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낙태죄의 역사

들어가며

최근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그 시작은 2016년 9월 보건복지부가 ‘불법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예고하면서부터였다. ‘비도덕적 진료행위’라는 항목으로 ‘임신중절’을 추가하고, 시술한 의료인의 자격정지를 1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에 여성단체를 비롯한 진보진영이 거세게 반발했고 결국 개정안은 무효화됐다. 그러나 한 번 불붙은 운동은 그것으로 수그러들지 않았고, 낙태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2017년 9월 30일 청와대 게시판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한 달 새 23만여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낙태죄 폐지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런 열기에 청와대는 모호하게나마 검토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12월 3일 염수정 추기경의 ‘생명 수호’ 미사를 신호로 천주교의 전국 16개 교구가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종교계의 반발로 자칫 고전적인 태아 ‘생명권’ 논쟁의 ‘늪’에 빠지는 듯했으나, 다행히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들이 나서 논의 구도를 다잡았다.1) 12월 14일 120여 명에 달하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들이 “낙태 반대만이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며”, “생명윤리 관련 연구자로서 낙태죄의 폐지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현재 이런 논쟁 구도 속에서 모두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판결을 주목하고 있다. 헌재가 2017년 2월 8일 접수된 낙태죄(형법 269조 1항 및 270조 1항)의 위헌 여부에 대해 헌법소원을 심리 중에 있기 때문이다.2)

조선시대의 낙태죄

그렇다면 이 말 많은 낙태죄는 과연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한국에서 낙태에 대한 문제가 법으로 다루어진 것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태조는 건국과 동시에 형법 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범죄에 명나라의 형법전(刑法典)인 대명률(大明律)을 적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대명률은 낙태에 대해 ‘타태죄(墮胎罪)’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었다.

“다툼(鬪毆)에 있어 낙태를 하게 한 자와 칼로 상해를 입힌 자는 장형(杖, 체벌의 한 종류) 80대와 징역(徒) 2년에 처한다. 다만 보고기한(保辜期限, 상해의 경중이 결정될 때까지 가해자를 유치하는 기간) 내에 태아가 사망하고 그 사망한 태아가 수태 후 90일을 초과한 것으로서 형체가 이루어진 것일 경우 낙태죄(墮胎罪)로 처벌한다. 비록 구타로 인하였더라도 보고기한이 지나서 태아가 사망한 경우와 수태 후 90일 이내로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아니한 경우이면 범인을 각각 구타 상해의 본 조문에 따라 죄를 논하고 낙태죄로 처벌하지 아니한다.”3)

이것이 명률(明律)에 나온 유일한 낙태와 관련된 조문이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낙태 행위 자체를 처벌하지 않았으며, 상해 행위의 결과 낙태가 될 경우에 한해 가중 처벌하는 정도였다. 또한 상해 행위 결과 낙태된 태아가 약 3개월(수태 후 90일) 이내일 경우에는 가중 처벌조차 하지 않았다. 즉, 적어도 법적으로는 낙태를 하는 여성과 이를 도운 자들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었고, 약 3개월(수태 후 90일) 이내의 태아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조선 말 개화의 바람이 불며 근대적인 형법 체계가 논의되었다. 이 형법초안(刑法草案)에는 일본 형법의 영향을 받아 낙태를 하는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 산파, 약상(藥商)에 대한 처벌규정이 포함됐다. 그러나 논의를 거쳐 1905년 최종 반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의 내용은 그 초안과 사뭇 달랐다.

제533조 낙태한 자는 아래와 같이 처한다.4)
1. 임신한 여성(婦女)을 구타하여 낙태에 이르게 한 자는 징역 2년이며, 태아가 90일 미만일 경우 100대의 태형(笞)에 처한다.
2. 임신한 여성을 위협하여 낙태에 이르게 한 자는 징역 1년이며, 태아가 90일 미만일 경우 80대의 태형에 처한다.
3. 임신한 여성, 남편, 또는 그들의 부모, 조부모의 청탁을 받아 약물 혹은 기타 방법으로 낙태를 행한 자는 징역 10개월이며, 태아가 90일 미만일 경우 70대의 태형에 처한다.
4. 간통한 남성이 약물 혹은 기타 방법으로 간통한 여성이 임신한 태아를 낙태시킬 경우 징역 3년에 처한다.
5. 1,2,3항에 해당하는 행위를 만약 친족(親屬)이 범할 경우에는 제64조의 친속등급에 따라 죄의 경중을 따진다.
제486조 임신한 여성의 청탁에 따라 낙태약을 사용하였으나 그 결과 임신한 여성이 사망할 경우 징역 3년에 처한다.

