ‘알카에다’나 ‘테러’의 지속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랍 혁명이다. 튀니지에서 시작한 중동 혁명은 이집트와 예멘을 거쳐 시리아와 리비아, 바레인, 요르단 등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중동의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는 미국의 군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랍의 민주주의는 아랍 민중 스스로가 이룩한다는 것을 아랍 혁명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 혁명은 미국이 강력하게 지지하던 아랍 정부의 철옹성을 민중 자신의 힘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이들은 이슬람 극단주의도 친미 정부도 선택하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이 아랍 혁명에서 테러와의 전쟁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는 것이 가장 상징적일 것이다. 이집트 정부나 리비아의 카다피, 예멘의 살레가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민중들에게 뒤집어씌웠던 것이 ‘알카에다의 위협’이었다.

테러 근절과 인도주의적 개입을 내세운 대테러전쟁 10년은 인종주의와 테러의 위험과 한층 더 전쟁의 위험이 커진 세계를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우리가 지금 역설적으로 보고 있는 희망은 이 세계의 지배자들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아랍의 민주화에서 보이듯이 민중들의 혁명과 반란에 있다.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새로운 역사적 진실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건강과대안 부대표)

(이 글은 프레시안 2011년 9월 20일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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