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 한 건물의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됐다. 긴급 체포된 피의자가 “여자라서 살해했다”고 진술한 것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추모의 물결은 온라인을 넘어 사건 현장과 가까운 강남역 10번 출구로 이어졌다. 연간 1 천여 건 발생하는 살인사건에 이렇게 많은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미 많은 주장이 나왔지만 이 현상의 의미를 찾고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논의의 진전을 방해하는 일부 ‘퇴행’ 에 맞서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는 맥락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추모에 끼어들어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성차별적 시각을 과시하는 일부 남성의 몰지각한 행태가 대표적인 퇴행이다. 남녀 화장실 분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행정편의적 발상 역시 사건의 함의를 축소시키는 시각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경찰의 대응으로 인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의 강화다.
경찰은 이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지어 발표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의 범죄 분류 체계에 따르면 합리적인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특정의 대상을 상대로 행해지는 범죄행위는 ‘묻지마 범죄’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경찰의 발표는 조현병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로 이어졌다. 공영방송인 KBS는 5월 23일 “조현병 특징 ‘망상・환각’…심해지면 ‘범죄’”라는 제목으로 ‘묻지마 강력범죄 가운데 조현병으로 인한 범죄가 30%’라며 조현병이 범죄와 관련성이 있다고 보이도록 단정지어 보도했다.
증상 조절이 되지 않는 급성기 조현병 환자들은 논리적 사고능력과 현실검증력을 잃을 수 있다. 그런 상태의 환자들이 공격적 행동을 했을 때 경찰의 분류체계 수준으로는 ‘묻지마 강력범죄’로 규정되는 것,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익히 예상한대로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을 비껴, 문제를 봉합하려는 정부와 경찰의 대응은 전문가들의 비판을 불러왔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성명을 통해 “가해자의 조현병 진단과 치료 병력이 집중적으로 보도되며, 이러한 분노와 혐오가 모든 조현병 환자들에게로 향하게 되지는 않을지도 염려”된다며 우려를 표했고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낮은 편이며, 적절한 급성기 치료 및 유지 치료를 통해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경찰과 일부 언론이 이 사건을 대하는 관점은 사건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과도한 불안감을 조장했다고 보는 것 같다. ‘여자라서 죽였다’라는 피의자의 초기 진술이 정신질환자의 망상이었음을 강조하면, 대중의 불안감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은 대중이 몇몇 정보만으로 쉽게 선동된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우선 문제가 있다. 또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조장으로 또 다른 사회적 배제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문제가 있다.
게다가 정신질환 환자들의 인권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다시 이러한 논의를 하는 동안 애초에 사건의 중심이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진단이 틀렸으니 적절한 해결책이 나올 리도 만무하다. 경찰이 ‘정신질환자의 범죄 위험도를 진단하고 행정입원을 요청하기 위한 체크리스트를 마련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는데도 여론이 평정을 찾지 못하고 여성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정신과적 문제가 없는 남자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불안감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의해 조장된 것이 아니라 단지 확인된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사실 그동안 불안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혼자만 불안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런 불안감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애초에 강남역 10번 출구에 여성들이 모인 것은 살해된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를 애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조심히 들어가! 도착하면 카톡 해! 남성분들도 귀가할 때 이런 인사를 하십니까?’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한 포스트잇의 내용이다. 여성들은 살해된 20대 여성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새삼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남역 살해 피의자는 여성을 혐오했을 수도 있고 조현병 증상에 의한 피해망상적인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제 3의 이유일지도 모르며 정신감정에도 불구하고 결국에서는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 피의자의 내면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전제될 필요는 없다.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과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다.
후자의 사건의 피해자는 2015년에도 여전히 성평등지수 세계 115위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모든 한국 여성들이고 가해자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는 성차별과 만연해 있는 성폭력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1천여 개의 포스트잇은 여성들의 인내가 임계점에 다다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115번째를 차지할 만큼 많이 기울어진 사회의 여성들에게 우리는 또 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할 것인가. (끝)
이승홍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