대한제국 시절 반포된 형법대전의 가장 큰 특징은 의료인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청탁을 받아 약물 혹은 기타 방법으로 낙태를 행한 자를 처벌하는 ‘타낙태(他落胎)’ 처벌 규정을 두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낙태를 한 여성에게 죄를 묻는 ‘자낙태(自落胎)’ 처벌 규정은 끝내 포함하지 않았으며, 명률에서와 유사하게 90일을 기준으로 그 죄의 경중을 나누었다. 형법초안에서 논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낙태 처벌 규정이 빠진 것은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을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낙태죄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대한제국 시절 형법대전을 대신해 일본 형법을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겠다는 조선형사령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1912년부터 일본 형법의 ‘타태죄(堕胎の罪)’가 조선의 낙태를 관장했다.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일본 형법의 타태죄5)
제212조 임신한 여성(婦女)이 약물을 사용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213조 여성의 청탁을 받거나 또는 승낙을 얻어 낙태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이로 인하여 여성을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3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214조 의사·산파·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여성의 청탁을 받거나 또는 승낙을 얻어 낙태에 이르게 한 때에는 3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이로 인하여 여성을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한 때에는 6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215조 여성의 촉탁을 받지 않거나 또는 그 승낙을 얻지 않고서 낙태한 자는 6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에 대한 미수 역시 처벌한다.
제216조 215조의 죄(여성의 촉탁을 받지 않거나 또는 그 승낙을 얻지 않고서 낙태한 경우)를 저질러 여성을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상해죄와 비교하여 무거운 것으로 처벌한다.

이로써 조선에도 낙태한 여성에게도 죄를 묻는 자낙태 처벌 조항이 도입됐다. 아울러 타낙태를 행위 주체와 동의 여부에 따라 세분하였다. 특히 행위 주체 중 의사·산파·약제사 또는 약종상을 따로 명시하여 처벌 규정을 두었다. 이 일본 형법의 낙태죄 규정은 해방 후에도 미군정기를 거쳐 1953년 대한민국 형법이 제정되기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실제 일제시기 신문 기사를 통해 이 낙태죄에 의해 조선 민중들과 의료인들이 적지 않은 고충을 겪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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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세 여성이 가정 형편상 도저히 낙태시키지 않으면 안 될 형편임을 호소하며 낙태시킬 방법을 묻고 있으나, 그런 이유로는 법률상 수술받을 수 없다고 답변하는 기사(1933년 9월 2일 자 <동아일보> ‘지상병원’에 나온 경성제대산부인과 윤태권 의사 상담 내용)

해방 이후의 낙태 관련 법규

해방 이후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법전편찬위원회는 헌법초안을 작성하였으며, 낙태죄 폐지가 비중 있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일단 규정해 놓고 국회에서 차후 심의하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원안을 작성하였다.

제287조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케 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 전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치상케 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치사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288조 의사, 의생(전통의사-필자), 산파,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케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치상케 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치사케 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2항의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한 낙태죄의 원안은 1951년 4월 13일 정부초안으로 국회에 이송됐다. 국회에 이송된 정부초안은 1952년 8월 29일 수정, 의결되었다. 이 수정 과정에서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 없이 낙태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부동의낙태죄(不同意落胎罪) 규정까지 추가되었다. 사실상 일제 강점기의 낙태죄와 거의 유사한 형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정부초안 입안자들도 현실적인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낙태죄가 봉건적인 규정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들은 일단 낙태죄를 두되 특별법을 만들어 각종 특수 사정을 고려하겠다고 항변했다. 또한 의사 등의 시술 행위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도 “형법 제20조 업무상 정당한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형법제정을 주도한 엄상섭(嚴詳燮)은 국회에서 낙태죄에 대한 비판에 형법 제20조를 언급하며 낙태죄에 대한 규정을 둔다고 하더라도 “모체가 약하다든가 진료상 필요가 있다든지 그러한 이유로 낙태를 시킨 경우 절대로 죄가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6)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정부초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변진갑(邊鎭甲) 외 20인의 국회의원이 낙태죄 전면 삭제를 포함한 수정안을 제출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7) 그러나 “6·25동란 이후 상당한 인구의 소모도” 있었고, “독립국의 주권을 유지하고 나갈만한 국가가 되려면 적어도 인구가 4000만 이상은 있어야 된다”는 국가주의적 주장이 낙태죄 반대 주장을 압도해8) 결국 정부초안이 통과됐다.

