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2018년 초부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이 제기하는 문제는, ‘말할 수 없음’이다. 종래에 성폭력에서 피해자의 침묵은 범죄 없음, 피해 없음을 의미했다. 성폭력이 아니라 성관계이기 때문에 거부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은 피해자의 침묵이 피해 없음이나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드러내고 있다. 피해를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하고 드러낼 수도 없게 하였던 권력은 바로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그 권력이다.
의료계에서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환자의 진료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영역의 업무 특성상 환자나 환자의 가족, 보호자 등에 대한 의료인의 성희롱·성폭력 또한 주목이 필요하다.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 및 성폭력1)은 의료인이 우월적 지위나 풍부한 의학적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신체 접촉이나 내밀한 신체의 노출이 일어나고 환자가 취약해지는 진료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의료행위와 성희롱·성폭력의 구분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등에서 특수성을 가진다. 때문에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성폭력은 명확한 강제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례도 많고 피해자가 성희롱·성폭력인지 여부를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리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 글에서는 의료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성희롱·성폭력의 유형과 사례를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검토하도록 한다.
2.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통계
우리 사회에서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성폭력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일어나는지 추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경찰청의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2016년 8월을 기준으로 최근 10년간 강간 및 강제추행으로 검거된 의료인 수는 696명이며 같은 기간 성범죄로 행정처분을 받은 사례는 5명에 불과하다고 한다.2) 전문직군의 강간, 강제추행 검거 인원수를 기준으로 하면 강간 및 강제추행으로 검거된 전문직군 중에서 성직자 비중이 가장 높고 그다음이 의료인으로, 시점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의료인이 대체로 전체 전문직군 검거 인원의 11~14% 정도를 차지한다.3)
검거 인원이 모두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피해 경험 조사 결과를 보면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피해는 이보다 더 많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진료 과정에서 여성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경험을 조사한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병원 등 의료기관 이용 경험이 있는 성인 여성 1000명 중 11.8%가 진료 시에 의료인, 의료기사로부터 또는 의료기관의 이용에서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하였다.4)
이 조사는 환자의 주관적 피해 경험을 질문한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건의 경험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과잉이거나 부주의한 의료행위, 또는 통상적인 의료행위이지만 성적 수치심을 야기한 행위에 대한 경험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여성 10명 중 1명 이상이 성적 수치심을 호소한다면 그 원인과 내용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성립하기 위해서 언제나 행위자의 성적 의도나 성적 욕구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료기관 이용자들의 성적 수치심 경험은 의료진과 의료기관 운영자들이 살펴보아야 하는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성희롱·성폭력 피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진료 과정에서의 경험은 진료라는 특수성이 대응에 영향을 준다. 