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급 ‘함정’에 빠진 한우
한겨레 등록 : 2013.08.19 20:34 수정 : 2013.08.20 15:39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600141.html
1등급 한우를 건식 숙성시킨 드라이에이징 한우는 1++ 등급 한우와 비슷한 가격이다. 기름기를 꺼리고 고기의 풍미를 즐기는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SSG푸드마켓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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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한우 농가들이 단체 삭발과 단식농성을 벌였다. 사료값은 오르고 한우값은 떨어져 경영이 크게 어려워진 탓이다. 정부는 한우 사육두수를 줄여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고, 농가들은 사료값 인하와 같은 경영안정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우의 생산·소비 구조를 근본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우 생산·소비 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인 쇠고기 등급판정제도의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 ‘물고문’ 한우의 신분상승 1990년대 초반까지도 한우가 ‘물고문’을 당하는 일이 흔했다. 도축 직전 강제로 물을 먹여 몸무게를 불려 소값을 더 받으려는 꼼수였다. 농가나 소비자나 고기의 품질에 대한 관심이 낮던 시절이었다.
소득증가로 소비자들이 고기의 품질을 따지게 되고,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로 인한 쇠고기 시장개방에 정부와 한우 농가가 고급화 전략으로 대응하면서 물고문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쇠고기 등급판정제도가 도입됐다.
우리나라에 쇠고기 등급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92년 7월이다. 당시 축협중앙회 서울공판장에서 등급제가 시범적으로 실시됐다. 1995년 2월 서울과 제주 지역에서 등급판정을 받은 쇠고기만 거래할 수 있도록 등급제가 의무화됐고, 이후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1995년 도축된 소 가운데 등급판정을 받은 비율이 23%에 불과했지만, 2000년에는 99.6%로 사실상 모든 소가 등급판정을 받게 됐다. 이미 1916년에 등급제를 시작한 미국이나 1975년부터 시작한 일본에 비해 한참 늦게 도입됐지만, 우리나라의 쇠고기 등급제는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처음 등급제가 도입될 당시 쇠고기는 3개 등급(1·2·3등급)으로 나뉘었다. 초기 최고등급인 1등급 판정을 받는 한우의 비율은 10% 초반대였다. 하지만 한우 농가들이 사육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키고 품종개량을 거듭한 결과, 불과 5년 만에 1등급 출현율이 20%에 육박했다. 이에 1등급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져 1997년 11월 1+등급이 신설됐다. 1998년 3.4%로 시작한 1+등급 출현율은 5년 만에 14%를 넘어섰다. 2004년 11월 1++등급이 또다시 신설돼, 지금의 5개 등급 체계가 확립됐다. 2011년 현재 1++등급 출현율은 9.2%, 1+등급은 22.6%, 1등급은 30.6%다. 20년 전 기준 최고등급(1등급)을 뛰어넘는 한우가 전체의 62.5%에 이를 정도로 한우는 짧은 시간 안에 고급화에 성공했다.
전남 영광군 청보리목장은 생산 및 유통 전 과정에서 경영을 최대한 효율화한 목장으로 꼽힌다. 경매시장과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이마트·신세계백화점과 직거래를 해 유통단계를 최소화했다. 인근 농가들의 논에서 농한기에 재배한 청보리를 공급받아 자체 공장에서 가공한 사료를 먹여 사료값도 크게 낮췄다. 하지만 1++등급 한우를 생산하기 위한 30개월의 사육기간은 이런 농가에게도 부담이다. 유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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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고기 등급판정제도의 효과 극단적인 예로 마약같은 불법상품은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속 마약거래 장면을 보면 포장을 뜯어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확인 절차가 필수적이다. 구매자나 판매자 모두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상품과 현금을 동시에 교환해야만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배신에 대비해 권총까지 품고 있어야 한다. 막대한 유통비용이 들고 거래가 활성화될 수 없다.
반면, 책처럼 품질이 표준화된 상품은 물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구매하기 쉽다. 상품을 받기 전에 돈을 지불할 수 있다. 온라인쇼핑의 태동기부터 도서 거래가 빠르게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물류(물건의 흐름)와 상류(돈의 흐름)의 분리’라고 부른다. 품질을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돼 도매상도, 매장도 사라진다. 유통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거래가 크게 활성화된다.
물고문을 당하던 소에 표준화된 등급을 부여하는 것은 마약 거래 같던 한우 거래를 도서 거래처럼 만드는 효과가 있다. 품질이 들쭉날쭉할 수 밖에 없는 모든 농산품도 마찬가지다. 도축과 동시에 등급이 매겨지기 때문에 소비자는 중간 도매상이 물건을 골라주지 않아도 원하는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 결과 온라인쇼핑몰에서도 한우를 구입할 수 있게 됐다. 2009년 1월 한우생산이력제까지 시행되면서 한우는 신뢰도를 더욱 높였다.
