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공간은 ‘코로나19’처럼 변이한다

도시 거주민의 정치참여권·사회문화권·사회보장권을 기초로 한 ‘도시 시민권’을 고민할 시점

정부는 치명률 높은 변이 발생만 아니라면 ‘실내 마스크 착용’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역 조치를 해제할 뜻을 비쳤다. 코로나19를 엔데믹(Endemic·풍토병이 된 감염병)으로 간주하는 방역정책 전환은 시기상조라고 전문가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지만, 해외 입국자에 대한 방역 조치가 상당 부분 사라진 국제공항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전례 없던 대유행이 곧 사라지리라 믿는 듯하다.

사회적 편견과 전염병의 타자화
세계적 차원에서 코로나19는 ‘전례 없는’ 현상임은 분명하다. 건강과 보건의료 문제이자 사회·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건강과 노동 그리고 소비가 어떻게 연결돼 있고 상호 결합하는지를 보여주었고, ‘일상’과 ‘상식’이라는 신기루에 가려진 우리 사회의 수많은 모순과 갈등을 드러냈다. 풍요와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도시는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에 얼마나 취약한 공간인지를 보여주었고, 도시 슬럼 주민들은 확산하는 전염병으로부터 ‘빈곤한 격리’ 환경으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밀집한 사무실은 감염 위험 공간으로 재평가됐고 재택과 원격근무라는 ‘리모트 워크’는 노동시간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도시 간, 국가 간 이동이 경제·사회 체제 유지의 근간을 이루는 오늘날, 세계적 유행병에 대한 대응체계는 매일 발표되는 확진자와 위중증 환자 수, 전파율 같은 병리학적 기준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논의에 따라 규정되고 재생산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시장체제는 전염병을 국경이나 특정 지역에 가둬둘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전염병은 과거에도 그랬고 코로나19도 마찬가지로 ‘타자’의 은유로 온다. 감염에 대한 내재된 두려움은 전염병을 타자화(othering)하고 사회적 불신과 일상화된 차별은 이런 폭력을 극대화한다. 흑사병이 돌던 시기에는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전염병의 원인으로 타자화됐으며, 콜레라 시기에는 아시아인이 낙인과 혐오의 대상이 됐다. 1차 세계대전 시기 유행한 ‘스페인독감’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스페인에 타자화된 네이밍이다. 1918년 독감은 미국 캔자스주에서 처음 유행했지만 프랑스와 영국 언론이 스페인 기원설을 주장해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에서 전염병의 타자화는 낙인과 차별, 심한 경우 폭력과 학살로 이어졌다. 대유행 초기에 방역 당국이 해외여행을 하지 않고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는 이주민과 외국인에게 강제 검사를 받게 하며 코로나19 전파자로 낙인화하는 분위기는 여러 나라에서 반중국 감정과 외국인 혐오로 이어진 바 있다.

콜레라가 19세기를 규정하고 도시 산업화로 진입하는 시대를 알리는 전염병이었다면 코로나19는 탈진실과 가짜뉴스의 디지털 시대를 알리는 전염병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진실’이라는 말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빨리, 멀리 확산한 것이 코로나19 관련 거짓뉴스와 인종차별적 소문이었다. 비과학적인 거짓뉴스와 근거 없는 인종차별적 소문은 인터넷망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소문의 벽’도 없는 이런 지구화된 디지털 미디어 시대인 탓에 미국과 유럽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반아시아 감정이 거세졌다. 최근 뉴욕시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한 한국 유엔대표부 외교관 사례처럼 미국 주요 도시에서 보고된 반아시아인 증오범죄가 1년 사이 300% 이상 증가했다고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

국적 중심 시민권에서 ‘도시 시민권’으로
역사적으로 과거 전염병들은 큰 재앙을 가져다주었지만 재앙에 따른 변화 또한 가져왔다. 1918년 독감은 여러 나라에서 전후 공적 의료체제 구축으로 이어졌으며, 콜레라는 공중보건 개념과 위생·보건시설 강화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 경험은 어떤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기후생태-보건-경제의 전 지구적 위기는 국적을 중심으로 한 국민-국가 단위 중심의 제한된 복지나 비상 대응체계가 더는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폐쇄되고 밀집한 공간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집단감염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이주민, 특히 미등록 이주민을 배제하는 한국의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보장제도는 전염병 같은 공중보건 위기시 큰 한계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코로나19 이후 도시와 도시 시민권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공간이론에 착목한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가 현시대의 에피스테메(지식·과학을 뜻하는 그리스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도시는 오늘날 글로벌한 삶의 주요 부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무의식적 기초이자 궁극적 원리가 됐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공간으로 생산된 도시는 개발, 소비, 문화, 시장 등 신자유주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글레이저 같은 학자들이 도시를 혁신, 번영,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칭송하는 ‘도시적 승리주의’가 가세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사는 ‘세계적 도시화’가 진행됐다. 최근엔 도시재생 명분으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둥지 내몰림)을 추진하며 도시의 불평등과 파편화를 증가시켰다.

공간은 ‘사회’와 더불어 변화한다. 그런 측면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언급한 창의적 파괴를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방식의 공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현재 도시 공간은 더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도시 거주민의 정치참여권, 사회문화권, 사회보장권을 기초로 한 ‘도시에 대한 권리’와 직결된 도시 시민권(Urban Citizenship)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필요하다.

도시 시민권은 국적 중심의 시민권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서 ‘국민주의’ ‘국가주의’는 인류가 가진 상호 연대, 공동체, 헌신같은 감정과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통치의 방법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팬데믹을 통해 우리가 상호 연대하고 의지한 세계는 ‘국민-국가주의’라는 강고한 상징체계가 충분치 않으며, 사회적 소수자에게 더 배타적인 체제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국경 넘는 유럽연합 시민권의 가능성
필요에 따른 노동 이주가 현존하는 세상에서 이주 노동은 분업과 차별,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어느 국가도 배척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세계 여권’을 가지고 거주 이전과 노동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게 왜 상식이 될 수 없을까? 어느 나라에서도 거주하고 일할 수 있는 유럽연합 시민권이 보여준 가능성을 전세계로 적용할 수 없을까? 재일조선인의 삶을 배경으로 한 영화 <고>(GO)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왜 사람은 죽어서도 하늘나라(천국)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장면은 ‘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로 구분되는 현실의 굴레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도시 시민권은 말 그대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구성원의 권리다. 의료, 사회복지, 교육 등 기본적인 혜택은 도시 거주민 모두가 평등하게 제공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떠나고 새롭게 들어오며 개개인의 삶을 연결하고 협력하고 공유하는 정치적이며 사회·문화적인 관계야말로 지속되는 기후생태-보건-경제의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코로나19로 인해 ‘일탈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코로나19가 던진 세계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다시 한번 꼼꼼히 생각해볼 일이다.

박준규 인류학자·건강과대안 운영위원
한겨레21 제1408호(2022년 4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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