같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서 피해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의 대응 방법을 알아보면 상대방에게 즉시 이의를 제기한 경험은 10.2% 수준에 그쳤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경험이 52.5%로 가장 많았으며, 그다음 순위는 해당 의료기관에 다시 가지 않는 것(31.4%)으로, 응답자들은 성적 수치심을 느꼈더라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기껏해야 의료기관을 바꾸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5)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은 응답자 중 46.9%가 ‘진료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를 그 이유로 꼽았고, 다음으로 많은 응답은 ‘적극 대응을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30.2%)였다.6) 의료기관 이용자가 성적 수치심을 경험하더라도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의료기관을 바꾸는 선에서 그친다면, 분쟁은 생기지 않고 의료기관 이용자는 같은 상황에 다시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당 의료인이나 기관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동일한 문제를 다른 이용자에게 다시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필요한 적절한 조치는 취해질 수 없고, 재발 방지를 위한 방안의 모색이나 처리 절차의 정비는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3.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례와 문제점
환자 또는 환자의 가족이나 보호자 등에 대한 의료인의 성희롱·성폭력에서 주목이 필요한 영역은 의료인이 가해자가 되는 성희롱·성폭력 중에서도 의료인으로서의 지위나 업무 수행과 관련한 행위들이다. 의료인으로서의 지위와 의료인으로서의 업무 수행은 성희롱·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는 반면 성희롱·성폭력의 식별이나 문제 제기, 신고 등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의료인으로서의 지위나 업무 수행과 관련해 발생하는 성희롱·성폭력 사례들을 특성에 따라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 의료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환자 또는 보호자를 간음, 추행, 성희롱하는 경우이다. 의료인이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환자나 환자의 가족, 보호자 등에 대한 의료인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의료행위에서의 이익이나 불이익 대가를 제시하는 성적 강요, 성적 접근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례1>
암으로 입원해 있는 환자의 딸 A를 담당 의사가 숙직실로 불러서 자기와 성관계를 하면 엄마를 잘 보살펴주겠다고 하면서 성관계를 요구하였다. A가 거부하였지만 의사는 A를 침대로 데려가 옷을 벗기려고 시도하였고, 마침 동료 의사가 들어와 멈추었다.(상담일지)7)8)
<사례2>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의 미성년자인 딸 B가 병원에 방문하자 의사가 ‘엄마 다친 부위를 가르쳐주겠다’면서 B의 가슴을 만졌다.(상담일지)9)
위의 두 사례는 성폭력상담소에 상담한 내용으로, 환자의 가족에 대한 의사의 강간미수 및 추행 사례를 보여준다. <사례1>의 의사는 어머니의 치료를 대가로 딸에게 성관계를 요구하였고, <사례2>는 어머니를 치료하는 의사라는 지위와 상황을 이용하여 환자의 딸인 청소년을 추행한 것으로, 상대방이 거부하거나 사후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이용한 성폭력 사례들이다.
환자의 가족이나 보호자만이 아니라 환자 본인에 대한 성적 접근도 발생한다. 장기 입원 중인 환자에게 진료 시간이 아닌 늦은 밤에 찾아가 예쁘다고 하면서 성적 표현을 하거나 환자의 몸을 만지거나 성관계를 요구하는 상황, 환자에게 치료와 관련하여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병원 밖에서 만날 것을 종용하는 상황 등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이용한 간음, 추행만이 아니라, 의료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환자를 간음하거나 추행하는 행위 또한 업무상 위력(威力) 간음, 추행의 성폭력범죄에 해당된다.
위력과 그로 인한 저항 불가능은 종종 입증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의료인의 사회적 지위나 권세 때문에 환자가 성적 접근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점이 입증되지 못하더라도 환자와의 성적 접촉은 의료인에게 있어 회피해야 하는, 의료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평가된다. 강제성이 없거나 환자가 동의하였거나 나아가 환자가 먼저 유도한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치료를 받는 입장에 있는 환자는 의료인에 대하여 취약한 지위에 있고 진료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의료인의 요구를 거부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으므로 환자의 동의나 거부 없음이 성적 관계의 적극적 합의를 의미하는지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치료 기간의 성적 관계는 진료 과정에서도 의료인의 객관적 판단 능력 손상, 진료 지시에 대한 환자의 순응도 저하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10) 환자의 치료가 종료된 이후라도 과거 환자와의 관계에서 환자가 여전히 취약한 지위에 있고 의료인으로서의 지위가 관계에 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다면 그와 같은 관계는 회피되어야 한다. 의료인과 환자의 가족 또는 보호자와의 관계 또한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된다.
