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겨레21]코로나19 사망자 숫자에 불과한 존재는 없다

체감하기 어려운 ‘코로나19 사망자 수치’가 말하지 않는 것

2022년 2월10일 코로나19 확진자가 일일 5만 명을 돌파했다. 과거 100명, 1천 명을 넘을 때마다 온 나라가 걱정과 긴장 속에 미래를 염려하던 때를 뒤돌아보면 5만 명이라는 ‘거대한’ 수치에 대한 시민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침착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찌 보면 확진자 수치에 대한 면역력이 형성된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체감하기 어려운 수치가 있다. 바로 사망자 수치다. 현재 누적 사망자 수는 6963명(2022년 2월10일 기준)에 이른다. 우리에게 사망자 수치는 코로나19 대유행의 확산과 방역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일 뿐일지 모른다. 팬데믹 시대에 타인의 죽음마다 슬픔을 같이한다면 그 삶 또한 견뎌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고 정유엽군 아버지가 375.4㎞를 걸은 이유
그러나 사망자의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쉽사리 잊힐 수 없는 삶일 것이다. 2020년 5월24일치 <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치가 10만 명을 돌파했을 때,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연령, 거주지와 그만의 특징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는 섹션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Kyra Swartz, 33, 뉴욕, 반려동물 구조단체에서 자원봉사함’. ‘이곳에 언급된 1천 명은 오직 사망자의 1%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단지 숫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None were mere numbers).’ < 뉴욕타임스> 기사는 단 몇 문장이었지만 숫자로 묻혀가던 이들의 삶을 사회로 호명해냈다.

최근 코로나19 시기 또 다른 사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책이 발간됐다. <2146, 529: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은 수치의 익명성과 무관심의 잔혹함을 민낯 그대로 보여준다. 2146과 529는 코로나19 사망자에 가려진 또 다른 희생자의 수치로, 2021년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 2146명 중 사고사와 과로사에 해당하는 노동자 529명을 뜻한다. 책은 뉴스 단신으로만 소개된 죽음을 일기처럼 기록해 소개하고 있다. 기사마다 보이는 ‘깔려 사망’이라는 표현은 죽음의 원인에 대해 분통하게 만들고 깔려 사망하던 그 찰나의 순간 사라져버린 소중한 삶을 고통스럽게 직면하게 한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에게 제목 속 수치는 코로나19 사례처럼 그저 누군가의 죽음을 표시하는 ‘익명’의 수치로 여겨질 뿐이다.

이런 시기에 재난 속 죽음을 잊지 않고 애도하려던 의례가 있었다. 2020년 3월18일 폐렴 진단 엿새 만에 숨진 정유엽(당시 만 17살)군의 아버지 정성재씨의 청와대를 향한 행진이었다. 정씨는 아들의 사망 1주기인 2021년 3월, 24일 동안 경북 경산시에서 청와대 사랑채까지 375.4㎞를 걸었다. 그는 줄곧 코로나19 확진자 수치 억제에 매달리던 시스템이 아들과 같은 발열 환자들이 죽음에 이른 원인이라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1년간 어떠한 반성과 변화도 목격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직장암 투병 중임에도 절박한 심정과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걷기를 택했다.

익명의 죽음에 대한 익명의 돌봄
정유엽군은 고열이 발생한 뒤 죽기 직전까지 코로나19 검사만 총 14회 받았다.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의 최종 검체 결과는 음성이었다. 그사이 병원 밖에서, 병원 안 격리실에서 반복된 음성 결과에도 코로나19 감염 의심환자로 분류돼 허망하게도 폐렴 진단 엿새 만에 숨졌다. 아버지와의 수차례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당시 유가족이 지역 시의원을 욕하고 다닌다는 소문부터 부모가 식당과 학원을 운영하기 위해 아들의 코로나19 검사를 막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 위로든 비난이든 결국 아들의 죽음은 교통사고와도 같은 ‘불행한’ 사건처럼 여겨졌다.

정씨의 도보행진 보도자료에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 ‘온전히 유족의 몫’으로 넘겨진 사후조사, 유족에 대한 ‘비난과 무관심’이 적혀 있었다. 특히 그가 아들이 숨지기 약 2시간 전 담당의에게서 들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당시 의사는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판정됐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세계질병학회에 보고해야 할 변종 바이러스”라고 통보했다. 의료진은 ‘파악할 수 없는’ 죽음을 의학적 사례로 보고하는 것이 중요했을지 모르지만, 가족에게는 그 죽음이 갖는 ‘의미’가 중요했다. 팬데믹 시기에 의료진이 돌봤던 대상은 삶이 있던 인간이 아니라 시간성이 배제된 ‘생물학적인 몸’이었다. 유가족이 의료진의 ‘과학적’ 돌봄을 경험하면서도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런 ‘익명의 관계성’ 때문일 것이다.

인류학자 리사 스티븐슨은 캐나다 북부의 이누이트족 자살 문제에 대한 당국의 보건정책을 조사한 뒤 ‘익명의 죽음’에 대한 ‘익명의 돌봄’ 방식이라 비판했다. 의료진과 보건정책가들은 이누이트족의 높은 자살률을 낮추려 했지만 이들은 개선돼야 할 보건통계 속 예비 수치에 불과했다. 그의 지적은 마치 코로나19 재난 속 정성재씨가 마주했던 한국의 현실을 겨냥한 듯 읽힌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 자살론>에서 각 사회는 ‘일정한 몫의 자발적 죽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를 이른바 ‘통계적 숙명론’이라 했다. 일정 수준의 자살 행위를 사회집단의 숙명으로 간주하는 주장에는 분명 논박의 여지가 있지만, 자살을 포함해 팬데믹 시기 개인의 죽음을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숙명’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성재씨의 ‘24일 도보행진’은 아들 죽음의 의미를 묻는 걷기 의례였다. 궁극적으로는 아들의 ‘삶의 의미’가 기억되길 바라는 걸음이었다. 실제로 그가 걸었던 375.4㎞는 죽은 자의 삶의 의미를 되묻는 살아 있는 시민들이 참여한 열린 애도의 공간이자 함께 기억하는 살아 있는 시간이었다.

애도하는 인간성이 사라진 일상
코로나19 사망자가 6963명을 넘어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팬데믹 사망자를 위한 기억과 애도의 시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일상이란 우리에게 어떤 시공간인지 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고대하던 그 일상이란 것이 또 하나의 익명의 기계 부품을 위한 거대한 톱니바퀴일 뿐이라면, 과연 재난을 벗어난 일상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던진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을 노동 ‘기계’, 생물 ‘기계’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애도하는 인간성’의 회복이지는 않을까.

김관욱 의료인류학자·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운영위원
한겨레21 제1400호(2022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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