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신해철은 또 나온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그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그에 따른 내실은 기하지 못했다. 교통사고율, 산재사망율 등 국가간 비교를 위한 다양한 사회지표가 OECD 중 최하위권을 맴도는 이유다. 세월호 참사 전과 후가 달라져야 한다면, 이제는 ‘닥치고 경제 성장’라는 논리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성숙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의료 영역도 마찬가지다. 한국 의료는 지난 50년간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 전국민 건강보험이 도입되었고 병원에 대한 접근성도 향상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되어 평균수명도 급격히 늘어났다. 외자를 유치하여 병원을 짓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대통령이 외국에 한국 병원 시스템을 ‘수출’하겠다는 얘기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부나 업계의 과장이 좀 심하긴 하지만 한국으로 ‘의료 관광’을 오는 이들도 늘고 있다. 한국 의료는 세계 일류 수준을 달성한 것일까?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분야나 영역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한국 의료의 수준은 분야나 영역별로 천차만별이다. 어느 분야나 영역은 세계 제일을 자랑하지만 어느 영역은 말하기 창피할 정도의 수준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환자 안전’ 영역은 후자에 속한다. 이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보건의료 질적 수준을 검토한 보고서에서 “한국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환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명확한 기전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이다. (…) 한국에서는 환자안전에 대한 국가 프로그램의 일부로 이와 유사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의료와 병원은 양적 팽창에 걸맞는 질적 발전 속도가 더디다. 병원은 커지고 많아지며 시설은 좋아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의료 사고’는 빈발하고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의료 사고 스캔들은 이러한 한국 의료 시스템 실패에 대한 ‘적신호 사건’이다. 고(故) 신해철 사망 당시 “그나마 유명인이었기에 이 정도나마 공론화될 수 있었다”는 자조적 표현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문제는 잠복되어 있고 심각하다.
미국 의학학술원이 지난 1999년 발간한 보고서는 매년 4만4000명에서 9만8000명의 환자가 의료 과실로 사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보고서 이후 미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사회적 논의가 불 붙였다. 이 규모는 미국에서 유방암이나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많은 것이다. 병원에 병을 고치고 생명을 구하러 왔다가 오히려 생명을 잃고 나가는 사람이 있고,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연구 결과였으니 그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가 나온 이후 미국에서는 환자 안전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졌고 현실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매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의료 사고’ 사건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를 한국 의료의 ‘시스템’ 문제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접근은 적다. 의료인 개인이나 특정 의료기관 문제로 치부될 뿐, 그와 같은 사고가 반복적으로 재발하는 근본 이유에 대한 성찰과 그에 따른 시스템 개혁 논의는 부족한 것이다.
올해 1월 ‘환자안전법’이 제정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고 이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법이 시스템 개혁을 위한 영역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환자 안전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병원 인력’에 대한 논의가 이 체계 내에서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법 제4조 2항에서는 “보건의료기관의 장과 보건의료인은 환자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아니하도록 시설·장비 및 인력을 갖추고, 필요한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보건의료기관장과 보건의료인에게 환자 안전을 위한 인력 확충 의무를 부과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법 조항은 선언적 의미가 커서 과연 어떻게 이 의무가 작동되게 할 것인가에 대해 불명확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환자 안전 영역에서 병원 인력의 수와 질이 가지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병원에 충분한 수의 인력이 있어야 병원이 안전해지고, 충분히 숙련되고 훈련된 인력이 병원에 근무해야 의료 사고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의료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미국 의학학술원의 보고서에서도 기대하지 않은 부정적 치료 결과를 초래한 원인의 24%를 인력과 관련된 문제로 추정했다. 쉽게 말해 병원에서 의료 사고로 사망한 이들 중 4분의 1은 해당 병원에 인력이 충분했거나 실력 있는 인력이 근무했더라면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간호사 인력 수준이 높을수록 재원일수 감소, 요로감염률 감소, 상부 위장관 출혈 감소, 수술 환자의 폐렴 이환율 감소, 수술 환자의 혈전증 감소, 수술 환자의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률 감소 등이 보고되었다. 한국에서도 중환자실에서 간호사가 담당하는 환자수가 많아지면 환자 사망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병원의 간호사 인력 수준은 OECD 국가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다. OECD의 2013년 통계에 따르면, 병원에서 간호사 1인이 담당하는 환자수가 일본은 7명, 미국은 5명이다. 이에 견줘 한국은 15∼20명 수준이다. 특히 간호사가 매 시간 돌봐야 하는 ‘급성기 병상’ 1개당 간호사 수는 0.28명에 불과해 OECD 평균인 1.13명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다보니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간호사의 얼굴보기도 힘들고,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높은 노동 강도에 시달리며 업무 만족도가 떨어져 이직률이 높아지고 있다.
병원 인력의 절대 수가 적은 것도 문제이지만, 병원 인력의 질이 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병원에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병원 직원의 이직률이 높아지면 미숙련 인력이 많아지면서 의료서비스 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병원에 비정규직이 많아지면, 인력 교체가 잦아지면서 업무 숙련도도 저하된다. 또 의료 팀내 혹은 의료 팀간 의사소통 장애가 발생해 의료 사고의 가능성이 증가한다. 병원 직원의 이직률이 높아지면 늘 다수의 신규 직원이 근무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자연히 직원 전체의 업무 숙련도가 저하되고 의료 사고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현재 한국 병원의 비정규직 규모는 국립대병원만 보더라도 25%에 육박하고 있다. 이 중 간호사, 의료기사 등 의료 부문의 직접고용 비정규직 규모도 12%에 달한다. 이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어가는 추세다. 간호사의 높은 이직률도 문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호사의 노동 강도가 높다보니 병원급 이상 간호사의 평균 근속년수는 8년에 불과하고, 이직률도 20%에 가까운 실정이다.
최근 병원 경쟁이 극심해지고 병원의 영리성이 커짐에 따라 비용 절감 차원에서 치료 재료비를 절감하려다가 저질 재료 사용으로 환자 안전에 문제가 생기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병원에서 재료비를 아끼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아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재료를 아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국 병원에서는 이러한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주사기, 붕대, 반창고 등 치료 재료를 저질 재료를 사용하게 되면 환자 감염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투약 오류의 가능성이 증가하는 등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환자 안전은 병원의 상업성, 영리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병원이 더 상업적이 되고, 영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심해질수록 환자 안전은 위협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이 수익을 내려면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해 과잉진료를 일삼거나, 비용절감을 위해 인건비, 재료비 등을 줄여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환자에게 해롭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에 비해 환자 사망률이 2%나 더 높았다. 이는 똑같은 병명으로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에 각각 100명의 환자가 입원하면, 비영리병원에서는 모두 완쾌되어 퇴원하지만, 영리병원에서는 2명이 죽어나온다는 얘기다. 실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환자 안전과 관련된 시스템 개혁을 위해서는, 한국 의료의 상업화, 영리화 문제와 의료 인력 문제를 에둘러 갈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이상윤(건강과대안 연구위원)
이 글은 프레시안 2015년 5월 5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