둘째, 진료 과정을 이용하여 환자를 준강간, 준강제추행, 성희롱하는 경우이다. 준강간, 준강제추행은 상대방의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추행하는 경우로서 피해자가 잠이 들었거나 만취 상태에 있어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 이에 해당된다. 의료행위의 맥락에서는 수술 등의 목적으로 마취된 환자를 간음, 추행하거나 성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례3> 진료 과정에서 환자가 마취되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의료진들이 환자를 비하하는 말을 하고 환자의 하의를 벗겨서 음모 부분을 쓸고 환자의 다리를 벌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상담일지)11)
위 사례는 마취된 상태를 이용하여 언어적 성희롱, 준강제추행 등이 발생한 경우이다. 마취와 같이 의식이 없는 상황은 진료 과정에서 환자가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는 때이므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성적 폭력은 비난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 사례의 경우 지속적인 진료 과정에서 이상함을 느낀 환자가 녹음, 녹화 등을 하여 피해를 알게 되었지만 일회성 사건인 경우에는 피해자가 피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기 쉽다. 환자가 스스로 피해를 감지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여 피해를 밝혀내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이와 같은 유형의 성희롱·성폭력은 결국 상황을 목격한 동료 의료진의 문제 제기가 있어야만 중단될 수 있다. 의료인의 문제의식과 의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의료행위를 가장한 간음, 추행, 성희롱 사례이다. 성폭력범죄 중에서는 업무상 위계(僞計)간음, 업무상 위계 추행이 이에 해당한다. 위계간음, 위계추행은 행위의 목적이나 수단을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상대방이 오해하거나 착각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추행하는 경우이다. 지적장애인이나 아동, 청소년에 대한 범죄를 제외하면 비장애 성인에 대하여 위계를 이용한 간음, 추행은 주로 의료나 종교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경향이다. 의료 영역에서는 진찰이나 치료의 일환이라고 속여 환자를 추행하거나 심지어는 간음하는 행위로 나아가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속이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통상적인 의료행위를 하는 도중에 남성 의료인이 젊은 여성 환자에게만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촉진이나 청진 등을 과하게 하는 사례12)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환자들은 의료행위인지 여부를 확신하기 어렵거나 성폭력의 입증에서 의학적 지식을 가진 의료인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대응을 포기하기도 한다.
<사례4>
응급실에 복통을 호소하며 찾아온 여성 환자에게 인턴 의사가 담요를 가져다주면서 브래지어를 풀고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있으라고 한 뒤, 진료를 빙자하여 환자의 몸을 수차례 만졌다. 의사는 청진은 하지 않았고 가슴과 자궁이 부어 있는지 확인한다고 하면서 환자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 음부를 여러 차례 만지고 겨드랑이, 옆구리, 배, 손목과 발목, 종아리, 팔 등을 만지는 촉진을 4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하였다. 2차 촉진 후 위장약을 처방하고 약효가 충분히 나타나기도 전인 약 16분 만에 다시 찾아가 환자가 약효가 없다고 한다는 이유로 2차 촉진과 동일하게 가슴과 하복부 촉진을 반복하였으며, 4차 방문 시에는 10여 분에 걸쳐 가슴을 비롯한 환자의 몸을 만지고 볼과 목을 쓰다듬으면서 ‘접수할 때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느냐, 나중에 잘 나았는지 전화할 테니 받아라’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1심 법원은 업무상 위계 추행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 명령을 선고하였다.(판례)13)
<사례5>
의사가 허리 부상을 입은 17세 여성의 재활치료를 하면서, 엎드려 등뼈 교정치료를 받던 환자를 천정을 보고 눕도록 한 다음, ‘등뼈가 틀어져 있으니 갈비뼈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그 때문에 가슴과 젖꼭지도 틀어져 있다. 틀어진 가슴과 젖꼭지 때문에 나중에 배꼽티도 못 입으니까 지금 치료를 해야 한다’라며 치료의 일환인 것처럼 말하면서 피해자의 가슴을 옷 위로 주무르고 위아래로 흔들고 유두를 잡았다 놓는 동작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피해자가 추행인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 병원에 다니는 사이, 총 13회에 걸쳐 이러한 ‘치료’가 행해졌다. 의사는 척추측만증을 치료하기 위한 도수치료라고 주장하였으나 1심 법원은 미성년자인 피해자에 대한 위계 추행을 인정하여 징역 1년을 선고하였고, 항소심에서도 의사의 행위가 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판례)14)
<사례6>
정신병원 원장이 조울증으로 1년간 입원 중이던 30대 여성 환자를 아침마다 진료실로 불러서 ‘허그 치료’라고 하면서 볼을 비비고 몸을 밀착시키는 행위를 3개월에 걸쳐 반복하였다. 환자가 경찰에 신고하였지만 경찰과 보호자는 치료라는 의사의 말을 믿었고 그 이후 2개월 더 추행이 지속되다가 환자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였던 날 원장이 환자를 진료실로 불러 ‘내가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면서 눕히고 성관계를 한 뒤 신고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원장은 나중에 보호자에게 성 관계를 ‘성 치료’였다고 설명하였다.(언론보도)15)
위의 사례들은 의사가 촉진, 도수치료, 허그 치료, 성 치료 등 의료행위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 환자를 추행, 간음한 경우이다. 피해자들은 당시에는 의료행위라는 의사의 설명을 신뢰하였거나 의심이 들더라도 반신반의하다가 나중에서야 피해를 인식하고 신고하게 되었다.
