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에 들어가니 수술대 의자와 수술 도구에 바로 전 사람이 수술할 때 묻은 것 같은 피가 보였습니다. ‘이런 비위생적인 병원에서 왜 내가 내 돈 주고 수술을 받아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어렵게 찾은 병원인데 수술 못 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결국 아무것도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의료진 역시 저에게 수술 방법이나 후유증에 대해서, 또 어떻게 몸을 관리하고 뭘 조심해야 하는지, 일반적인 의료과정이라면 당연히 의무적으로 알려줘야 할 부분을 전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수술 후 저는 출혈이 너무 심하고 길어서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검사를 위해 재방문하라는 병원의 문자를 받고도, 불결하고 존중받지 못했던 경험이 떠올라 다시 그 병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낙태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저에겐 임신을 중단할 권리만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할 기본적 권리도 없었습니다.” (지난 9월 28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발언 중 일부)
한 여성이 개인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간 병원에서 경험한 사례다. 우리 사회가 임신중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여성의 건강권이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1년에 대략 17만 건의 인공임신중절이 이뤄지는 것으로 추산되며(2011년 복지부 조사 추산), 그중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절 관련 합병증을 앓거나, 심한 경우에는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임신중절은 불법이나, 특정 사유에 한해서는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과 제한적 수준(너무나도 제한적이기는 해도)의 법적 허용기준을 고려해보면,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은 안전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건강과 신체에 대한 자율권을 가지며, 최고 수준의 건강을 누릴 기회를 받을 권리가 있으나, 사회가 이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임신중절을 불법화하고, 여성을 처벌하는 낙태죄를 통해 임신중절을 “소외질병화”시키며, 임신중절을 선택한 수많은 여성을 위험하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환경에 노출시킴으로써 여성의 건강권을 지속적으로 침해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만 유행하는 질병이 그러하듯이, 한국에서의 임신중절 관련 의학기술과 지식은 아무도 애써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더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결국 여성에 대한 건강의 위협, 경제적 불평등으로 나타난다. 임신중절이 불법이다 보니, 산부인과 커리큘럼이나 임상 실습, 수련과정에서도 임신중절 시술을 교육하지 않는다. 수련을 마치고 임상에 나가서야 인공임신중절 실태와 최신 지식을 접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임신중절이 일정 수준에서 합법화된 미국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중 97%, 산부인과 레지던트 중 36%가 임신 제1/3분기 임신중절 수술 경험이 없었다.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의과대학 교육 프로그램 중 소수만이 의학 수련에서 임신중절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다.
외과적 수술보다 부작용도 많지 않고, 건강상의 위험도 크지 않으면서도 가격도 저렴한 약물적 유산유도제 중 하나인 미페프리스톤의 경우, 한국에서는 합법적으로 구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다. 여성들은 해외에 사는 지인을 통해서 혹은 인터넷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미페프리스톤을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 건강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시술에 따르는 위험과 비용 모두 여성이 개인적으로 처리하고 감내해야 한다. 이는 단지 기술적 측면에서만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다. 임신중절이 불법화된 상황에서 여성의 선택지는 경제적 수준에 따라 현격히 줄어든다. 경제적 취약계층은 위험한 수술이나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결국 항시적인 건강권 침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임신중절이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서 여성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행위가 된 가장 큰 원인은 임신중절을 범죄로 규정하고 또 사회문화적 일탈 행위로 낙인찍어버리고 말았던 한국 사회 때문이다. 여성들이 알아서 해결해 버리고, 임신중절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 못했던 오랜 세월 속에서 여성의 건강권은 심각하게 침해되었으며,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여성일수록 겪었던 사회적 불평등과 위험성은 더 커져만 갔다. 그 고통은 기록되지도 못했고, 사회적으로 드러나지도 못했다. 이제 임신중절은 더 이상 소외질병화돼 외면하고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당당하게 이야기되고 안전하게 이뤄질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자, 건강권 실현의 중요 의제 중 하나로 인정받아야 한다.
박건(건강과대안 상임연구위원) / 여성신문 2017년 12월 12일자
http://www.womennews.co.kr/news/view.asp?num=128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