모자보건법의 탄생

낙태죄는 두되 특별법을 만들어 각종 특수 사정을 고려하겠다는 1953년의 항변은 20년이 지난 1973년에서야 지켜졌다. 1973년 ‘모자보건법’ 제정 당시 제8조(현재는 제14조)에서 낙태(인공임신중절수술) 허용 사유로 제시한 것은 아래와 같다.

1. 본인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한 경우
4.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한 경우
5.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그러나 이 모자보건법은 배경, 절차, 내용 등 모든 면에서 한계가 컸다. 우선 박정희 정권이 모자보건법을 제정한 배경은 경제 성장을 위한 가족계획사업 추진에 있었다. 즉, 낙태 허용의 배경마저, 일제시기 일본 본토의 낙태죄를 그대로 도입했고 그 낙태죄를 해방 이후에도 존치시켰던, 바로 그 ‘부국강병’을 앞세운 국가주의 논리였다. 그 절차 역시 정상 국회가 아닌 유신 체제 하 비상국무회의에서 처리됐다. 민선 국회에 의한 입법이 아니라 비민선, 비상입법기구에 의한 비공개적 입법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 각계의 의견이 반영되기는커녕 상당부분 시대에 맞지 않는 전근대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비공개로 처리된 법이기에 자세한 논의과정을 파악할 수 없으나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일본에서 1949년 만들어진 우생보호법의 낙태 관련 조항은 아래와 같다.

제14조 광역자치단체차원에서 설립된 사단법인인 의사회가 지정한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 또는 배우자에 정신병이나 지적장애, 정신병질, 유전성 신체 질환 또는 유전성 기형이 있는 경우.
2. 본인 또는 배우자의 4친등(親等) 내의 혈족(血族) 관계에 있는 자에 유전성 정신병이나 유전성 지적장애, 유전성 정신병질, 유전성 신체질환 또는 유전성 기형이 있는 경우.
3. 본인 또는 배우자가 나병 환자인 경우.
4. 임신의 지속과 분만이 신체적 또는 경제적 이유로 인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5.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해 저항과 거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강간당하고 임신된 경우.

이처럼 한국의 모자보건법은 일본의 우생보호법에서 나병을 전염성 질환으로 바꾸었을 뿐 거의 동일하다. 사실 이 일본 우생보호법은 독일 나치의 ‘단종법(Prevention of Progeny with Hereditary Diseases Act, 1933)’에 영향을 받아 1940년 만들어진 일제 ‘국민우생법’을 모체로 하고 있다. 원래 이 국민우생법은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전황(戰況)이 급박해지면서 실현되지는 않았다(그럼에도 소록도에서는 1935년부터 강제 낙태·단종이 행해졌다). 그래도 일본의 경우 1949년 국민우생법을 우생보호법으로 바꾸면서 낙태 허용 조건에 (밑줄 그은) “경제적 이유”를 포함시킴으로써 일말의 진전을 보았다. 그런데 한국의 모자보건법은 24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를 본뜨면서도 정작 이 부분은 쏙 빼놓고 오히려 전근대적인 “우생학적”이라는 표현을 집어넣었다.9)

그러나 대법원은 이 모자보건법으로 제한적이나마 합법적인 낙태가 허용되는 것도 못마땅했는지, 형법 제20조에 따라 낙태 수술을 한 의사를 사실상 처벌하지 않던 것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985년 대법원은 갑작스레 임산부의 촉탁에 의한 의사의 낙태 시술이 정상적인 행위로서 사회상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모자보건법이 특별한 의학적, 우생학적 또는 윤리적 적응이 인정되는 경우”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형법 제270조 제1항이 “무가치하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며 모자보건법으로 한동안 위축돼있던 낙태죄를 일으켜 세웠다.10)

대법원의 이런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워낙 현실과 동떨어진 탓에 낙태죄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고발의 주체로 나서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2009년 등장한 ‘진오비(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수술을 행한 의사와 병원을 고발하기 무섭게 낙태죄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엄청난 위력을 과시했다. 그들이 고발하겠다는 엄포만으로도 낙태 수술을 해주는 병원은 급감했고, 낙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본 낙태죄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낙태죄의 질긴 명줄이 아니다. 그 길고 긴 낙태죄 논의의 역사에서 실제 낙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 엄혹한 역사를 뚫고 이제 겨우 울려 퍼지기 시작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각주

1)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ㆍ철학ㆍ신학 연구자 연대는 ‘낙태 반대만이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이미 낙태를 통해 충분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을 형법으로 단죄하여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으며, 이는 여성에게만 가혹한 불공정한 일이고, 또 낙태를 불법으로 단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 이 헌법소원은 2012년 8월 헌재가 태아의 “생명권이 인정돼야 한다”며 낙태죄는 합헌이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린 지 5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시에도 9명 정원의 헌법재판관 중 재판관 1명은 공석이었고,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은 4명으로 찬반 동수였으나, ‘위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6명의 재판관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합헌으로 결정이 났다.