<사례5>에서 17세의 청소년인 환자는 처음에는 추행인지 확신하지 못하였고, 불쾌하다는 표현을 하면 의사가 잡아뗄 것 같고, 의사가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이고, 병원에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에게 상황을 설명하기가 부담스러워서 병원에 계속 다녔다고 진술하였다.
<사례6>은 추행임을 인식한 뒤 피해자가 신고하였지만 경찰과 보호자 모두 피해자를 믿어주지 않다가 간음까지 이른 뒤에야 비로소 원장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의료인에 대한 신뢰와 의료행위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의 어려움 때문에 의료인에 의한 성폭력은 더 장기화되고 피해는 심화된다. <사례6>은 피해자의 진술과 음성 녹음 파일을 근거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어서 위계간음 여부의 법적 판단의 결과는 확인할 수 없지만,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병원 원장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설령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입원 중인 환자와의 성관계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넷째, 진료 과정에서 필요한 의료행위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희롱 사례이다. 환자나 보호자에 대하여 의료인이 의료행위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성적 표현을 하거나 불필요하게 음란한 그림, 영상 등을 보여주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사례7>
환자가 유방 검진을 위하여 상의를 벗고 누워있는 상태에서 의사가 검사기로 유방 주위와 유두를 건드려 환자가 간지러워서 몸을 살짝 비틀자 “왜 이리 좋아하는데, 요즘 남편이 잘 안 만져주는 모양이지”라고 말하였다. 환자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웃기시는 분이시네”라고 하자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남편 말고 옛날 애인이 만져줄 때 생각이 나는가 보네”라고 말하여, 환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고 경찰에 고소하였다.(진정례)16)
<사례8>
산부인과 원장이 진료 중 환자에게 결혼 여부를 질문하고, 특정 성기 크기가 너무 크다며 수술을 권유하였는데 환자가 거절하자 ‘돌아온 싱글이냐’고 반문하는 등 성적 수치심을 야기하였다. 환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고, 의사가 사과하여 합의종결되었다.(진정례)17)
<사례9>
설사 증상으로 병원에 간 환자에게 의사가 청진기를 브래지어 안쪽에 갖다 대면서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해봤느냐, 너는 그런 것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상담일지)18)
<사례10>
산부인과 진료 시에 의사가 자세를 지시하면서, ‘할 때 자세를 모르느냐’며 수치심을 주었다.(상담일지)19)
위 사례들은 의사가 의료행위와 무관하게 환자의 성적 수치심을 야기하는 표현을 한 경우이다. 치료의 일환이라거나 의료행위의 범위 내에 있는지 여부가 혼란스러운 사례들에 비하여 이러한 유형의 성희롱은 일반적인 직장 내 성희롱에서도 자주 문제가 되는 언어적 성희롱과 더 유사성이 있지만, 진료 과정에서 발생할 경우 의료인에게 신뢰를 가진 환자로서는 당황하기 쉽고, 당장 진료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서 즉각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다섯째, 의료행위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적 수치심을 야기하는 행위의 사례이다. 의료인으로서는 추행이나 성희롱의 의도가 없고 정당한 의료행위인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 환자나 보호자는 추행이나 성희롱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사례11>
허리 통증에 대해 교정 치료를 하면서 의사가 환자의 팬티를 엉덩이까지 내리고 엉덩이를 주무르는 등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는 이유로 환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다. 의사가 환자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위하여 환자들에게 치료 내용을 사전에 설명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합의종결되었다.20)
<사례12>