한우 시장은 등급제를 통한 표준화와 고급화에 성공하면서 수입 쇠고기의 저가 공세에도 잘 버텨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1년 쇠고기 시장 전면개방 직후 수입이 급증했는데도 한우가격은 상승세를 나타냈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때도 한우가격은 지속적으로 올랐다. 이정환 전 농촌경제연구원장은 “한우의 가격경쟁력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등급판정제도로 한우의 품질이 고급화돼 수입육과 차별화가 이뤄진 결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마블링 많아야 높은 등급 1++등급 수준의 지방 만들려면 대량의 곡물사료 장기간 먹여야
도축 월령 30~31개월로 길고 사료값 오르면 농가 타격도 커
“건강 관심 늘면서 선호 달라져” 일본선 ‘올레인산’ 함량에 주목
등급기준 안바뀌면 변화 어려워
■ 도전받는 ‘마블링 중심주의’ 우리나라의 쇠고기 등급제도는 ‘마블링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육색. 지방색, 조직감 등 다른 기준도 있긴 하지만, 마블링, 즉 근육 내 지방이 얼마나 많은지(근내지방도)가 등급 판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다른 요소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지방이 충분하지 않으면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없다. 근내지방도는 등심근육 단면에 형성된 지방의 양과 형태로 측정되는데, 9단계로 구분된다. 지방이 거의 없는 1번은 3등급, 2~3번은 2등급, 4~5번은 1등급, 6~7번은 1+등급, 8~9번은 1++등급이다. 같은 1++등급이더라도 근내지방도 9번이 8번보다 좋은 가격을 받는다.
하지만 현행 등급제가 과연 소비자의 선호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등급보다 숙성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의 등장은 ‘마블링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의 신호탄이다. 지난해 서울 강남구에 문을 연 최고급 식료품 매장 ‘에스에스지(SSG)푸드마켓’의 정육코너는 ‘드라이에이징 한우’를 판매하고 있다. 드라이에이징 한우란 2~5주 동안 건식숙성한 고기로, 숙성과정에서 자연적 효소작용이 일어나 독특한 풍미와 부드러운 육질이 특징이다. 1등급 한우를 숙성시켜 등심 100g 기준 1만49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일반 1등급 한우보다 50% 이상 비싸고, 1++등급 한우와 비슷한 가격인데도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이원우 에스에스지 푸드마켓 축산 부실장은 “지방이 많은 고기를 싫어하는 고객들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드리아에이징 한우를 꾸준히 구입하고 있다”고 전했다.
1등급 한우를 건식 숙성시킨 드라이에이징 한우는 1++ 등급 한우와 비슷한 가격이다. 기름기를 꺼리고 고기의 풍미를 즐기는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SSG푸드마켓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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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등급의 함정’에 빠진 농가 축산물품질평가원의 올해 1~7월 한우 도매시장 등급별 경락가격 자료를 보면, 1++등급이 1㎏당 1만7348원으로 1등급에 비해 36%, 2등급보다는 68%, 3등급에 비해서는 204%나 비싸다. 농가 입장에서는 1++등급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는 데 주력해야 하는데, 1++등급 수준의 지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의 곡물사료를 장기간 먹여야 한다. 그래서 한우의 도축 월령은 대부분 30~31개월로, 미국·호주산의 20~22개월보다 훨씬 길다. 가격경쟁력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국제 곡물가격 상승에 따른 사료값 인상으로 인한 타격도 더 클 수 밖에 없다.
등급판정 기준이 지방에서 다른 요소로 바뀌면 이런 생산 구조도 바뀔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일본에서 일고 있는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한우와 마찬가지로 ‘마블링 중심주의’를 채택해온 일본의 ‘와규(和牛)’는 올레인산 함량에 주목하고 있다. 올레인산은 쇠고기에 포함된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인데, 올레인산 함량이 높을수록 맛이 좋다는 연구결과가 여럿 있다. 김창호 한우자조금관리위원회 교육조사부장은 “일본에서는 소를 키우는 기술이 마블링에서 맛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올레인산 함량을 높이는 소의 유전자를 개발하고, 올레인산 함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품종개량도 하는 등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양승룡 고려대 교수(식품자원경제학)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름진 고기보다 담백한 고기를 원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지만, 현행 등급제는 이런 소비자들이 한우를 구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급제가 실제 소비자의 선호와 멀어지면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생산구조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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