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에서 의료인류학도를 꿈꾸다
김관욱(건강과대안 회원, 의사)
의례 일상이란 한숨과 탄성의 교차반복이다. 그걸 군에서 전역할 때는 잠시 잊었던 듯하다. 올해 4월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부천에 월급의사로 취직하면서 ‘부천의 명의가 되리라’며 호들갑을 떨었으니 정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맞을 것이다. 4개월, 현실을 직시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명의는 온데간데없고 한숨을 버릇처럼 되뇌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핑크빛 계획은 이랬다. 우선 정성껏 환자를 보며 임상경험을 쌓고 유학비도 마련하고 외래 및 입원 환자는 물론이고 지역자치단체와 연계해서 새로운 모델의 금연클리닉을 시도해 보겠다고. 원장님도 지역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으시고,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병원 내 존재했고, 의욕도 충만했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시도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그리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바닥에 티눈이 생길만큼 현실은 꿈꿀 여유조차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정성껏 만든 각종 질병에 대한 설명문들은 그저 빠르고 강한 약을 원하는 환자들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금연상담을 위한 자료들도 등장기회를 찾기엔 너무나도 진료시간이 부족했다. 다양한 환자 층을 접할 수 있다는 첫 출근의 기대감은 북적거리는 시장 통에서 정신없이 헤매는 꼬마 아이의 당혹감으로 변한지 오래다. 실로 풋내기 의사의 높은 이상이란 조그마한 진료실 안에서는 일회용 설압자보다 설 자리가 없었다.
현실은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항생제는 밥이고, 스테로이드는 국이며, 주사제는 고기반찬이고, 소화제는 기본반찬으로 대접받는 동네 진료실 현장. 한국에서 감기 같은 질환도 한 상 제대로 차린 ‘약상’이 아니면 환자에게 서운한 소리를 듣는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런 처방에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다. 크게 보면 이 모든 게 ‘고속도로 근대화’의 산물일지 모른다. 이런 현실 앞에 최소한의 약물만을 고집하는 신입 의사의 처방은 환자분들에게 ‘명의’ 소리를 듣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동네 ‘명의’로 소문나기 위해서는 ‘명의’이기를 포기해야 할 듯싶다. 한숨과 탄성은 이래서 끊이지 않는다.
현실의 ‘일상성’이 지닌 강력한 힘은 ‘이상’을 쉽게 무용지물로 만든다. 더욱 어려운 것은 그러한 일상성은 겉보기엔 똑같은 구간반복처럼 보이지만, 현미경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저마다 말 못 할 사연을 담고 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 5월 말경에 응급실에서 심한 천식 환자를 본 적이 있다. 40대 초반에 85kg의 거구인 여성은 놀랍게도 heavy smoker였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거의 매일 커피믹스(하루 20잔 이상), 박카스, 담배로 식사를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사연인즉슨, 일본어 번역가인 그녀는 항상 마감과 싸우며 밤샘작업을 하느라 커피와 담배 없이는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담배를 처음 피운 이유가 둘째 임신하고 입덧이 너무 심해 시어머니가 이를 ‘치료’하기 위해 권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네 일상은 교과서를 통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 같은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도 난 언제나 담배를 놓지 않는다. 이것마저 놓으면 일상에 묻혀 왜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지를 망각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담배는 검지와 중지 사이가 아니라 내 머리 속 깊은 사유의 틈새 속에 있다. 군의관 시절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병사들을 위해 3년간 금연클리닉을 하면서 언제부턴가 ‘담배’는 내 일상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건강불평등을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위험인자이기에 흡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실제로 상담과 자료조사를 병행하면서 담배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음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흡연을 중심으로 의료인류학 공부를 시작했다. 《권력의 병리학》의 저자 폴 파머를 통해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접하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인류학에 매료된 후로 막연히 대학원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담배는 이러한 토대 위에 불을 지폈다. 질적 연구를 가리키는 곳은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필요한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고, 녹음기 하나를 구입해 병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기 시작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올 초 병사흡연에 관해 “호기심에서 도구로의 전환”을 주제로 한 질적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약 일 년 간 병사들에게 보여 주려고 쓴 흡연에 관한 에세이를 모아 칠고초려 끝에 “굿바이 니코틴홀릭”이라는 책도 발간하게 됐다.
하지만, 언제나 활활 타오를 것 같던 학업에 대한 열의도 바쁜 일상과 당혹스런 진료실 안 풍경(대부분 약물처방과 검사처방의 모순들이다)으로 인해 풍전등화처럼 흔들리곤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꺼지지 않고 기름진 심지를 지니고 있는 건 <건강과 대안>, <시민건강증진연구소> 등을 통해 스스로를 다그치려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좋은 분들의 소개로 7월부터 서울대 인류학과 내 의료인류학 세미나에 격주마다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너무나 현실적인 일상을 중요한 ‘참여관찰’의 장으로 재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일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시간들이다.
요즘은 내년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면서 인류학 관련 서적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의료인류학을 다루는 Critical Medical Anthropology에 관한 책을 눈여겨 읽고 있다. Hans Bear와 Merill Singer가 주창한 CMA는 ‘질병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주로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건강을 “삶을 매우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유지하고 증진시켜주는 기본적인 물질적·비물질적 자원들에 대한 접근성 및 통제성”으로 정의한다. 앞에서 언급한 천식 여성의 경우는 CMA의 건강 개념에 대입해 보면 매우 불건강한 상태이다. 85kg이라는 거구에 중증의 천식을 앓고 있는 중년 여성이 커피, 박카스, 담배에 의존해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것들만이 쉽게 접근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상의 ‘약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설탕과 권력》의 저자인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는 담배를 커피, 설탕과 함께 일종의 ‘Drug food’라 일컬었다. 정말 서민들에겐 담배만큼 값싸고 손쉬운 ‘위안의 약’을 찾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며칠 전 81세 할아버지가 기침, 가래가 심해졌다고 오셨다. 흉부 X선 촬영을 해보니 왼쪽 폐에 폐암으로 의심되는 종괴가 관찰됐다. 담배를 피우시냐고 여쭈었더니 대뜸 불평부터 늘어 놓으셨다. “담뱃값이 비싸 독한 줄 아는데 이것만 핀다.” 담배 이름은 ‘라일락’이었다. 2500원짜리가 비싸서 독하지만 2000원짜리 라일락을 핀다며 투덜대는 할아버지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하기가 여간 죄송스럽지가 않았다. 할아버지 역시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을 선호하겠지만, 그렇다고 건강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독한 담배를 동무 삼아 지금껏 견뎌 왔을 고된 일상이야말로 정말 벗어나고픈 현실이었을 것이다. 향기로운 라일락 꽃 냄새와 500원 만큼 더 독한 라일락 담배 냄새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네 일상에까지 침투한 사회적 모순의 단상일 테다. 이러한 일상 속 모순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네들과 함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의료인류학도의 꿈은 조금씩 커져만 간다. 내 젊은 날의 청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