발진으로 한의원 진료 도중에, 한의원 원장이 환자에게 브래지어를 하였으니 괜찮다면서 가슴 부분을 살펴보고 바지를 벗으라고 강요하여 환자가 바지를 벗자 팬티 안을 들춰보는 등 성적 수치심을 주어 환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다. 한의원 원장이 환자에게 사과하고 200만 원을 지급함으로써 합의종결되었다.21)
<사례13>
가벼운 감기로 진찰 중에 내과 의사가 사전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로 환자의 브래지어를 들추고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댐으로써 성적 수치심을 주어 환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다. 의사가 환자에게 사과하고 향후 유사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합의종결되었다.22)
신체적 증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거나 수기치료를 하는 상황, 흉부 진찰에서 촉진, 청진 등이 필요하여 상의를 들어 올리거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진료하는 상황 등에서 환자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나 신체 노출이라고 생각하고 성적 수치심을 제기하는 사례가 많다. 이런 경우 의료인의 행동이 통상적 의료행위의 범주 내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내밀한 신체를 들여다보거나 접촉하는 행위를 환자 본인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지 않는 데서 대부분의 문제가 비롯된다.
의료행위는 성적 수치심을 야기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정당행위에 해당될 수 있다. 하지만 성희롱·성폭력이라는 주장을 단지 환자의 의학적 지식 부족이나 의료인에 대한 신뢰 부족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의학적 지식을 고정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태도이다. 어디까지를 필요한 의료행위로 볼 것인지는 단지 의학적인 판단만의 영역은 아니다. 환자를 의료행위의 대상으로만 보고 객체화하는 관점에서는 환자의 몸을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인식하고 오작동하는 신체 부위를 진단하고 치료하여 원래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때문에 그 과정에서 환자의 몸은 탈인격화되고 인격적 존재로서의 환자가 존엄성 침해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볼 경우 의료행위와 관련성이 있는 행위는 모두 정당행위에 포섭되고 성희롱·성폭력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의료행위에도 인간으로서 환자의 존엄성 존중이 요청된다고 본다면, 정당화될 수 있는 의료행위의 범주는 좀 더 좁아질 것이다. 정당화 근거의 설정이야말로 관점의 경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결론
의료인과 환자, 환자의 가족 또는 보호자 사이의 관계에서, 의료인에 의한 성희롱·성폭력은 문제 제기되지 않은 채 가려지곤 한다. 그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당장 진료를 받아야 하는 아픈 환자에게,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을 변경하는 것은 치료에 부정적 효과나 불이익이 발생할 것이 우려되고, 번거로우며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든다. 의료인은 환자의 개인정보를 보유하고 있어서 환자로서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진료가 대개 폐쇄되고 비공개적인, 때로는 의료인과 환자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료 과정에서 발생한 성희롱·성폭력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다. 의료인은 전문가로서 대체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고 전문성으로 인하여 신뢰를 받는다. 의료인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의료인이 성희롱·성폭력을 하였다고 판단 내리기까지 환자는 혼란을 겪게 된다.23) 환자는 의학적 지식과 정보의 부족으로 성희롱·성폭력인지 의료행위인지 여부를 기민하게 판단할 수도 없다. 의료기관 내 상담, 신고 및 처리절차가 미비하거나 있더라도 환자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문제 제기를 막는 이러한 이유들은 고스란히, 환자와 환자의 가족, 보호자 등이 의료인에 대하여 성희롱·성폭력에 취약한 이유가 된다.
