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겨레21]죽음과 돌봄, 선택의 갈림길

팬데믹 시대 ‘돌봄체제로의 전환’은 필수… 대선에서 약속한 ‘통합된 돌봄’ 가능하려면 충분한 투자 이어져야

2020년 4월, 인도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코로나19 사태의 비극에 대해 역사적으로 팬데믹은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하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관문(portal)”이라고 비유하며, 지금 그 길을 통과하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편견, 증오, 탐욕의 시신들을 질질 끌며 죽은 사상, 죽은 강물, 검은 연기 자욱한 하늘을 우리 뒤에 남기며 통과할 것인가, 아니면 가벼운 차림으로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며, 그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 싸울 채비를 갖추며 걸어갈 것인가?”

재택치료가 지워버린 ‘돌봄의 위기’
팬데믹 3년째, 대선이라는 중요한 공식 정치의 일정을 치른 한국 사회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모두가 바라건대 죽음과 질병이 이어지는 선택이 아니라 코로나19로부터 ‘우리’라는 인류를 지켜낸 ‘돌봄이 있는’ 선택지를 향한 걸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오미크론 확산 속에 정부가 선택한 코로나19 치료 방법은 ‘재택치료’다. 가중된 의료체계 부담을 개인과 가족, 그리고 ‘집 돌봄’에 떠넘긴 셈이다. 재택치료와 자가치료의 등장은 마치 ‘당신은 스스로 알아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에 걸렸습니다’라는 시그널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자가치료는 ‘자가당착’이다. 건강 회복에 참여하는 많은 의료/비의료진의 돌봄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누구나 돌봄을 받을 필요와 자격이 있으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돌봄에 참여할 관계성을 지니는 상호의존적 존재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회복과 치유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팬데믹 초기의 돌봄 공백은 큰 사회적 위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재택치료라는 정책의 전환과 더불어 돌봄 위기와 돌봄의 공백이라는 심각한 현실은 빠르게 잊히는 듯하다. 집안에서는 무급으로, 사회에서는 저임금 비숙련노동으로, 가장 주목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역할’인 돌봄이 코로나19 이전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코로나19로 드러난 한국 사회 돌봄의 완전한 빈 구멍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 주요 경쟁자들은 돌봄을 자신의 공약으로 내걸었다. 기호 1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포함한 ‘5대 돌봄 국가책임제’를, 기호 2번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지역별 돌봄통합센터를 운영하고, 원스톱 상담-지원체계 구축’을 약속했다. 서로 다른 형태이긴 해도 ‘돌봄의 국가 책임화’ 시대가 도래하는 듯하다.

가장 하위계층에 떠맡겨진 돌봄노동
돌봄의 공식 정치의제화에 언급된 ‘통합된 돌봄’이 가능해지려면 무엇보다 돌봄의 경제(학)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는 낸시 폴브레(미국 애머스트 매사추세츠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돌봄노동에 대한 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을 제기하며 돌봄경제 투자를 강조한다.

노인과 아동을 돌보는 경제적 비용은 부담이나 낭비가 아닌 사회 인적 자원에 대한 중요한 투자다. 돌봄은 상품생산처럼 정해진 가치가 매겨지기 어려운 속성이 있지만, 인류의 지속가능성에 기초가 되는 ‘가치’ 생산과 관련된다. 국가가 돌봄을 책임지려면 그동안 ‘마르지 않는 샘’처럼 간주된, 평가되지 못하거나 저평가된 돌봄노동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정이 기본이 돼야 한다. 대선 공약 수준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돌봄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 즉 경제적 투자다. 돌봄은 돈이 필요하다. 국가의 투자 없는 돌봄 약속은 다시금 ‘보이지 않는 가슴’에 기대어 경제를 운영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돌봄에 대한 투자는 돌봄노동의 정당한 가치평가로 연결돼야 하며, 돌봄노동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서 시작해야 한다.

“돌봄은, 결국은 어르신하고 나하고 이꼬루(equal)가 돼야 하는 것 같아요.” 코로나19 확산 이전에 요양보호사로 돌봄노동을 하던 김혜선(가명)씨가 인터뷰에서 들려준 말이다. 이처럼 돌봄은 나와 너를 함께 고려하고, 네가 처한 상태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연결해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는 우리가 가진 잠재 역량이다. 돌봄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취약성을 깨닫게 해주는 실천이기도 하다. 돌봄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돌보고 배려하며, 어떻게 인간 존재로서 존엄을 지키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깊이 있게 성찰하고 실천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 고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돌봄은 계층화된 세계의 가장 ‘하위’ 계층에 떠맡겨져 있다.

최근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돌봄노동의 주변화 문제와 무관심에 맞서며 사회운용의 최우선 가치를 돌봄체제(Care System)로 전환하자는 요구와 운동이 시작됐다. 특히 돌봄을 공공의제로 포함하기 위해 분투한 지역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에 힘입어 2021년 멕시코 정부 주도로 유엔 협력하에 시작된 ‘돌봄노동을 위한 글로벌 동맹’(Global Alliance for Care Work)이 주요 동인이다. 이들의 운동은 이윤 축적과 경쟁의 운영체계가 아닌 돌봄체제로의 전환은 ‘권리로서의 돌봄, 모든 이의 돌봄 요구가 보장되는 보편성, 여성에게 치우치지 않고 함께 책임지며, 돌봄 받는 사람과 제공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는 자율성, 그리고 무급/유급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충분한 재정’이라는 주요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코로나19라는 관문 넘어, 새로운 세계로
돌봄을 인간활동의 근본으로 사고하고 돌봄체제로의 전환을 고민하는 맥락에서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즘 학자인 도나 해러웨이의 조언을 참고해보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가? 그리고 누구에 의해 어떤 대가가 주어지는가?” 이는 박쥐에서 기원한 바이러스가 왜 인간 감염으로 연결됐는지와 인수공통감염병의 주기적 출몰 속에서 인간이 인간만을 돌보는 데서 더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해러웨이가 다시 강조하듯 “되기가 아니라 함께-되기가 핵심이다.” 우리 누구도 스스로 홀로 태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이 상호의존의 취약성이 바로 인간이며,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본질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한 근본에 돌봄이 자리하고 있다. 그 돌봄을 인식하지 못하고 돌봄체계를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은 사상, 주검들과 남겨진 채 더 나은 세계로 열려 있는 코로나19라는 관문을 끝내 제대로 넘어서지 못할지 모른다.

문현아 젠더정치 연구자·‘건강과대안’ 운영위원
한겨레21 제1404호(2022년 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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