3) 원문과 법제처의 해석본(法制處(譯), 大明律直解 卷20, 刑律 鬪毆編 鬪毆條, 法制資料 第13輯, 1964, 418~9쪽)을 토대로 필자가 현대적인 표현으로 다듬은 것이다.

4) 원문(刑法大全, 第五編 刑律下 第九章 殺傷所干律 第二十一節 墮胎律)과 해석본(송병기 외, 한말근대법령자료집IV, 국회도서관, 1971, 205~6쪽, 195쪽)을 토대로 필자가 현대적인 표현으로 다듬은 것이다.

5) 원문(일본 구형법)과 번역본(신동운·최병천, ‘형법개정과 관련하여 본 낙태죄 및 간통죄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1, 55쪽)을 토대로 필자가 현대적인 표현으로 다듬은 것이다.

6) 제16회 임시국회 본회의 제17차 회의(신동운(편), ‘형법제정자료집’,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1, 464~465쪽)

7) 그렇다고 국회에서 낙태죄 조항 삭제를 주장한 국회의원들이 급진적인 논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인구증가에 대한 규제장치의 필요성이나 현실적인 고려였다. 물론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 개선의 맥락에서 낙태죄 조항 삭제를 주장한 국회의원도 있었다.(신동운(편), ‘형법제정자료집’,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1, 455쪽)

8) 엄상섭은 제15회 정기국회 제55차 본회의에서 낙태죄가 봉건적인 규정이라는 비판에 대해 “6.25동란 이후 상당한 인구의 소모도 있어서 더 좀 많았으면 좋겠고 흔히 강국으로서의 독립국의 주권을 유지하고 나갈만한 국가가 되려면 적어도 인구가 4000만 이상은 있어야 된다는 이런 말도 우리가 흔히 듣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신동운(편), ‘형법제정자료집’,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1, 453쪽)

9) 참고로 일본의 우생보호법은 1996년의 법 개정을 통해 법률명이 ‘모체보호법’으로 변경되었으며 우생학적 사상에 근거하여 규정되었던 강제적 단종 등에 관한 조문이 삭제되었고 ‘우생수술’이라는 용어도 ‘불임수술’로 수정되었다.

10) 대법원 1985.6.11, 84도1958, 공 1985.8.1(757), 1025 참조.

참고문헌

- 1차 자료 : 중요도 순
2017년 9월 30일 청와대 게시판 청원 글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 바로 가기) :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18278
‘대한민국 형법’
‘모자보건법’
‘일본 국민우생법’
‘일본 우생보호법’
‘일본 구(舊)형법’
刑法大全, 第五編 刑律下 第九章 殺傷所干律 第二十一節 墮胎律
法制處(譯), 大明律直解 卷20, 刑律 鬪毆編 鬪毆條, 法制資料 第13輯, 1964
판결문 : 대법원 1985.6.11, 84도1958, 공 1985.8.1.(757), 1025
송병기 외, 한말근대법령자료집IV, 국회도서관, 1971
1933년 9월 2일 자 <동아일보> ‘紙上病院: 유산시키려면’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 2017년 12월 14일 성명 ‘낙태 반대만이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 2차 자료 : 가나다 순
신동운·최병천, 형법개정과 관련하여 본 낙태죄 및 간통죄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1
신동운(편), 형법제정자료집,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1
신영전, 식민지 조선에서 우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의사학, 2006
전효숙·서홍관, 해방 이후 우리나라 낙태의 실태와 과제, 의사학, 2003
莇昭三, 十五年戦争と日本民族衛生学会(協会)(その二), 日本醫史學會雜誌 第48卷3号, 2002
정현미, 낙태죄와 관련한 입법론, 형사법연구 제22호 특집호, 2004
최규진, 낙태 윤리 논쟁과 낙태권 운동, 마르크스21 제6호, 2010

최규진(건강과대안 운영위원/인하대학교 교수) / 의료와사회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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