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 게재된 칼럼으로
배경내 상임활동가의 글입니다. 원문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hr-oreum.net/article.php?id=2917
[인권교육, 날다] 사회권을 깊이 읽는 3단계 질문법
퍼져가는 물결 따라 사회경제적 존엄을 살피다
부모와의 갈등이 아무리 심각해도 집이 부유한 청소년은 ‘가출’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녀들에게는 유학이라는 우아한(?) 탈출구가 있다. 폐허나 다름없는 거리로 뛰쳐나온 ‘가출’ 청소년의 삶을 빈곤이라는 열쇠말을 제하고 읽어내기란 어렵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 등장하는 ‘한나’는 이송 중이던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로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역무원에서 수용소 감시원으로 그녀의 직업이 이동하게 된 배경에는 가난과 가난에서 비롯된 문맹이라는 취약성이 놓여있다. ‘병자가 나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이면을 감춘다. 가족의 일원이 병을 얻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간병과 굶주림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불평등이 가족 전체를 몰락시킨다. 사회경제적 존엄이라는 갈망, 이를 실질화하는 사회권의 목록은 이렇듯 폐허가 된 삶들의 저항 속에서 전진해온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럼에도 사회권의 토대는 여전히 허약하다. 무엇보다 여전히 사회권은 굶어죽지 않을 권리 정도로만 제한적으로 해석된다.
사회권을 깊이 읽는 3단계 질문
사회권을 좀 더 새롭게, 좀 더 깊이 읽어낼 방안은 없을까. 주어진 권리 항목을 그저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권리의 저자가 되어보는 경험으로 안내할 수는 없을까. 얼마 전 열린 인권교육가를 위한 워크숍에서 사회권을 살피는 교육 방안을 구상하다가 반짝, 3단계의 질문법이 떠올랐다. 먼저 주거권, 교육권 등 흔히 사회권으로 분류되는 권리의 이름을 제시한 뒤, 참여자들로 하여금 그 권리를 인권답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구성요소들을 직접 찾아보도록 했다. 다음으로 각 권리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삶들이 무엇인지, 그 권리는 누구와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찾아본다. 마지막으로는 그 권리가 잘못 쓰였거나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이렇게 3단계 질문에 따라 논의한 결과를 하나씩 짚어가다 보니, 사회권을 깊이 읽기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과 각 권리를 둘러싼 사회적 쟁점을 자연스럽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사회권을 말하는 기존의 문법 넘어서기
먼저 참여자들이 사회권의 구성 요소로 어떤 것들을 떠올렸는가를 살펴보니 흔히 사회권이 이야기되는 방식에 머무른 경우도, 기존의 사회적 문법을 훌쩍 뛰어넘어 사회권을 확장한 경우도 있었다. 흔히 주거권을 말할 때 주거는 깨끗하고 튼튼하고 안정적인 건축물로서의 ‘집’(house)으로만 이해되곤 한다. 유엔이 제시한 주거관련 기준도 보면, 점유의 안정성이나 물리적․경제적 접근성, 적정 주거기준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넉넉한 규모에 월세에 허덕이지 않는 집에 산다 할지라도 집에 있으면 숨 막힐 정도로 고통스럽거나 지독한 고독 속에 갇혀 있다면 살만한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교육권이 의무적으로 취학해야 할 권리로만 이해된다면, 교육은 권리가 아닌 국가에 의해 부과된 노동이 된다. 노동권이 ‘임금노동자’로서 덜 착취당하며 일하기 위한 권리에만 머무른다면, 노동권은 형벌로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의 제한적 권리가 될 뿐이다.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은 다행히도 학교를 거부할 권리와 놀 권리를 교육권의 한 요소로, 노동을 거부할 권리를 노동권의 한 요소로, 건강정책에 참여할 권리를 건강권의 한 요소로 찾아주었다. 흔히 복지가 이야기되는 방식처럼 용역이나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만으로는, 사회적 자유를 쟁취할 권리를 상상하지 않는 한은 사회경제적 존엄이 실현될 수 없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이어서 사회권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람들을 살펴보니 더더욱 흥미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건강권의 현장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의 노동환경은 건강한가. 이 사회에서 직장을 갖고 노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건강을 잃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져본 경험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학생은 물론 능력주의와 자기개발 담론에 시달리는 직장인들도 형벌로서의 학습노동을 수행하고 있지 않나. 이와 같은 의문들을 따라 다양한 처지에 놓인 삶들을 살펴보다 보니 교육, 노동, 주거 등에 연루된 모든 사람이 존엄을 박탈당한 희생자로 등장했다. 사회경제적 존엄을 박탈당한 삶이란 (흔히 ‘취약계층’으로 불리는) 특정한 집단만이 처한 고단함이 아니라는 것, 개인의 능력에 따라 존엄이 ‘배분’되는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사회권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그 존엄조차 사실은 ‘견딜 만한 형벌’일 수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살펴졌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쟁점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도 사회권이 다루어지는 기존의 문법이 가진 한계나 문제점이 호출되었다. 교육을 배움과 삶이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기계화된 학습으로만 바라보는 순간, 무상급식은 교육권의 일부가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이 기죽지 않고 밥을 먹게 만드는 문제로 축소된다. 노동을 임노동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순간, 사회적 비용의 축소를 위해 대가없이 갈취되는 노동들, 임노동의 바깥에서 다른 노동을 선택할 권리는 잊힌다. 건강을 의료적 수치가 보여주는 결과로만 바라보는 순간, 국민 건강 증진을 빌미로 사적 영역을 파고들어오는 국가의 횡포는 가려진다. 이와 같은 쟁점들을 하나씩 다루면서, 덜 고단한 ‘형벌’이나 견딜 만한 ‘의무’가 아닌 사회적 ‘자유’로서의 사회권이 갖는 중요성을 재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세 단계 질문법은 하나의 완성된 인권교육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사회권을 다룰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단계별로 펼쳐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 세 단계 질문의 안내를 받아 사회권을 읽어보니 우리가 빠지곤 하는 함정들, 놓치곤 하는 밑동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살필 수 있었다. 인권교육가는 사회권과 관련한 국제적․사회적 기준들을 소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권을 복지로 그저 축소된 채 다루는 기존의 문법 너머로 참여자들을 안내해야 한다. 사회적 자유 없이 사회경제적 존엄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들의 삶은 이미 자유권과 사회권의 이분법을 해체한 채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물론 참여자들의 경험이나 고민의 결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여전히 기존의 문법에 머무르는 이야기로만 그칠 수도 있다. 인권교육가가 먼저 사회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질문들을 벼려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