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사전 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보다 먼저 필요한 것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의사들의 처방행태도 바뀌어야 한다
1. 사전 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 정책은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여성이 사전 피임약을 의사 처방 없이 복용할 수 있는 방안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일관된 연구 결과이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사 처방을 받는 것에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의사 처방을 받기 위해서는 진찰료와 처방료를 지불해야 하고, 의사를 만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하며,경우에 따라서는 의사와 원하지 않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전 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면 여성의 사전 피임약 접근성은 낮아진다. 특히 소득이 낮을수록,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이러한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 비용으로 인해 경구 피임약 복용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사전 피임약을 의사 처방이 필요한 약으로 전환하는 정책은 사전 피임약 접근에 대한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취약계층 여성이 의도 하지 않은 임신의 결과로 고통 받을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이유로 임신중절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모자보건법 현실 상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여성의 선택의 입지가 매우 좁다.
2. 사전 피임약의 부작용 발생 가능성은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매우 낮은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전 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 정책은 약물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한 정책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전 피임약의 안전성에 대한 연구 결과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사전 피임약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 나왔다. 사전 피임약 복용은 중풍, 심장병 등 심혈관계질환의 위험을 높이고, 정맥 혈전증 발생의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그 위험이 꼭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할 만큼 큰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사전 피임약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정보 제공이나 사전 확인 없이 이 약을 복용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 건강에 해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약물 사용은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비교하여 이로운 점이 해로운 점을 능가하는지 평가하는 비교편익분석이 필수적이며, 이에 대한 연구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3. 의사가 처방하면 더 안전할 것인가?
세계보건기구(WHO)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사전 피임약 복용이 의학적으로 금기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의사는 처방 전에 이에 대한 평가를 충분히 하고, 복용자에게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35세 이상의 흡연자, 고혈압 환자, 정맥 혈전증 과거력이 있는 이, 심장병이나 중풍의 과거력이 있거나 관련 위험인자가 다수인 이, 전구 증상을 동반하는 편두통을 앓고 있는 환자 등은 사전 피임약 복용 대상이 아니다. 사전 피임약 복용을 생각하고 있는 개인이 이와 관련된 정보를 습득하여 자가 평가한 후 복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 피임약은 현재까지도 약사의 복약 지도를 받아 복용하도록 한 것이고, 향후에는 이에 대한 평가와 정보 제공 책임을 의사가 지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재의 한국 의료 현실에서 이를 처방약으로 전환하였을 때, 이에 대한 의사의 사전 평가와 정보 제공 및 상담 등을 통해 약물 복용의 위험성이 낮아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의사들이 현재 약물 복용과 관련된 사전 사후 평가에 소홀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선험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4. 경제적 장벽이 사라지면, 여성이 의사 처방을 더 선호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여성들은 왜 사전피임약을 의사에게 처방받는 것보다 약국에서 구매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그 이유는 경제적, 시간적 비용 때문이기도 하고, 심리적 장벽 등 사회문화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이루어진 일부 연구들에 따르면 가장 큰 장벽은 경제적 요인인 것으로 나타난다. 약국에서 피임약을 구매하는 것이 의사에게 처방받는 것보다 더 싸기 때문에 약국 구매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한편, 의사가 관련된 평가와 정보 제공 등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면, 의사 처방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아진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부가 사전 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면서 다른 전문의약품과 마찬가지로 이 약 복용도 건강보험을 적용시켜 복용자 본인부담을 줄인다면, 여성이 사전 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을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물론 이는 다른 사회문화적 요인은 경제적 요인에 비해 부차적 위치를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들이 약사들에 비해 더욱 권위적이거나 가부장적이어서 이러한 요인이 경제적 요인보다 사전 피임약 접근성에 더욱 큰 영향을 준다면 이러한 가정은 오류가 될 것이다. 이 역시 선험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실증적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5. 피임 정책에 대한 국가의 이중 잣대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이다.
사전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 안전성 등에 대한 논의와 별개로, 근대 국가의 피임 정책을 역사적으로 접근해 보았을 때 일관성과 원칙이 없으며, 이는 여성의 몸을 도구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꼭 지적되어져야 한다. 근대 국가의 발전 역사 속에서 여성은 아이 낳는 존재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 국가는 6-70년대에는 산아 제한을 국가의 정책으로 삼아 사전 피임약을 거의 무차별적으로 뿌려대다시피 했다. 그 때에는 안전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저출산이 문제가 되자 이제는 안전성을 근거로 여성의 사전 피임약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여성들이 국가의 피임 정책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안전성이 문제였다면 왜 지금까지는 침묵하고 있었냐는 여성의 항의에 국가는 무슨 궁색한 변명을 할 것인가?
6. 접근성, 안전성, 여성의 선호를 모두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공공 클리닉에서 의사의 충분한 상담과 평가가 이루어진 후 무료로 사전 피임약을 처방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 전문의약품 전환에 따라 건강보험 적용 등으로 본인부담이 줄어들 것, 둘째, 의사들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사전 피임약 복용자에 대해 상담과 평가를 진행할 것, 셋째, 의사들의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사전 피임약 처방 요구인의 상황과 처지에 공감할 것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사전 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 정책은 사전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려, 원하지 않는 임신출산의 증가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고, 이는 특히 저소득층, 비교육층, 미혼 여성 및 미성년자들에게 집중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기에 전면 보류되어야 한다.
2012. 6. 14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