폭행이나 협박을 이용한 강제적인 성적 접촉, 진료 과정을 이용한 의도적인 성적 접근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통상적인 의료행위의 범위를 넘어선 성희롱 또한 근절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이와 더불어, 의료행위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상대방에게는 성적 수치심을 야기하는 행위들 또한 의료인의 인식 변화가 요청된다. 본문의 사례에는 포함하지 않았으나 옷 갈아입기나 내밀한 신체 진료 등 환자의 신체 노출이 있는 행위를 충분히 차단되지 않은 공간에서 하도록 하는 것, 내밀한 신체 진료 등의 상황에서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거나 과도한 실습생 참관, 내밀한 신체 진료 등의 상황에서 환자의 의사를 무시한 이성 의료진의 진료 또는 갑작스러운 이성 의료진의 참여, 공개된 공간에서 성적 사생활을 질문하는 것과 같은 상황 등도 의료인에게는 통상적 의료행위의 범주 내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환자는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통상적인 의료행위조차 성적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의료인의 인식, 환자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환자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며, 그러한 인식과 과정은 무엇보다도 환자를 진료의 객체만이 아닌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유럽에서 환자의 권리 증진 선언’24)은 90년대 중반에 이미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환자의 권리로 천명한 바 있다. 제1조 1항에 위치한 이 권리는 다른 모든 권리보다도 앞서 제시되어 있다. 세계의사회(World Medical Association)가 현대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불리는 ‘제네바선언’25)의 2017년 개정에서 ‘환자의 자율성과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의사의 행동규범으로 추가한 것 또한 의료에서 환자의 인권 존중이라는 흐름과 필요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의료 환경에서도 환자 및 환자의 가족, 보호자 등에 대한 인격의 존중과 성희롱·성폭력의 근절이 의료인의 자명한 행동규범으로 자리 잡을 때이다.
김정혜(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연구교수) / 의료와사회 2018년 봄호(통권 제9호)
각주
1) 인재근 의원실, “최근 10년간 의사의 성범죄 747명, 행정처분은 고작 5명: 보건복지부 실태 파악조차 못해”, 인재근 의원실 보도자료, 2016.10.6.
2) 경찰청, “전문직군에 의한 강간‧강제추행 범죄 현황(‘10~’15년)”. 박남춘 의원실, “성공(成功)한 사람들의 성범죄(性犯罪) 5년간 3050건. 성직자>의사>예술인>교수 순”, 박남춘 의원실 보도자료, 2015.8.30.에서 재인용,
3) 차혜령 외, ‘진료과정의 성희롱 예방기준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13, 75쪽.
4) 차혜령 외, 2013, 84쪽.
5) 차혜령 외, 2013, 86쪽.
6) 차혜령 외, 2013, 109쪽.
7) 차혜령 외, 2013, 109쪽.
8) 차혜령 외, 2013, 209쪽.
9) 차혜령 외, 2013, 106~107쪽.
10) 차혜령 외, 2013, 154~155쪽.
11) 울산지방법원 2014.1.9. 선고 2012고단3544 판결.
12) 전주지방법원 2010.7.13. 선고 2009고단1562 판결, 전주지방법원 2010.12.10. 선고 2010노857 판결.
13) 2014년 12월 22일 자 <시사매거진 2580> ‘최훈, “성폭행이 ‘치료’라고? …정신과 의사의 황당한 치료”‘
14) 국가인권위원회 11진정0022600 사건.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자료.
15) 국가인권위원회 14진정416900 사건. 국가인권위원회 편, ‘성희롱 시정권고 결정례집 제7집’, 국가인권위원회, 2015, 179쪽.
16) 차혜령 외, 2013, 107쪽.
17) 차혜령 외, 2013, 107쪽.
18) 국가인권위원회 08진차331 사건.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자료.
19) 국가인권위원회 09진차0001464 사건.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자료.
20) 국가인권위원회 11진정0251400 사건.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자료.
21) WHO, A Declaration on the Promotion of Patients’ Rights in Europe, 1994, 선언에 대한 설명으로는 조홍준 외, ‘의료기관 이용자 권리 보호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국가인권위원회, 2008, 31쪽 이하를 참조할 것.
22) WMA Declaration of Geneva, https://www.wma.net/policies-post/wma-declaration-of-gene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